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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나이트 2 - 우상偶像 : 센카와 치히로

댓글: 5 / 조회: 1396 / 추천: 1



본문 - 06-21, 2017 17:45에 작성됨.

 백야야. 너 진짜 싸움 잘하더라. 두루마리 휴지로 사람을 패냐.

 맨주먹으로도 할 수 있는데 폼 좀 잡아봤습니다.

 두 번 폼 잡으면 파스타 면으로도 사람 잡겠다.

 다음에 보여드리죠. 삶은 걸로.

 이 새끼, 진짜 물건이네.

 제가 좀 그렇죠.

 네가 우리 조직 들어와서 다행이야. 딴 데 갔으면 큰일 날 뻔했어.

 여기 아니면 이 바닥 들어올 일도 없었습니다. 그보다 저는 강이 형님이 더 대단한데요. 서울대 수석 입학 하셨다면서요. 성적도 1등이셨다고 들었는데. 솔직히 말해 형님 없었으면 이 조직은 못 굴러가요. 경영 할 줄 아는 인간이 없잖아요. 저는 형님이 왜 공부 때려치우고 이 짓을 하시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공부 그거,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니다. 뭐, 이렇게라도 도움 되면 좋은 거지. 근데 너 싸움은 어디서 배운 거냐?

 형님도 잘 하시면서 뭘 묻습니까.

 너 만큼은 아니잖아. 특수부대를 데려와도 너보다는 약할 거다. 사실 휴지보다는 그게 더 신기하던데. 뒤에서 방망이 휘두르는데 안 보고 피하는 거. 무슨 미래 예지하는 것처럼.

 아, 그거. 유용하죠. 불편하고. 들어봤자 도움 안 되실 겁니다.

 튕기지 말고 얘기해라. 명령이다.

 음……. 그냥 항상 예민하고,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감각이 있는 기분이에요. 육감이라고 부르는 그거처럼. 사람을 마주하면 제 의지와 상관없이 느낌이 옵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틀려본 적 없고요.

 해부해 보고 싶어지는데. 그럼 그건 어떻게 하는 건데?

 매일 얻어맞고 줘터지다 맷집 붙고 몸이 안 움직일 때까지 트레이닝으로 힘 붙이고 목 언저리 베여가면서 도구 쓰는 법 익히고 하루에 세 번 씩은 죽을 뻔하고 사람 좀 죽이고 그러면서 흔적 처리하는 법 배우고 어떻게든 살려고 발버둥치고 그런 생활이 익숙해지고. 그 외에 세상 뭐 같은 일들 다 경험하면 돼요. 열 살 때부터. 그러다 보면 언젠가 됩니다.

 허어.

 도움 안 될 거라 했잖습니까.

 너도 좆 같이 살았구나.

 형님도 그러십니까.

 나도 뭐, 만만치는 않지.

 

 *

 

 눈을 떴을 때 치히로가 잔뜩 겁먹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사무실 소파, 커튼에 스며드는 아침 해, 굳어버린 여자와 여자를 위협하는 눈매 나쁜 남자. 나는 신속히 상황을 파악하고 치히로의 손목을 놨다. 핸드백이 떨어져 찰그락, 소리가 났다. 무너진 자세로 저린 손을 부여잡으며 치히로가 간신히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했다.

 “죄송합니다, 센카와 씨.”

 잘 때 좀, 예민해서. 미친 듯이 고개를 숙였다. 누가 오면, 깨버려요.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땅에 닿을 듯 허리를 굽히자 치히로가 나를 말렸다. 그만요, 그만해요. 습격에도 사과에도 식겁한 듯 했다. 갑자기 목소리가 그쳐 올려다보니 표정을 찡그린 치히로가 눈두덩을 누르고 있었다.

 “죄송해요. 잠깐, 현기증이…….”

 나는 더욱 개처럼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요즘 피곤해서 그래요. 다급하게 나를 붙잡고 치히로가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직도 가슴이 쿵쿵 뛰네요. 야근 하셨나 봐요?”

 “집까지 돌아가기, 번거로워서, 사무실에서 잤습니다. 누가, 오기 전에, 일어나려고 했는데.”

 눈을 굴려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6시. 출근하기에는 매우 이른 시간이었다. 치히로가 겸연쩍게 뺨을 긁었다. 제가 좀 일찍 출근하거든요, 프로듀서님의 잠을 방해해 버렸네요. 출근해서 사무실 문을 열면 항상 커피 향과 함께 치히로가 있던 것이 기억났다. 매일 이 시간에 출근하는 건가. 나도 제법 일찍 출근하는 편이지만 이 사람은 더 하는군.

 “부지런한 것은, 좋은 거죠.”

 나는 느릿하게 떨어진 핸드백을 주웠다. 치히로가 얼른 돌려받더니 또 찰그락, 소리가 났다. 살짝 벌어진 틈으로 하얀 통이 두어 개 스쳤다. 저게 부딪힌 건가, 보기보다 묵직한데.

 “프로듀서님처럼 열심히 일하는 것도 아주 좋아요. 하지만 아냐가 걱정하지 않게 적당히 하셔야 돼요.”

 “네.”

 그렇지, 그건 조심해야지. 사실 나는 치히로에게 미안해하면서도 일찍 깨워준 것에 대해 매우 감사했다. 데뷔 축하 이후 아나스타샤와 사이가 가까워진 것은 좋았지만 그 만큼 걱정도 깊어진 까닭이었다. 사흘 전에는 혼자 밥 먹는다고, 이틀 전에는 잘 웃지 않는다고, 어제는 여가 생활을 보내지 않는다고 걱정을 받았다. 마음씨는 아름다웠으나 꾸준히 사회부적응자 취급을 받는 것은 좋은 경험이 아니었다.

 만약 소파 위에서 자고 있는 나를 아나스타샤가 보았다면, 나는 불쌍한 노숙자를 향한 연민의 시선을 받았을 터였다. 쓸데없는 걱정을 시켜서는 안 되겠지. 그러려면 우선 씻어야 돼. 땀냄새를 지우러 직원용 샤워실에 들어갔다.

 옷을 벗고 거울 앞에 서자 목 아래 흉터가 눈에 들어왔다. 목만이 아니라 팔이나 복부, 등에도 새겨져있다. 전부 중학교 이전에 생긴 상처들이었다. 정장으로 가려도 더위가 몸 안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면 가려움에 시달렸다. 체질 때문인지 이것도 겨울에는 잠잠해지지만 지금은 참을 수밖에 없다.

 찬물을 틀고 땀을 씻는 동안 거울에 새겨진 흉터와 똑바로 마주했다. 그 시절을 잊지 말라고 이리도 선명하고 아픈 것일까, 가끔 의문이 들었다. 분명 그런 것일 거라고, 지독한 악취미라고, 혼자만의 결론을 내렸다. 쿨패치를 붙인 뒤 사무실로 돌아왔다. 아이스팩을 주무르다 꿈을 떠올렸다.

 어떤 일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사람을 프로듀서라고 한다면, 강이는 최고의 프로듀서가 틀림없었다. 나를 포함해 가진 건 힘 밖에 없는 오합지졸들을 ‘조직’으로서 기능케 한 매우 유능한 프로듀서. 철저한 계획과 추진력을 바탕으로 일을 시작했고 실수에 대한 임기응변도 뛰어났다. 강이는 항상 “백야, 네 없었으면 못 하는 일이야.”라고 말했지만 그 일들은 대부분 강이가 없었다면 떠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학수가 나에게 몸 쓰는 법을 가르쳤다면 강이는 머리 쓰는 법을 가르쳤다. 일을 시작할 때는 주변의 정리부터, 본진이 온전해야 설계가 가능하다, 동선을 짜고 일정을 계획한 다음 효율에 따라 움직여라.

 “오늘 일정은.”

 깜빡이는 커서를 움직였다. 우선 지난 일의 보고서. 이건 마무리만 하면 돼. 그리고 다음 일을 기획해야 해. 오퍼가 들어온 일들은 대강 추려놨으니 검토만 하고. 기획서를 쓴 다음 보고를 올린 뒤 업체 미팅을 가면 되겠군. 어디까지나 강이의 방식대로 짜여진, 지킬 수만 있다면 엄청난 효율을 가져올 일정표가 완성되었다.

 이대로 수행할 수 있을까, 걱정 하고 있을 때 치히로가 내 몫의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감사합니다.”

 “뭘요. 일정표 만든 거예요?”

 “있으면, 편리할 거 같아서요.”

 흐음. 치히로가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홀짝이고 동공에 내가 쓴 일정을 담았다. 이상하게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빡빡하지만 효율적이네요. 이대로만 할 수 있으면 이상적이겠는데요. 그래도 아까 말씀드렸듯이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나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치히로와 책상 한 귀퉁이의 쪽지를 번갈아 봤다. 입사 첫날 치히로가 적어준 주의사항들이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말이 특히 눈에 띄었다. 성실, 프로페셔널, 통찰력. 여러 가지로 강이와 닮았어. 유능한 사람이야.

 커튼 사이 벌어진 틈으로 침입한 햇빛에 코팅된 쪽지가 반짝거렸다. 나는 커튼을 더 철저히 닫고 이마의 땀을 닦았다. 이젠 아침에도 제법 더워졌군. 쪽지의 내용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빨리 아나스타샤가 오기를 바라며 보고서를 마무리했다.

 

 *

 

 “다시.”

 부장이 보고서를 툭, 던졌다. 나는 무덤덤하게 보고서를 집어 들고 자리로 돌아갔다. 다섯 번째인가, 이제 적당히 받아줄 만도 한데. 스치는 책상마다 은근한 비웃음이 따라왔다. 그들만의 조롱 섞인 은어도 함께. 들키고 싶지 않다면 메신저를 좀 더 철저히 가리고 목소리를 낮추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대놓고 따돌리려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만두기로 했다. 그 정도로 이 사무실 안에서 내 위치는 확고했다.

 경력도 없고 언어도 안 되는 낙하산. 그런 주제에 아이돌 잘 만나서 순식간에 성과를 올린 신참. 사나운 외모에 견주어 뒷소문이 따르기 좋은 인간.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나는 남들에게 미움 받기 좋은 요소들로 이루어져있었고 그 중 대부분은 사실이었다. 받아들여야겠지. 단, 아나스타샤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조치만 취해두면 되겠지. 그보다 문제는 부장이었다.

 사무실에 들어와 내가 제일 처음으로 한 일은 인간파악이었다. 딱히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 강이와 학수에게 배운 버릇이었다. 집단에는 다양한 인간군상이 모이기 마련이라지만 부장은 그 중에서도 좋지 않은 부류에 속했다. 내가 놓친 점이 없다는 가정 하에 부장은 일을 안 했다. 맡은 업무가 그저 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건가 싶을 정도로 완벽하게 일을 안 했다. 그런 업무가 정말로 존재한다면 부장만큼이나 적격인 인물은 없을 것이었다. 이는 좀 전의 보고서에서도 알 수 있었다. 영양가 없는 반복 작업에 지쳐 네 번째 보고서에서 아무것도 수정하지 않고 가져간 다섯 번째 보고서가 별 다른 말없이 퇴짜를 맞았다. 이대로 여섯 번째를 내도 눈치 채지 못 하겠지. 이번에는 통과할지도 몰라.

 부장의 앞에 서면 나는 강이가 한 말이 떠올랐다. 뭐든 빠르게 성장하면 문제가 생겨, 성장속도가 빠르더라도 밟아야 할 단계는 반드시 거쳐야 하지. 그 말에 따라 부장과 나를 분류하니 과연 강이는 옳았다. 내가 너무 빨리 성장해 남들에게 위협이 된 유형이라면, 부장은 밟아야 할 단계를 거치지 않아 걸러내지 못한 유형이었다. 그런 인간이 높은 직급을 달았으니 아웃사이더인 나로서는 골치가 아팠다.

 되도록 평화적인 방법을 모색하고 있을 때 선배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뭐해?

 “업체 미팅 가야지.”

 

 홋카이도 출장에서 알게 된 선배는 유능하고 깨는 인물이었다. 신칸센에서부터 “내가 일 하나는 잘 하잖아.”, “잘 보고 배워둬.” 같은 말을 했는데 이런 식의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과 달리 선배는 일을 잘 했다. 부서 최고의 실적을 내서 부장도 찍소리 못 했고, 성격도 좋아 인기가 많았다. 재능과 센스를 겸비한 자신감 넘치는 노력파, 분위기 메이커, 후배들의 귀감. 온갖 좋은 평가들이 선배의 뒤를 따랐다.

 아나스타샤가 겨울이라면 선배는 가을이었다. 때문에 말은 안 했지만 나와 잘 맞았다. 유일한 문제점은 들을수록 질리는 허세로 스스로의 평가를 깎아먹는다는 점. 그래도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라 싫지는 않았다. 선배가 내 사수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같이 다닐 수밖에 없기도 했고.

 그런 점을 이용해 선배는 나를 적잖이 도와줬다.

 “너 그대로 있었으면 부장한테 잡혀서 영영 못 나왔을 거야.”

 “그래서 더, 선배에게 감사하죠.”

 “하여간에 부장, 마음에 안 들어. 회사 사람들도 문제야. 좀 잘 나간다고 그렇게 따돌리고, 비웃고, 말 안 통한다고 뒷담 까고. 타지에서 힘들게 일하는 사람인데 따뜻하게 대해주지는 못할망정.”

 내가 대신 욕 해줬다, 고맙지? 선배가 씨익, 웃어보였다. 그러니 너는 이 선배만 믿고 따라오렴, 그럼 가만히 있어도 반은 간다. 나는 황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말만 안 했으면 좋았을 텐데. 못 알아들을 한국말로 중얼거렸다.

 데뷔 무대의 성공 이후 아나스타샤에게는 신인에게 과분할 정도로 많은 일들이 들어왔다. 미니라이브와 잡지인터뷰, TV 출연이 특히 눈에 띄었다. 이 일들이 아나스타샤의 커리어가 될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부담감이 어깨에 뭉쳤다.

 아이돌로서 아나스타샤의 빠른 성장은 멈출 수 없었다. 주위의 견제가 있더라도 회사 차원에서 밀어줄 테니까. 때문에 내 역할이 중요했다. 나는 밟아야 할 단계를 거쳐 아나스타샤 앞으로 들어온 일들을 정리했다. 오늘의 미팅도 단계 중 하나였다.

 업체 사람과 직접 대면 할 때가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신참인 나로서는 마땅히 물어야 할 질문을 하지 못해 곤란한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 때마다 베테랑인 선배가 옆에 있으면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또한 사전 선별작업이 도움이 됐는지 이전의 방송관계자처럼 짜증나는 인간을 만나는 일은 없었다. 충실한 시간을 보내고 회사 앞 중국집에서 늦은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을 때 선배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너 진짜 집요하더라. 신참 주제에 그런 건방진 말 할 수 있는 건 너 밖에 없을 거야.”

 “그저 팩트로, 말했을 뿐입니다.”

 “그 팩트를 말 못해서 뒤통수 맞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야. 그래도 뭐, 꼼꼼하게 일처리 잘 한다는 거니까. 금방 내 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보기와는 다르게 일 잘하네. 선배가 메뉴판을 펼쳤다. 아까는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나도 네 첫인상은 좋지 않았어, 영락없는 낙하산이라고 생각했지. 나는 컵에 물을 따르며 공감했다. 제가 생각해도, 그럴 겁니다. 일에 대한 자신감만큼이나 선배는 노동을 신성시여기고 있었다. 그것이 곧 능력으로 연결되는 사람이었으므로 실제로 낙하산이 맞는 내가 안 좋은 평을 듣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네가 일 잘하니까 다행이었지. 가르쳐주면 금방 배우고, 일하는데 신념도 있고. 보니까 노출 많은 그라비아 같은 건 하나도 안 받았더라?”

 “제가, 그런 걸 싫어하거든요. 미소녀에, 환장하는 놈들이 생각하는, 여자와 성에 대한, 과도한 판타지요. 저의 아름다운 아나스타샤에게, 그딴 걸 묻히기, 싫습니다.”

 “나도 과도한 섹시 컨셉은 싫어하지만 넌 좀 심한 거 같아.”

 “상관없어요. 타협, 안 합니다.”

 그보다, 주문하죠. 메뉴를 고른 선배가 내게 메뉴판을 넘겼다. 나는 무심히 페이지를 넘겨 항상 먹던 메뉴들을 주문했다. 이거랑 이거, 이거는 곱빼기로, 그리고 이거랑, 또……. 선배의 표정이 굳어가자 나는 손을 휘저었다. 더치페이, 할 겁니다. 생기를 되찾은 선배가 지적했다.

 “그거 다 먹게?”

 “네.”

 “저번 점심때는 그렇게 안 먹었잖아?”

 “그 때는, 아나스타샤가 있어서요. 과식하면, 걱정하니까. 혼자 먹을 때는, 보통 이 정도로 먹습니다.”

 안 남기니까, 걱정 마세요. 주인집 딸에게 주문했더니 언제나처럼 호의적인 목소리로 답해주었다. 내가 혼자 와서 음식을 잔뜩 시키면 항상 저런 목소리로 받아주었는데 시선이 적잖이 부담스러웠다. 단순히 가게 매출 올려준다고 이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특별히 많이 먹는 남자에게 페티시가 있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모르는 척 피했더니 이쪽에서는 선배가 질렸다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회사 사람들이 너보고 뭐라고 놀리는지 알아?”

 “낙하산. 눈매 사나운 놈.”

 “그리고?”

 “다는, 못 알아듣죠.”

 “최근에 새로 생긴 거 하나 있어. 노예.”

 네?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선배가 혀를 찼다.

 “데뷔 이후로 네가 이상할 정도로 아냐에게 잘 해주고 신경 쓰니까 붙은 별명이야. 아이돌이랑 친하게 지내는 게 문제는 아니지만 넌 좀 이상하다고. 노예가 주인에게 충성하는 수준이라고. 내가 봐도 그래. 넌 아냐가 말하는 것에 너무 과민하게 반응해.”

 갑자기 입맛이 달아났다. 설마 나의 헌신적인 노력이 열 살 차이나는 고등학생을 향한 불순한 애정으로 비춰졌을 줄이야.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아나스타샤도 아는 건, 아니죠? 부끄러운 건 아냐는 듯 선배가 고개를 저었다. 귀에 들어가기 전에 조심해라.

 기껏 나온 음식의 맛이 둔하게 퍼졌다. 또 나 때문에 아나스타샤에게 안 좋은 소문이 생겼다니. 와전되기라도 하면 큰일이야. 기계적으로 음식물을 넘기다 선배가 무심코 흘린 말이 귀에 걸렸다.

 “치히로가 있어서 다행이야. 동병상련이라 그런가. 너한테도 잘 해주고.”

 “무슨, 소립니까?”

 “입사 초기에는 치히로도 소문 안 좋게 퍼져서 고생 제대로 했거든. 지금이야 유능한 사무원으로 인정받고 일하지만 진짜 힘들었을 거야. 매일 같이 새벽 일찍 출근하고 야근까지 하면서 완벽한 모습을 유지하더라. 생각해 보면 성격도 정말 좋아. 그렇게 무시 받으면서도 끝까지 웃고 사람들 챙겨주고.”

 “잘 아시네요?”

 “입사 동기니까. 나도 그 때는 내 할 일 바빠서 못 챙겨줬지. 요즘은 많이 편하게 일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지만 진짜 그 때 생각하면…….”

 선배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하여간에 이것도 다 부장 때문이야. 그 인간은 바뀐 게 없어. 좀 안 맞는다고 끝까지 괴롭힐 것 같더니 치히로가 잘 나가니까 요즘은 또 친한 척…….”

 

 *

 

 “제발 좀…… 내가 더 이상 전화하지 말라고 했잖아. 벌써 몇 번째인 줄 알아? 언제까지 귀찮게 하려는 건데? 돈 없어, 나도. 버는 족족 그쪽으로 부쳐서. 대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이제 와서……. 그냥 아쉬우니까 손 벌리려는 거잖아. 아니야? 당신들, 정말 뻔뻔해. 됐어. 필요 없어. 정말 이제 그만하라고! 못 알아듣는 것도 아니고.”

 

 *

 

 주스 캔으로 레슨실의 문을 두드렸다. 마침 안무를 마친 아나스타샤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프로듀서! 나는 트레이너에게 인사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커다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피해 그늘에서 아나스타샤와 마주했다.

 “конференция, 회의, 끝났어요?”

 “응. 좋은 일 받아왔어.”

 “점심은요? 혼자 먹은 거 아니죠?”

 트레이너가 과장된 기침으로 웃음을 가렸다. 선배랑 먹었어. 나는 착잡한 기분으로 답하며 트레이너에게 할 변명을 준비했다. 기특하다는 웃음을 지은 아나스타샤가 잠깐 기다려 달라고 했다.

 “샤워, 금방 하고 올게요.”

 나는 바로 돌아섰다. 소문이랑, 많이 다릅니다. 트레이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요.

 “아냐가 프로듀서 씨의 걱정을 많이 하더라고요. 친해졌다고 자랑도 하고요. 뭐라고 할까, 제가 보기에는 그…… 노예보다는 애완동물을 걱정하는 느낌이에요.”

 “주종관계인 건, 변함이 없군요.”

 “아, 혹시 기분 나쁘셨나요?”

 유쾌한 건 아니지만 엄격하게 따지고 들 생각도 없어서 나는 그냥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오해를 하지 않는 것만으로 감지덕지였다. 다행히 트레이너와는 이 정도 수준의 농담을 나눌 만큼 안면을 튼 상태였다. 단지, 나를 미치게 만드는 것은 망상이었다. 오른쪽에서 고압적으로 내 머리를 짓밟는 아나스타샤와 왼쪽에서 해맑게 내 목줄을 잡고 있는 아나스타샤를 보고 있으려니 눈알을 파내고 싶어졌다. 중앙에 있는 트레이너에게 초점을 맞추고 음료가 든 봉투를 건넸다. 주스 드세요.

 “감사합니다.”

 “레슨은, 어떻습니까?”

 “순조로워요. 정말로 열심히 하거든요. 지금 연습하는 부분이 꽤 어려운데도 포기하지 않고요. 데뷔 이후로 특히 더 의욕적이에요.”

 “그렇군요.”

 나는 차가운 주스 캔으로 뺨을 식히며 정보를 구했다. 나보다 오래 회사에 다닌 사람이니까 주로 회사에 대한 것들. 아나스타샤에 대한 것을 포함해 그 주변 인물들. 내가 모르는 회사 뒷소문과 이미지까지.

 그러다 의외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아냐가 프로듀서 씨를 위해 선물을 준비하고 있어요.”

 “선물이요?”

 “네. 아이돌로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뭘 주면 좋을지 저한테 조언을 구했는데, 혹시 말해주실 수 있나요?”

 “글쎄요. 딱히, 필요한 게 없어서.”

 트레이너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기쁘지 않으신 건가요?

 “아뇨. 매우, 기대됩니다.”

 “표정이 계속 무뚝뚝하셔서요.”

 “이건, 그…….”

 “알아요. 원래 표정 변화가 없으신 거. 그래도 너무 무표정하신데요. 비주얼 레슨을 좀 받으셔야 할 거 같은데.”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얘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 때 아나스타샤가 위기에 빠진 나를 구하러 들어왔다. 반짝이는 은발에 물기와 희미한 샴푸 냄새, 그리고 겨울이 묻어있었다. 가봐야겠습니다. 네, 계속 수고하세요. 먹이를 놓친 트레이너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묘한 분위기를 감지한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트레이너랑 разговор, 무슨 얘기했어요?”

 자판기에서 새 주스를 뽑으며 말했다. 일에 대해서. 그러자 안도하면서도 우물쭈물 거리며 대화 내용을 캐내려 했다. 준비 중이라던 선물 때문인가. 트레이너와 한 얘기는 비밀로 해야겠지. 필요한 물건은 없지만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때문에 나는 아나스타샤가 한껏 고민해서 결정한 선물이 받고 싶었다. 결정할 때까지의 과정도 즐거움일 테니까. 그리고 나도 아나스타샤를 위한 선물을 준비해야겠는데.

 잠깐 복도에 서서 떠드는 동안 귀가 옆방의 소리를 잡아냈다. 내가 아니라면 듣지 못 할 만큼 작았다. 통화 중인 건가. 금전 요구를 거부하고 있군. 내용과 억양이 점점 거칠어졌다. 하필 아나스타샤와 대화중일 때. 차단하고 싶었지만 감각이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오른쪽으로는 누군가의 분노와 증오를 받아내며 왼쪽의 겨울 바람소리에 귀 기울였다.

 

 *

 

 “프로듀서. 계속 일인가요?”

 “아직, 다 못 끝낸 일이 있어서.”

 “отдых(휴식), 쉬지 못하는 것 같아요.”

 “잘 쉬고 있어.”

 “프로듀서, 선배님한테 들었어요. 프로듀서가 계속 힘들게 일한다고.”

 “내가 하고 싶어서, 열심히 하려고, 그러는 거야. 너도 알잖아.”

 “매일 늦게까지 일한다면서요?”

 “선배도, 매일 야근해.”

 “밤늦게 다니는 거, 위험해요.”

 “……어떻게 해야 안심할래?”

 “프로듀서가 걱정 안 시키면요.”

 “내가, 그렇게 걱정시켜?”

 “데뷔하고, 오히려 만나는 시간이 줄었잖아요.”

 “같이 시간 보내도록, 노력할게. 됐지?”

 “퇴근은요?”

 “일 다 끝내고, 전화할게. 그러니까 너도, 돌아가서 푹 쉬어.”

 “……назначение. 약속이에요?”

 “약속할게.”

 

 *

 

 원래 오늘 일정표에는 야근이 예정되어있었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니고 일이 좀 밀릴 것 같아서 자체적으로 계획한 것인데 좀 전에 지워버렸다. 시간 맞추려면 퇴근 전까지 쉴 틈이 없겠군. 자판을 두들기는데 치히로가 에너지드링크를 갖다 주었다.

 “마시면서 하세요.”

 드링크판매원이 치히로의 별명이었지. 항상 웃으면서 드링크를 챙겨준다고 해서. 여름에 지독히도 약한 나에게는 이렇게 고마운 별명도 없었다. 감사합니다. 바로 캔을 따고 반쯤 들이켰다. 무더위에 금방 말라버리는 목이 차갑게 젖었다.

 치히로가 신기하게 지켜보았다. 청량감 넘치는 음료 광고를 보는 표정이었다. 나는 괜히 시계를 쳐다봤다.

 “퇴근, 안 하십니까?”

 “이제 준비해야죠. 프로듀서님이야말로 준비하셔야 하지 않아요?”

 “보고서 때문에, 일이 좀 밀려서요. 최대한, 빨리 끝낼 겁니다.”

 잠깐 봐도 될까요? 치히로가 여섯 번째 보고서를 가리켰다. 내가 끄덕이자 빠르게 내용을 훑어봤다. 꼼수를 눈치 챘는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나는 눈썹을 움직여 인정했다. 폰트만 수정했습니다.

 “이걸로는 통과 못 하실 거예요. 분명 트집 잡힐 걸요.”

 “고칠 수나 있게, 트집이라도 잡히면 좋겠습니다.”

 “도와드릴까요?”

 인사치레인가, 싶었는데 대답도 듣지 않고 치히로가 의자를 끌고 왔다. 야근하시다 또 아침처럼 되면 안 되잖아요? 아직도 가슴이 쿵쿵 뛰어요. 그 말에 내가 또 고개를 숙이려 하자 얼른 취소했다. 농담이에요. 나는 멋쩍게 뒤통수를 긁었다. 호의를 받아들여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 부장이 찾아왔다.

 “자네들. 퇴근 안 하나?”

 “아직…….”

 “아직 프로듀서님의 일이 안 끝나서요. 아무래도 늦게까지 일해야 할 거 같은데 도와드리고 같이 퇴근하려고 해요.”

 “이 사람 일을 왜 자네까지 남아서 하나?”

 “혼자 남아서 일 하게 만들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서포트 해드리는 게 제 일인 걸요.”

 “오늘 술자리 있는 거 잊었나?”

 치히로가 아차, 하자 부장이 혀를 찼다. 자네도 잊는 게 있군. 나는 혼자 멀찍이서 상황을 지켜봤다. 술자리라.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날 빼놓으려고 선배한테도 말 안 한 건가.

 부장이 내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아까 그거로군? ‘이때까지 뭘 했느냐’, ‘남에게 손 벌리지 마라’ 따위의 말을 하며 부장이 보고서에 사인을 했다. 종이가 심히 아까웠지만 한시름 덜었으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적당히 하고 끝내고 오도록 해. 그리고 자네는…….”

 자네도 올 건가? 노골적으로 원치 않음을 나타내는 눈빛이 나를 쏘아보았다. 나는 원하는 대답을 해주기로 했다. 술, 마시지 않습니다.

 “퇴근 후에, 할 일도 생겨서요.”

 “그럼 알아서하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장이 사무실을 나갔다. 나는 남은 드링크를 한 번에 들이키고 다시 자판으로 손을 향했다. 그러자 치히로가 사과했다.

 “죄송해요.”

 “뭐가 말입니까.”

 “그게…….”

 “술, 정말로 안 마십니다. 몸이 안 받아요. 퇴근 후에, 할 일 있고요.”

 “일이 갑자기 생기시나요?”

 기획서에 마침표를 찍었다.

 “급한 일이거든요.”

 

 *

 

 안 마실 거냐?

 술이 몸에 안 받는 체질입니다.

 뭔 놈의 체질이 그 따위야. 더워도 안 되고 술도 안 되고 담배도 안 되고. 대체 술 없이 이 좆같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

 저는 인생을 희망적으로 보려고 노력하거든요.

 부럽다. 진짜. 정말로…….

 힘든 일 있으십니까?

 하루하루가 힘든 일의 연속이지.

 오늘은 특히 더 힘들어 보이십니다.

 ……백야야.

 네.

 진짜 증오하는 놈들이랑 같이 살아봤냐? 진짜 씨발,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화가 치미고 죽여 버리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놈들하고. 분노를 꾹꾹 눌러가면서. 살아봤냐?

 살아봤습니다.

 학수라는 놈?

 네.

 죽여 버렸다고 했지?

 중학교 졸업식 날이요.

 부럽다. 나도 너처럼 콱, 죽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차마 그러지는 못 하고 고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연을 끊었어. 그 때부터 돈 한 푼 안 받고, 나 혼자 벌어서 공부하고, 밥 먹고, 그렇게 살았어. 대학도 가고 싶지 않았는데 그 인간들한테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어서, 네들 없이도 나는 잘 산다고 보여주려고. 그런데…… 오늘 그 인간들한테 돈 부쳤다.

 …….

 아직 못 갚은 빚이 많아. 그거 다 갚아야 비로소 내 인생이 시작되는데. 이름도 바꾸고 벌써 몇 년 째 얼굴 한 번 안 마주치고, 목소리도 안 듣고 살았는데. 그 인간들의 그림자가 자꾸만 따라와.

 …….

 얼굴도 닮아가고 말투나 행동도 점점 비슷해져가. 인생 우울하게 사는 것도, 이렇게 술 처마시고 자괴에 빠져서 나를 소모하는 것도…….

 ……그만 마시죠. 많이 취하셨습니다.

 너 저번에, 내가 왜 여기서 일하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네.

 큰형님 때문이다.

 큰형님이요.

 그래. 큰형님. 그 또라이 같은 인간이 나한테 어떤 짓을 했냐면…….

 

 *

 

 회식이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 둘 씩 흩어졌다. 누군가는 집으로, 누군가는 2차로. 치히로는 제일 먼저 일행들과 멀어졌다. 유흥가를 조금만 벗어나면 나오는 어두운 골목을 그녀는 비틀비틀 혼자 걷고 있었다. 부축할 사람도 없이 기울어지는 불안한 걸음으로.

 발소리가 치히로에게 다가갔다. 어깨를 떨더니 그녀가 돌아섰다. 마치 알았다는 것처럼 부장과 마주했다.

 “또 무슨 일이세요?”

 부장이 술냄새 섞인 숨을 토했다. 그가 한 발을 딛자 치히로가 한 발 뒤로 빠졌다. 무슨 일이냐고요. 경고하듯 말했다.

 부장이 알아듣기 어려운 발음으로 되도 않는 말을 지껄였다.

 “가는 방향이 같았을 뿐이야.”

 “그럼 그냥 가던 길 가시죠?”

 부장이 과장되게 이를 갈았다. 너 요즘 너무 건방져. 제 딴에는 위협하는 것 같았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매우 우스꽝스러운 행위였다. 치히로도 그것을 알고 더 이상 뒷걸음치지 않았다. 핸드백을 꼭 쥐고 정면으로 다가오는 부장과 마주섰다.

 “상사 말에 따박따박 말대꾸나 하고 말이야.”

 “근무시간 한참 전에 끝났어요.”

 도발하듯 가시 돋친 어투에 부장의 안면이 씰룩였다. 치히로를 밀쳐 벽 쪽으로 몰아세웠다. 네가 그 따위로 구는 게 문제라는 거야!

 “앞에서는 웃는 척 하면서 뒤에서는 이런 식이지. 그러니 네 소문이 안 좋은 거야. 독한 년, 악마 같은 년이라고.”

 “그러는 부장님은요? 소문이랄 것도 없이 부장님 평판 안 좋은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이게 자꾸!”

 부장이 손을 드는 순간 치히로의 눈빛이 변했다.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부장의 머리를 잡아 벽에 처박고 옆구리에 주먹을 때려 넣었다. 놈이 중심을 잡으려고 경련하자 벽에 대고 머리를 한층 강하게 짓눌렀다. 압정으로 포스터를 고정하는 느낌이었다. 머리가 짜이는 고통에 놈이 비명을 질렀다.

 “움직이지 마라. 목, 꺾인다.”

 폰을 조작해 영상을 보여줬다. 방금 전 부장이 치히로에게 저지른 짓이 고스란히 찍혀있었다.

 조용히 경고했다. 내일부터, 회사 나오지 마. 다시 옆구리를 무릎으로 걷어찼다.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복부에 어퍼컷을 때려 빠르게 정리했다. 성질 같아서는 이 녀석과도 긴 밤을 보내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있었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녀석을 두고 나는 치히로에게 말했다. 그만 가시죠. 아침과 같은 눈이 나를 보고 있었다.

 

 *

 

 “고마워요.”

 골목을 벗어나자마자 치히로가 내게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기도 전에 치히로가 침묵을 끊었다.

 “그런데 일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이게, 일이었습니다.”

 “네?”

 “알고, 있었거든요. 대충.”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할 말이 많은데 주변에 자판기가 보이지 않았다. 막막해 하는 나에게 치히로가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나는 아쉬운 대로 침으로 입술을 적셨다. 선배에게 들었습니다.

 “선배라면…….”

 “그렇다고, 선배를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마세요. 선배는 몰랐어요. 이 일에 대해서도, 센카와 씨에 대해서도. 선배가 말해준 건.”

 좋지 않은 소문과 별명, 내가 몰랐던 회사 안에서의 나의 취급. 그리고 나와 비슷한 처지였다는 입사 초기의 치히로.

 “제가 아는 것과는 다른, 센카와 씨의 모습이었습니다. 선배는, 센카와 씨가 회사 생활 초기에 크게 고생했고, 이를 도와주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품고 있었습니다. 요즘은 편해져서, 정말 다행이라 했죠. 이상했습니다. 제가 아는 센카와 씨는, 아침 6시면, 회사에 오는 사람인데.”

 “그건…….”

 선배는 회사 안의 인기인이었다. 성격이 좋아서 나 같은 인간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인물. 특히 일 잘하는 사람에게 강한 호감을 보였다. 그런 사람이 마찬가지로 나 같은 놈에게 친절하며 유능한 동기인 치히로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은.

 “숨기는 게, 있으시죠?”

 치히로의 눈썹이 떨렸다.

 트레이너에게서 ‘회사 뒷소문의 치히로’를 들었다. 일하는 모습이 독하고 악마 같다고. 그래야만 했겠지. 입사하자마자 부장 같은 놈에게 찍혔으니. 도와주는 사람은 없고 남들 몇 배의 노력을 해야만 남들과 같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치히로의 가장 독한 점은 ‘친절과 배려를 유지하면서’ 회사 생활을 이어갔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물론, 선배가 모두 헛다리짚은 건, 아니에요. 센카와 씨의 노력, 능력, 그리고 야근을 하지 않는다는 점은, 잘 알았죠. 야근을 안 하니까, 센카와 씨가 편해졌다고, 생각한 겁니다. 궁금했습니다.”

 어째서 아직까지 새벽 출근을 하는 걸까. 이젠 예전보다 상황이 나아졌는데. 조금 더 여유를 갖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열심히 해도 될 텐데. 그걸 모를 만한 사람도 아닌데. 노력하지 않는 자신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걸까? 그러면서 왜 칼퇴근은 지키는 걸까.

 “무엇이, 센카와 씨로 하여금, 퇴근 시간을 지키게 만들었나.”

 골목을 가리켰다. 저 놈이더군요.

 치히로는 부장하고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회사 안은 물론 회사 밖에서도. 그래서 평소에는 일찍 퇴근을 했지만 오늘은 내 일을 도우려고 한 것이다. 내 말을 끊으면서까지 다급하게. 회식이 있다는 걸 잊어버린 척 하고.

 “회사 안에서, 센카와 씨가 겪는 모든 일의 원흉. 스트레스와 지병, 뒷소문, 동료들의 시기까지, 전부.”

 저놈 때문이거나, 저놈이 관련되어 있었죠.

 핸드백 안에 들어있던 위장약과 두통약. 어찌 보면 회사원의 필수품이라 할 수 있는 것들. 쉽게 자세가 무너지고 걸을 때 중심이 기우는 것은 안 좋은 자세로 장시간 일을 했기 때문이야. 현기증도 있었지.

 “카페인 중독도.”

 아침마다 항상 끓이는 커피. 수시로 챙겨주는 에너지 드링크. 단순히 챙겨주는 게 아니라 자신도 자주 마시기 때문에 겸사겸사 챙겨준 것들. 판매원이면서 자신이 최대 복용자였어. 남들 몇 배의 일을 해야 하니까 달고 살았겠지. 지금에 와서는 벗어나기 힘들게 됐고.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건, 카페인의 부작용이죠. 불면증도요. 잠이 안 오고, 그 시간을 버티기 힘들어, 과하게 일찍 출근하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부장과는 오래 있고 싶지 않아 최대한 빨리 퇴근을 한 것이다. 종합하자면 치히로는 두통과 위염, 현기증, 부정맥에 수시로 시달리며 과도한 업무로 허리통증을 호소하는데다 항상 신경이 예민하고 주위에는 자신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인간들이 즐비한 환경에서 일하는데 불면증 때문에 제대로 된 휴식도 취하지 못한 채로 언제나 웃음을 유지하고 있느라 속이 곪을 대로 곪은 상태였다. 무엇보다 최악인 것은…….

 “멋대로 말하시는군요.”

 치히로가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냈다. 제 뒷조사라도 한 건가요? 나를 노려보는 눈빛이 처음 보는 것임에도 익숙했다. 역시 닮았어.

 “기분 나쁘네요. 보기와 다르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프로듀서님은 저를 그렇게 보고 있으셨군요.”

 “좋게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그렇겠죠. 프로듀서님이 말하는 대로면 저는 이상한 소문이 말하는 그대로의 사람인 거니까.”

 “아뇨. 그거 말고. 센카와 씨가, 부장에게 하려던 짓 말입니다.”

 치히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내가 핸드백에 눈길을 주자 뒤로 숨기려는 모습이 부자연스러웠다. 무게 때문에 그렇겠지. 작은 핸드백 치고 이상하게 무거웠어. 약통과 함께 안에 들은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긍정적인 의도로 쓰일 물건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입 안을 적시고 싶어. 타들어가는 목을 견디며 우선 치히로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통화. 본의 아니게, 엿들어 버렸습니다.”

 예상 이상으로 치히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거의 발작에 가까운 떨림과 거친 숨, 생기 잃은 눈동자. 들키고 싶지 않았던 치부를 들켰을 때의 반응이었다. 그 얼굴이 우울해 하는 강이와 닮아있었다.

 입사 첫날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나는 치히로에게서 강이를 느꼈다. 성실, 프로페셔널, 통찰력, 그리고 내재된 분노를. 강이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게 과도한 기대를 받고 자라왔다. 집안 사업이 망하자 기대는 강압으로 변했고, 강이는 더 이상 자식이 아닌 집안을 일으키고 세상에 복수를 할 존재로 키워졌다.

 아마 치히로는 반대였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간에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 없고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하며 살아왔겠지. 방향은 달랐지만 둘의 목적지는 같았다. 부모를 향한 극도의 증오. 혈연이라서 마지못해 걸치고 있는 마지막 동정, 혹은 나는 저들과 다르다는 증명. 치히로에게 있어 무엇보다 최악인 것은 의지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카페인 부작용으로 신경이 예민해진 상태.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부모에게서 또 돈 요구를 받은 날, 또 하나 증오해 마지않는 부장에게 시달렸다. 그것이 마지막 이성의 끈을 놓고, 가방 안에서 망설이던 물건을 사용하게 만든 것이다.

 치히로는 더 이상 핑계대지 않고 술자리에 참여했다. 경멸스러운 인간들 사이에서 끝까지 자신을 억누르며 기회를 노렸다. 부장이 따라올 것을 알고 침착하게 골목으로 유인한 다음 일부러 도발했지만, 예상치 못한 백야가 끼어들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프로듀서님은.”

 부정할 기운을 상실한 목소리로 치히로가 말했다.

 “제가 아니라…… 부장님을 구한 거네요.”

 “그것이 결과적으로, 센카와 씨를 구하는 일이라, 생각했으니까요.”

 치히로는 강이와 닮았지만 아직 강이처럼 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되지 않게 막아야 했다. 직장 동료를 고어 영화와 내 해괴한 망상 속에서나 나올 법한 미치광이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래야만 했다. 왜냐하면…….

 “감사했어요. 센카와 씨에게.”

 치히로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프로듀서님이 말한 대로 제가 한 행동은 절대 좋은 의도가 아니었어요.”

 “나쁜 의도도, 아니었잖아요.”

 그럼, 상관없습니다. 천천히 힘주어 말했다. 제가 도움을 받은 것은 변함없으니까. 치히로가 나를 멍하니 바라봤다. 다음 말을 기다리는 것인지,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전자일 거라고 결론 내렸다.

 어둠에 익숙한 눈이 어두운 골목 저편에서 망상을 발견했다. 포장마차에 앉아 술을 마시는 강이와 시중드는 내가 있었다. 그답지 않은 슬픈 모습으로 강이가 말했다. 그 또라이 같은 인간이 나한테 어떤 짓을 했냐면…….

 

 이 개 같은 생활이 끝이 안 보여서…… 죽으려고 했거든. 근데 큰형님이 때려 말리더라. 처음 보는 사람을 멋대로 구해놓고,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냐면서. 정작 지가 주먹으로 팬 게 더 아팠는데.

 큰형님다우시네요.

 개또라이지. 근데 말이야. 그 또라이 짓이…… 졸라 고마웠어. 사실은 죽고 싶지 않았다던가, 그딴 게 아니야. 나는 이런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거든. 누구든 간에, 무슨 이유든 간에. 이 망할 놈의 세상에서 나를 구해줄 사람. 큰형님이 처음이었어. 그래서 따르는 거야. 이해할 수 있겠냐?

 네. 이해합니다. 공감합니다. 저도…….

 

 바라왔다. 부모를 잃은 뒤 죽이고 싶은 인간 밑에서, 심연의 끝없는 밑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절히 몸부림치는 열 살의 아이를 도와줄 사람을. 어떤 미치광이라도 상관없었다. 위선이든 위악이든, 아니면 살인자라도 괜찮으니 나를 구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혼자 심연을 빠져나와 스물다섯이 된 지금까지도 아이는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에게 센카와 씨는, 고마운 사람입니다.”

 책상 한 귀퉁이를 차지한 메모. 아침마다 내가 프로듀서의 영역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케 하는 그 메모를 써준 것은…… 치히로니까.

 “그거면 충분합니다.”

 

 *

 

 집까지 바래다주는 동안 치히로는 말이 없었다. 가는 곳마다 기다리고 있는 포장마차에서 강이와 내가 떠들었을 뿐이다.

 우리에겐 우상이 필요해. 우상 말입니까. 그래, 우상, 영웅, 사실 거창한 거 필요 없어, 어려울 때 손 한 번 뻗어줄 수 있으면 그게 우상이야. 그럼 저의 우상은 형님입니다. 짜식, 말 잘하네. 제가 좀 그렇죠.

 지금 이 시간에, 치히로는 자리에 누웠을까, 아니면 낮의 연장선에서 깨어있을까. 끊이지 않는 심장소리가 머릿속을 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말해주는 것 밖에 없었다. 이제 당신을 괴롭히는 존재는, 적어도 회사에는 없을 거라고.

 “오늘 밤은 부디…….”

 편히 주무시기를.

 

 *

 

 출근길에 올랐을 때 여름이 깊어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심각한 괴로움에 빠져들었다. 아침 기온이 또 올랐어. 하루를 이렇게나 우울한 기분으로 시작해야 한다니. 폰을 확인했다가 더 크게 절망했다. 이제 겨우 7시. 그늘은 없고 온 거리에 빛이 넘쳐났다.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차라리 실내가 더 시원한 날씨였다. 눈앞에 가득한 망상들을 애써 무시하며 사무실 문을 열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생각지 못한 밝은 목소리가 맞아주어서 땀에 찌든 정신이 꿈틀거렸다. 치히로였다.

 “평소보다 늦게 오셨네요?”

 “…… 날씨가 더워서요.”

 호흡에 커피향이 섞이지 않았다. 혹시 내 감각이 죽은 건가 싶어 숨을 크게 몰아쉬었지만 카페인 비스무리한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제야 치히로의 얼굴이 나처럼 죽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커피 끊으려고요.”

 “갑자기, 말입니까?”

 “누구한테 엄청 잔소리를 들어서요.”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자 땀방울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이제 그만 좀 하세요. 묘하게 축 쳐진 목소리로 치히로가 내 고개를 들어올렸다.

 “어제 일 말인데요. 아니, 또 고개 숙이지 마시고요. 어제 일, 저도 신경 쓰지 않기로 했어요.”

 “…….”

 “프로듀서님이 말한 대로면 프로듀서님도 저를 그저 도와준 거니까. 최소한 저보다는 순수한 의도였잖아요. 방식은 좀 그랬어도, 따지고 보면 저 때문에 그런 거니까. 그러니까…….”

 갑자기 치히로가 의자에 몸을 기댔다. 눈을 질끈 감고 한참을 괴롭게 있었다. 나는 얼른 차가운 물을 가져왔다. 괜찮으십니까? 심호흡으로 치히로가 천천히 안정을 찾아갔다. 더 말하지 마십시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책상에 몸을 받히고 치히로가 냉수를 넘겼다.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카페인 중독은 금단증상이 강하지 않다던데 당장은 괴롭네요. 현기증도 심해진 것 같고. 오늘은 병원에 가봐야겠어요. 프로듀서님 말대로 다른 문제들도 많으니까.”

 “네. 체계적인 치료가, 무엇보다 중요하죠.”

 “이제부터는 프로듀서님이 저를 좀 도와주세요. 이제 남들처럼 회사 다닐 거거든요. 오늘도 평소보다 늦잠자고 나왔어요. 그런데 정상적인 페이스를 회복하려면 시간이 걸려요. 그때까지만, 부탁드릴게요.”

 거절할 이유가 없어 알겠다고 했다. 잘난 듯 참견 했으면서 무책임하게 도망치고 싶지도 않고, 무엇보다 치히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뻤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막막했다. 이제 점점 더 더워질 텐데. 내가 남을 챙길 여유가 있을까.

 그 순간, 갑자기 사무실 온도가 내려간 것을 느껴졌다. 간신히 눈을 뜬 치히로가 문을 가리켰다. 선물 배달 왔어요. 아나스타샤가 있었다. 나는 슬쩍 치히로를 가렸다.

 “Доброе утро(안녕하세요). 프로듀서. 치히로 씨.”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서프라이즈 하려고요.”

 아나스타샤가 특유의 아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가방에서 상자를 꺼냈다. 파란색 포장지로 쌓인 선물이었다. 이걸 벌써 골랐나. 모른 척, 정말로 깜짝 놀란 척 하며 선물을 받았다. 딴에는 노력한 건데 아나스타샤의 기대치에는 못 미쳤는지 조금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기쁘지 않아요?

 단박에 부정했다.

 “아니야. 정말로, 기뻐. 그냥, 좀 얼떨떨해서 그래.”

 “다행이에요.”

 기뻐하는 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당장 열어보라는 건가. 송구스럽게 포장을 뜯었다. 뭐가 들었을까. 짐작조차 가지 않는 미지에 한가득 기대를 품었다. 어느새 회복한 치히로도 덩달아 시선을 보냈다. 부담스럽군. 상자를 열고 내용물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아나스타샤의 센스에 감탄해 피식, 웃었다. 동시에 아나스타샤도 내 반응에 감탄했다. 프로듀서!

 “지금 улыбка, 웃은 거죠?”

 “그래.”

 “프로듀서가 웃는 거 처음 봐요!”

 “그래.”

 나는 모자를 꺼냈다. 정장과 어울리는 파나마를. 여름의 햇빛을 가려줄 물건이었다. 그것을 아나스타샤가 보는 앞에서 깊게 눌러 쓰고 감상을 물었다. 어때?

 “어울려요.”

 슬쩍 돌아서서 치히로에게도 물었다. 어떤가요?

 “멋져요. 아이돌 하셔도 되겠는데요.”

 “무서운 농담, 하지 마십시오.”

 미소를 지우자 아나스타샤가 아쉬운 한숨을 쉬었다. 미안해, 사과할게.

 “음료수 사올 테니까, 잠깐 기다려줘.”

 에너지 드링크는 사오지 말라는 치히로의 요구가 따라 나왔다. 늘어선 창문을 스칠 때 더 이상 햇빛이 눈을 찌르지 않았다. 이 모자가 모든 더위를 막아주지는 못하겠지만 조금이나마 여름을 가려줄 거야. 날카로운 눈빛도.

 웃지 않는다, 감정 변화가 없다. 이곳에 온 뒤로 자주 듣는 말이었다. 의식적으로 통제했다. 뒤틀린 성격과 날카로운 눈빛 때문에 함부로 감정을 드러내면 오해를 받기 쉬웠으니까. 예전 직장이라면 몰라도 여기서는 위험했다. 하지만 이제 가끔 씩은 괜찮겠지.

 “또 구원을 받았군.”

 나의 ‘우상’에게.

 모자 아래 작은 그늘에 한기가 가득했다.

 빨리 답례를 생각해야겠어. 내 모든 정성을 담아서. 뭐가 좋을까. 별을 좋아하는 아이니까 그에 관련된 것이 좋겠지. 거기에다 아나스타샤의 아름다움과 품격에 걸맞아야 해. 어려운 작업이 되겠군. 그만큼 즐거울 거야. 꼭 물건에만 국한될 필요는 없으려나. 그렇다면…….

 반응을 예상하며 한껏 고민하는 동안 나는 시간을 잊었다. 희미한 미소가 입가를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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