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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인생을 뒤집는 전화

June 17, 2017 (토) 23:39에 작성함.

17923

내 인생에 가장 큰 패착이라면 역시나 '그 아이'를 내버려둔 것이 아닐까.

내가 너무 순진한 것도, 그 아이가 너무 약삭빠른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며 간교해진 것은 나였고, 그 아이는 언제까지나 순수하기만 했다.

그렇기에 내 인생의 실패의 원인이 그 아이더라도 원망하기가 쉽지 않다.

 

서늘한 바람이 끊임없이 불고, 낙엽이 땅바닥에 흘러가 추적추적 소리를 내는 2019년 11월의 가을.

서글픈 날씨와 일맥상통하듯, 참으로 서글픈 심정으로,

새로 사서 빛을 발하는 구두가 무색하게 낙엽만 밟고 있는 나.

검은 색 롱 코트를 걸치고, 입에는 담배 흉내내는 듯 막대 사탕을 문 채,

조금씩 새어나오는 입김을 감상하며 그저 길만 걷고 있다.

 

머릿 속에 드는 생각은 하늘에 대한 원망.

물론 신 같은 것을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 하느님... 어째서...... "

 

15년 동안 성실히 살아왔다.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내 스스로가 자부할 수 있을 만큼.

솔직히 말해 유망주가 아니었지만 그만큼 노력을 쌓아와서 오늘날 여기에 이르렀다.

아이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톱 아이돌'의 지위에.

그렇지만 역시 내 인생은 실패이다.

톱 아이돌이 되는 대신에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 하아.........."

 

이제와서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그녀와 나의 승부는 결착이 났다. 바로 그녀의 승리로.

내가 그녀를 너무 우습게 본 탓이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어떻게 해도 패배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당분간, 당분간 어딘가에 숨어지내고 싶다.

누구와도 만나지 않은 채, 나만의 어둠 속에 박혀서.

마음의 치유를 위한 요양을 떠나고 싶다.

서른 한 살의 나의 마음은 이미 차디 차게 얼어버렸다.

 

혼자서 살기에는 너무 넓어, 어찌보면 휑한 나의 집에 거실에 들어오니,

그 아이의 사진이 눈 앞에 걸려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아이의 얼굴을 볼 때 마다 극심한 분노를 느꼈었다.

그렇기에 그 사진의 여러 부분에 못질이 되어있고, 얼굴 부분은 찢어져 있는 것이다.

 

침구가 잘 정돈된 침실 문을 여니 정숙함의 공기 냄새가 퍼져온다.

내게는 향긋한 빛의 향기보다 그윽한 그늘의 향기가 더 어울릴테니 안성맞춤이다.

무엇이 어찌되었던 결국 나는 어딘가 숨어지내고 싶을 뿐이다.

약 한 달간 외국이라도 갈 참이다.

 

여권을 찾기 위해 화장대를 연 순간......

 

지이이잉

 

....하는 듣기 별로 좋지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인지 한참 생각해보니, 그나마 생각난 것은 휴대폰의 진동소리였다.

주머니에서 황급히 휴대폰을 꺼냈다.

 

" ....어? "

 

조용한 휴대폰.

그리고 문을 연 화장대 서랍 안 쪽에서 빛을 발하는 물체가 있었으니.

 

" ....이건... 내가 예전에 사용하던 휴대폰... "

 

이제는 전화 통화도 안되는 공기계가 진동을 울리며 빛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

 

정말로, 오늘 정말로 기쁜 날이다!

오늘같은 날이 또 있을까!

드디어 꿈이 이루어지려고 하는 순간인 것이다!

 

어릴 적부터 동경해왔던 아이돌!

이제 내가 그 아이돌이 되는 것이다.

드디어 내가 데뷔 싱글을 낸 것이다.

 

이야, 정말 이건 횡재라고 밖에 볼 수 없을 것 같다.

연습생이 된지 4개월도 안 되어서 데뷔를 하게 되다니!

의외로 나에게 아이돌에 대한 재능이 넘치는 거 아닐까?

 

765 프로덕션.

비록 영세하고 비루하지만 그 사무소만큼은 금세 정이 들 만큼 친근하다.

역시 이 사무소에 들어오길 잘한 것 같다.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 뿐이다.

톱 아이돌을 노리며 열심히 살아가자!

무슨 일이 있어도 시련을 극복할 자신 정도는 있다.

15세, 아마미 하루카의 아이돌 전기는 2004년 11월,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근데 이미 데뷔한 애들을 보니까 데뷔 후에는 무지 바쁘게 살던데...

...아니, 아니! 벌써부터 겁먹으면 어쩌자는 거야.

이렇게 약한 여자 아니잖아, 아마미 하루카!

좀 더 독하게! 마음 강하게!

 

삐리리리리

 

" 우와앗! "

 

별로 놀랄 것 없는 전화 소리에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놀라버렸다.

전화? 호, 혹시 사무소에서 온 거 아닐까?

혹시... 곡 녹음 상태가 엉망이니 다시하라는 말 하는 거 아닐까?!

긴장감에 이런저런 걱정을 하며 전화를 받았는데...

 

" .....여보세요? "

 

어둠에 잠긴 듯한 그윽하고 차가운 목소리에 소름이 돋으며 굳어버렸다.

 

" 에...여, 여보세요... "

 

" .......당신, 이 전화에 어떻게 전화를 거신거죠? "

 

에? 무슨 소리 하는거야?

전화를 걸다니 무슨 뜻이지?

방금 내가 전화를 받은 거 아니었나?

전혀 맥락이 맞지 않은 발언에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렇지만 혼란스러운 것은 저 쪽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말투는 거칠지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 당신, 이게 무슨 장난질이야? 뭐하는 건데? "

 

하지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욕먹고 있자니 기분이 나쁘다.

나도 뭐라고 해야지.

 

" 자, 장난이라니! 애초에 전화 건 것은 그 쪽이잖아요! "

 

" 무슨 헛소리야! 나는 진동 소리에 이 전화를 받은 거라고! "

 

" 저도 벨소리가 들려서 전화 받은 거 뿐이거든요?! "

 

아아, 글렀다.

이래서는 대화가 전혀 안된다.

일단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으니 진정하자.

 

" 저, 저기 일단 그 쪽은 누구신가요? 저는 아마미 하루카라고 하는데요... "

 

.......정적이 흐른다.

어? 뭔가 이상한 말 했던가 내가?

이제 막 데뷔한 내 이름을 벌써 알 리는 없고...

왜 아무 반응도 안 하는거지?

 

아아, 그렇구나!

애초에 저 쪽은 누군가에게 장난 전화를 걸 생각인데, 사실 알고보니까 다른 사람 전화였다는...

...아니지, 그거라면 애초에 목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알았을텐데.

그렇지, 목소리.

목소리 하니까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왠지 익숙하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인데.... 흐음...

 

" ...........하하... 하하하!! 장난도 사람 봐가면서 해야지! 네가 아마미 하루카라고?"

 

전화기 너머의 사람이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 왜, 왜요! 제가 아마미 하루카면 안되나요?! "

 

" 당연하지! 이 전화 받고 있는 내가 바로 아마미 하루.... "

 

 

갑자기 전화가 끊겼다.

제멋대로 걸렸다가 제멋대로 끊기다니.

뭐야, 이 현상은?

 

....어라? 잠깐.

방금 저 쪽에서 뭐라고 했었지?

'이 전화 받고 있는 내가 바로 아마미 하루.....?'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한거였지?

 

=====================================================================================

 

" 내가 바로 아마미 하루카니까!! "

 

당당히 선언하듯이 부르짖으니 전화기 너머로의 소리가 조용해졌다.

후후, 이제 정신 좀 차렸겠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참 어이가 없는 놈이다. 사칭하는 당사자에게 장난전화를 걸다니.

 

........아니, 그래도 뭔가 이상하잖아.

애초에 이 휴대폰은 공기계라 전화가 되지 않을텐데?

 

한참동안 매서운 눈으로 나의 예전 휴대폰을 째려보았다.

 

" 뭐, 이러고 있는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

 

불길한 휴대폰을 침대 너머에 던져놓고는 사무용 의자에 앉았다.

한 쪽 팔걸이에 오른팔을 올리고, 그 오른팔로 턱을 괸 채 앉아 생각해본다.

 

공기계는 전화가 불가능하다.

그건 내가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렇지만 그렇다면 방금 그 통화는 무엇인가.

 

" ...이런, 정신적 충격이 너무 큰 탓인가. "

 

애써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가서 환각을 본 것이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해보았지만,

지금 내 상태가 매우 이성적이란 것을 깨달으니 그것도 못해 먹을 지경이다.

어찌되었던 나는 절대 불가능한 통화를 누군가와 하였고, 또 대화까지 나누었다.

그리고 그 대화에서 언급된 이름.

 

아마미 하루카.

 

처음에는 십중팔구 장난전화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장난전화를 재미없게 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면 정말로 그 아이의 이름이 아마미 하루카?

동명이인것인가?

 

아니, 이렇게 걸린 전화가 또 상황 좋게 동명이인에게 걸릴 리가 없다.

그러고보니...

 

" 그 아이의 목소리....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

 

한참을 생각하다 마침에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어, 지금 사용하고 있는 휴대폰을 켜서 노래 한 곡을 틀었다.

내 데뷔곡인 '태양의 젤러시'.

나는 부들거리는 손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노랫 소리가 흘러나온다.

 

" ...........역시. "

 

이 목소리... 이 목소리이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아마미 하루카의 목소리.

삶에 피폐해지고, 거칠어져 더 이상 마음대로 낼 수 없는 이 순수함의 극치.

즉,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 흐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핫!!!!"

 

과거가... 현재와 이어졌다!

 

=====================================================================

 

" 대체 뭐였던 걸까.... "

 

길거리를 걸어가며 한참을 고민해봤지만 답이 나오질 않는다.

그 여성 분이 하려고 했던 말은 대체 뭐였을까.

 

'이 전화를 받고 있는 내가 아마미 하루.... '...

가장 자연스럽게 생각하면,

'이 전화를 받고 있는 내가 아마미 하루카다'가 맞는데...

그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바로 그 아마미 하루카니까 말이다.

 

다시 전화를 걸어보려고 해도 불가능했다.

애초에 통화 내역 자체가 남아있질 않아서 전화번호가 찍혀있지 않던 것이다.

참 희한한 일이다. 휴대폰이 데이터를 마음대로 삭제하다니.

 

" 흐음....... "

 

그렇게 계속 휴대폰을 쳐다보며 걸어가다가...

 

" 우왓! "

 

" 꺄앗! "

 

앞을 보지 못해 누군가와 부딪혔다.

 

" 죄, 죄송합니다! 괜찮으신가요! "

 

" 아, 아픈거야!"

 

넘어진 여자 아이에게 손을 내미려고했지만,

그녀의 화려한 미모에 놀라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버렸다.

 

노란색으로 염색한 것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노란 머리는 그녀의 귀엽고 동그란 얼굴을 적절히 감싸주고 있었고,

반짝이는 눈빛이 스스로를 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듯 하였다.

같은 여자로서 정말 부러울 정도의 미모를 가지고 있는 여자 아이였다.

 

만약 이런 아이가 아이돌이 된다면, 분명 성공할 것이다.

아이돌 3개월 차의 직감으로도 알아챌 수 있었다.

생각이 그렇게 미치자 나는 무의식적으로 무언가를 안주머니에서 꺼내서 그녀에게 주었다.

 

" ...에..... 명함? 에... 타카기 쥰지로? 에... 뭐 여자이름이 이래? "

 

" 아, 아니 내 이름이 아니라 우리 회사 사장님! "

 

" 회사? 어라? 어, 어른인거야? "

 

" 아니 나는 아이돌을 하고 있거든. "

 

" 아이돌? "

 

" 네가 보기에 너는 아이돌 계의 별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한 번 흥미 있으면 우리 사무소에 들러보는 것은 어때? "

 

분명 그녀는 나의 멋있는 존경할만한 동료가 될 수 있을 것이고, 나는 그것을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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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예전에 드라마 시그널에 빠져서 오마주한 팬픽을 썼었는데,

인기가 없어서 지웠지만 소재가 너무 아까워서 다시 써봅니다.

....뭐 이것도 계속 쓸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네요... 원래 저 같은 진지충이 글을 쓰면 재미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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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바르고 고운 말을 사용 합시다.
  • 루드비히 (@tjdwl*****)

    시그널은 잘 모르지만 재밌게 잘봤습니다
    1June 18, 2017 (일) 13:26_72
  • 크로P (@Crew****)

    시그널은 본 적이 없어 모르겠습니다만(조선왕조실톡이라는 웹툰에서 패러디된 걸로 간접으로 접했습니다만), 과거의 하루카와 현재의 하루카가 만나는 게 신선했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2June 21, 2017 (수) 00:23_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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