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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리티P 시리즈] 결말을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것(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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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6-06, 2017 03:54에 작성됨.

<퍼스널리티P 시리즈의 이전 이야기들>

1. 타카가키 카에데 <밤 바다의 이정표>

2. 사기사와 후미카 <First Step>

3. P <인내의 삶> 

4. <신데렐라 걸스> 

5. 센카와 치히로 <함께 걷는 길> 

6. <'어제'가 '오늘'과 함께 할 '내일'에게> 

7-1. <방랑자라고 다 길 잃은 것은 아니다> 

7-2. 호죠 카렌 <히로인과 소녀, 꿈의 무게> 

8. 네가 모르는 이야기, 너만이 아는 이야기

9. (Re)Write─덮어 쓰는, 혹은 다시 쓰는

10. 촛불과 별빛이 가장 밝게 빛날 때

 

<외전격 이야기들>

메모리얼 <사쿠마 마유의 회상>

사기사와 후미카<걷지 않은 길>

사기사와 후미카 <파트너>

 

 


 

무엇이든 구조를 이해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그것들이 너무나도 쉽게 지겨워지기 마련이다.

구조를 알아버린 이상 인과를 예측하는 것은 너무나도 손쉬운 일이고, 인과를 예측해버리면 그것은 삽시간에 몹시 시시한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화학이라는 학문이 그랬고, 인간이 살아가는 인간관계도 그랬다.

 

 

 

그 날도, 나는 대학을 뛰쳐나와 떠돌고 있었다.

늘 ‘실종’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나였지만, 지금 나의 상태는 ‘실종’과는 약간은 거리가 있었다.

실종이라는 것은 목표를 정하지 않고 돌아다니는 것.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무언가 내 흥미를 자극시켜주는 것을, 바닥상태(주: 양자역학에서 정의하는 물질의 상태 가운데 가장 에너지가 낮고 안정한 상태)로 가라앉은 ‘나’라는 집합체를 다시 들뜨게 만들어줄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몇 번인가 그 비슷한 것을 찾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가열하기는 어려운 데 비해 식는 것은 너무나도 쉽게 식어버리는 사람이었다. '이치노세 시키'라는 인간의 성질은 원래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찾아 헤맸다. 역치(주: 반응을 일으키기 위한 최소한의 자극단위)를 넘어, 진정으로 나를 가열시켜줄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서.

 

그렇게 의미없이 시간을 허비하며 방황하던 중, 나는 ‘그 사람’을 만났다. 몇 년만의 재회였을까.

하지만,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형태로 만난 그는 내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모습이 되어 있었다.

프로듀서라고? 나 참, 농담도 정도가 있지.

 

나는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타고 남은 잿더미 속에서 무기력하게 명을 유지하고 있는 잔불이었다. 하지만, 내 눈 앞의 남자는 그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하던 잔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맹렬하게 주위의 산소를 집어삼키며 불타오르는 커다란 횃불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7년이나 지났기 때문일까? 그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나는 어린 시절에 비하면 참 많이 바뀌었으니까. 아니,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가? 뭐, 아무렴 어때.

 

다시 만난 그에게서는 지금까지 내가 맡아본 적이 없는 무척이나 좋은 냄새가 나고 있었다.

가볍다고 해야 할지, 혹은 시원하다고 해야 할지, 화학자로써는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하는 의견이지만, 그가 풍기는 냄새는 분명히 언어로써 정의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냄새였다.

이전과는 전혀 달라진 그의 모습에 나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생겨난 것일까, 흥미가 샘솟았다. 

 

어쩌면…….그와 함께 한다면, 어쩌면 나도 다시 한 번 들뜨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기대가, 호기심과 함게 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조금씩 샘솟기 시작했다.

 

 


<결말을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것(上)>

 

 

 

 

1월의 중순. 미시로 상무가 신설된 아이돌 산업부의 총괄이사로 부임한 지 어느덧 1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상무가 머무르며 업무를 처리하는 제1별관의 집무실에는 그녀를 포함하여 미유와 치히로, 그리고 카에데와 미즈키가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별 다른 절차도 없이 다소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인사개편이었기에, 기존에 있던 사람들과 소통을 하기 위한 상무의 아이디어였다.

 

“미후네라고 했지? 어시스턴트 업무는 할만한가?”

“네……치히로 씨나, 프로듀서 씨께서 많이 도와주셔서, 그다지 어려운 부분은 없어요…….”

“그렇군. 지금까지 전해들은 것으로 보면 업무에 무척 소질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만, 혹시 정규직 전환에는 관심이 없나?”

“그게……죄송합니다. 아직까지는…….”

“아, 아니, 괜찮아. 강요하려는 게 아니니까. 그냥 네 생각을 물어본 것뿐이지.”

 

집무실의 중앙에 설치된 소파의 1인석 자리에 앉아 있던 상무는 고개를 돌려, 미유의 옆에 앉아 있던 치히로에게 시선을 옮겼다.

 

“센카와는 정직원이 된 지 이제 넉 달째라고 들었다만.”

“네.”

“업무는 어떤가? 곤란한 부분이라던지.”

“곤란하달까……그런 것보다는, 제 바로 위에 계신 분이 워낙에 대단한 사람이라서요……매번 따라가기에도 벅차네요.”

“그런가. 하긴, 그렇겠군.”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치히로의 말에 상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발표가 난 이후 한동안 회사 내부에서는 부당한 인사이동이 아니냐며 불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 당사자였던 프로듀서가 먼저 상무에게 굽히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부서장 회의를 통해 아이돌 부서의 개편을 요구한 것이 프로듀서임이 밝혀지자 불만의 목소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사그라졌다. 단순히 프로듀서의 희망이었다는 부분을 제외하더라도, 장본인인 미시로 상무가 북미 지부에서 뛰어난 수완을 보여 스카우트의 형태로 들어온 고급 인력이었다는 점 역시 불만의 목소리를 불식시키는 데 한몫을 하고 있었다.

 

“프로듀서의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는 말이다만.”

 

그녀는 자신의 앞에 놓인 머그잔을 집어 들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고작 1주밖에 안 지났지만, 내가 이 자리를 괜히 맡는다고 한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

“아하하…….”

 

그렇게 말하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상무의 말에 그녀의 책상을 바라본 네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란히 쓴웃음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책상 위에는 <결재 대기>라는 누름판이 가장 위에 놓여 있는 어마어마한 서류의 산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네 사람의 눈에 비친 그 모습은 그녀가 총괄이사가 되기 전 프로듀서의 책상과도 비슷한 모습이었다. 물론 그의 책상에는 지금 이 시간에도 그녀와 경쟁이라도 하려는 듯 서류들이 계속해서 그 높이를 높여가고 있었다.

 

“이거 참, 소문으로는 익히 들었다만, 실제로 겪어 보니 한숨밖에 안 나오는군.”

 

한숨 섞인 목소리로 푸념하듯 말하고는 있었지만, 네 사람의 눈에 비치는 상무의 모습은 어쩐지 즐거워 보이는 듯한 모습처럼 보였다.

 

“자, 그럼……또 할 말 있는 사람?”

 

상무가 네 사람을 돌아보던 그 때, 지금까지 잠자코 앉아 있던 카에데가 손을 들었다.

 

“그래, 타카가키. 말해 봐.”

“말씀……이라기보다는 질문입니다만. 혹시, 상무님께서는 야구를 좋아하시나요?”

 

뜻밖의 질문이었던 것인지 잠시동안 그녀를 바라보던 상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대학 시절부터 미국에 있었으니까, 지금도 메이저리그는 자주 보고 있다.”

“혹시 응원하시던 팀도 있으신가요?”

“뉴욕 메트로라는 팀을 응원하고 있지. 타카가키, 너도 메이저리그에 관심이 있었나?”

 

“아뇨.” 고개를 가로저은 카에데는 손가락을 들어, 집무실의 책장 위에 놓여 있는 자그마한 피규어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것은 파란 줄무늬가 들어간 유니폼을 입은, 약간 독특한 디자인의 글러브를 낀 투수가 마운드 위에 서서 힘차게 공을 던지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처음 보는 물건이 있어서요..” 

 

카에데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 상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저거 말이지? 별 거 아니다. 내가 무척 좋아하던 선수였거든. 대학생 시절엔 저 사람의 사인을 받으려고 강의까지 종종 빼먹곤 했었지. 너무 유명한 사람이라 매번 허탕만 쳤지만.“

“그랬군요.”

 

잠시 이야기를 멈춘 상무와 카에데가 서로 시선을 주고받던 그 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상무의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벨소리를 울리기 시작했다. 휴대전화의 액정화면에는 <14:00 임원회의>라는 문구가 떠올라 있었다. 그것을 본 상무는 커피가 반 정도 남아 있는 머그잔을 다시 내려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나는 먼저 올라가볼 테니 너희는 뒷정리 알아서 하고 곧장 업무로 복귀하도록.”

“네, 감사합니다.”

 

상무가 나가고 난 뒤, 네 사람이 남은 집무실에는 조용히 차를 홀짝이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러고보면, P군은 뭐 한대?”

“좀 전에 자료실에서 제작팀 회의 마치고 바로 연습실 내려가셨어요.”

“아, 맞아. 오늘 합동연습이었지?”

“네, 10분 뒤부터 시작이랍니다.”

“……뭐?”

“……네?”

 

치히로의 말에 가만히 찻잔을 홀짝이던 미즈키와 카에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치히로를 바라본 미즈키는 곧바로 자신의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들었다.

 

“원래 2시 반 시작 아니었어? 자, 여기에도 그렇게 적혀 있잖아!”

“원래는 그랬는데, 갑자기 일정이 바뀌었거든요. 어제 저녁에 프로듀서 씨께서 메일 돌리지 않았던가요?”

“어, 어? 아, 잠깐만, 어제 한잔 하고 뻗어서 메일 확인을 못 했는데…….”

“제가 확인해볼게요.”

 

당황하는 미즈키의 옆에서 카에데는 재빨리 외투 주머니에서 자신의 휴대전화를 꺼내 메일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휴대전화를 바라보던 두 사람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지, 진짜네……어쩌지, 안 그래도 오늘은 중간평가 하는 날인데…….”

“……서두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워밍업은……달리기로 대신해보죠.”

“……그, 그렇겠지? 서두르면 되겠지?”

 

서로를 마주보던 두 사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미유와 치히로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뒷정리는 부탁드릴게요.”

”미안, 우리 먼저 가 볼게!”

“조심해서 가세요? 계단 조심하시고요!”

“수, 수고하세요…….”

 

순식간에 집무실 안에는 미유와 치히로만이 남게 되었다. 멀어져가는 두 사람의 발소리에 쓴웃음을 짓던 치히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미유를 바라보았다.

 

“정말, 매번 이러신다니까……그럼, 저희도 정리할까요?”

“네…….”

 

 

 

****

 

 

 

집무실의 뒷정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미유와 치히로는 사무실 가운데에 놓여 있는 커다란 책상에 앉아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편지를 살펴보고 있었다.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는 것은 아니고, 편지 이외에 뭔가 다른 것이 들어있는 것은 아닌지를 판별하는 작업이었다.

 

“미유 씨, 이거 좀 봐요.”

“네? 어머……손그림이네요……? 마유이려나……?”

“그런 것 같아요.”

“귀엽네요. 손으로 그린 편지라니…….”

 

책상 위에 쌓여 있는 편지들은 색깔도, 모양도, 무늬도 제각각인 봉투에 들어 있었다. 각양각색의 편지봉투들의 겉면에는 보낸 사람의 주소와 이름 대신, 알아보기 쉬운 커다란 글씨로 CG프로덕션의 주소와, 봉투의 무늬만큼이나 각양각색의 글씨로 ‘시부야 린 씨에게’, ‘카에데 씨에게’, ‘마유 양에게’등등 단어들이 적혀 있었다. 봉투에 적혀 있는 이름은 모두 아이돌들의 이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 앞에 쌓여있는 그것들은 다름아닌 이번 주에 새로 들어온 팬레터였던 것이다.

 

“어쩐지……뿌듯하네요.”

“네……?”

 

각자의 이름이 적혀 있는 자그마한 바구니로 편지를 나누던 치히로가 작게 중얼거리자 마찬가지로 편지를 확인하던 미유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치히로는 작게 웃으면서 다음 편지로 손을 뻗었다.

 

“후훗, 별 다른 건 아니고요. 지금은 예전만큼 활동도 안 하는데……팬 분들이 매번 이렇게 응원해주시는 게 어쩐지 뿌듯하다고 할까……그래요.”

“그렇군요…….”

 

3월에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아이돌 부서의 새 얼굴, 신데렐라 걸즈의 데뷔를 준비하면서 어느덧 ‘선배’가 되어버린 일곱 명의 아이돌들은 겉으로는 개점휴업을 걸고 있었지만, 예능이나 드라마 같은 방송에는 이따금씩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프로로써 들어온 일은 걷어차지 않는다’는 프로듀서의 영업방침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그들 스스로가 팬들에게 건강한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면서 스스로 나선 것이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두 사람의 눈 앞에 놓여 있는 커다란 편지들의 산이었다. 한창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여전히 수많은 팬들이 그들을 잊지 않고 기억해주고 있으며, 그들을 응원하고 있다는 무언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면……아이돌 분들도 팬레터를 받을 때는 무척이나 기뻐하셨었죠…….”

“그럼요. 미즈키 씨는 데뷔하고 처음으로 팬레터 받은 날 술김에 펑펑 울었다니까요?”

 

그 때, 똑똑, 하는 노크소리와 함께 사무실의 문이 덜컥 열렸다.

 

“잠시 실례하지.”

 

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미시로 상무였다. 사무실로 들어오던 그녀는 두 사람의 앞에 놓여 있던 팬레터를 뒤늦게 발견하고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혹시 바쁠 때인가?”

“아뇨, 괜찮습니다. 이건 이번 주 중으로만 끝내면 되는 거라서요.”

 

“그렇군” 치히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비어 있는 프로듀서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프로듀서에게 용건이 있어서 왔다만, 아직도 안 올라왔나?”

“네, 아직 지하에 있는데요……호출할까요?”

“아니, 괜찮다. 내가 직접 내려가지. 누가 나를 찾거든 지하로 내려갔다고 전해줘.”

“네, 알겠습니다.”

 

치히로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상무는 다시 사무실을 나섰다. 조용히 닫히는 사무실의 문을 바라보던 미유는 사무실 한 켠에 서 있는 장식장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 새로 구입한 것으로, ‘Cinderella Girls’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장식장 안에는 형광등 불빛을 반사시키며 반짝이는 액자와 트로피가 들어 있었다. 그 장식장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미유는 다시 시선을 돌려 편지더미를 향해 손을 뻗었다.

 

 

 

****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에 도착한 상무는 복도 한 가운데 세워진 ‘연습 중’이라는 팻말을 바라보았다. 팻말에 붙어 있는 일정표에는 분명 댄스 레슨이라는 일정이 적혀 있었지만, 쿵쾅거리는 음악소리나 리듬을 잡는 트레이너들의 구령소리가 전혀 들려오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레슨 중 치곤 조용하군.”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지하의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녀는 복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제1연습실로 향했다. 불이 꺼져 있는 다른 연습실과 달리 제1 연습실에서는 환한 불빛이 새어 오고 있었다. 연습실의 문에 나 있는 작은 창문을 통해 연습실 내부를 살펴보던 그녀의 눈에 비치는 것은, 그녀로써는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연습생 아이들은 한 쪽에 모여 앉아 있었고, 선배 아이돌들은 그 앞에서 마치 스테이지의 리허설을 하듯 위치에 맞게 서서 댄스를 추고 있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라면 그들은 모두 눈에는 안대를 쓰고, 귀에는 무선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저건 뭐 하는 거지……?’

 

잠시 후, 노래가 끝난 모양인지 아이돌들의 동작이 멈추었다. 짝짝짝, 비오듯 땀을 흘리면서 안대를 벗고 이어폰을 빼는 아이돌들을 향한 연습생들의 박수소리가 문 틈으로 새어 나왔다. 아이돌들이 옆으로 물러나서 휴식을 취하는 사이, 프로듀서는 연습생들에게 무언가 몸짓을 섞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연습생들이 무척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면 분명 그들에게 무언가 도움이 되는 말일 것이다.

그나저나 조금 전의 그건 대체 뭐 하는 거였을까?

마음 같아서는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가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마스터 트레이너나 베테랑 트레이너와 더불어 프로듀서 본인이 직접 개입하는 것을 보면 무척이나 중요한 트레이닝일 터. 그들의 일을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기에 그녀는 발걸음을 돌렸다.

지금 당장이 아니더라도, 물어볼 기회라면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앗, 상무님! 안녕하세요?”

 

그 때, 트레이닝 파트의 사무실을 나오던 한 소녀가 그녀를 바라보더니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녀의 품 속에는 두툼한 파일이 들어 있었다.

 

“응? 아아, 루키 트레이너……아오키 케이인가.”

“네!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전히 기운이 넘치는군. 손에 들고 있는 건 뭐지?”

“아, 이거는 프로듀서 씨께서 정리해둔 연습생들 자료에요.”

 

그러고 보면, 일전에 마스터 트레이너에게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무척이나 자세하게 정리해 둔 스카우트 리포트가 있었다고 하던가.

 

“나도 한 번 봐도 되겠나?”

“물론이죠! 그렇지 않아도 상무님께는 프로듀서 씨가 한번 정리해서 보여드려야겠다고 말씀하셨거든요.”

“그런가……본의가 아니게 선수를 쳤군.”

 

상무는 루키 트레이너에게서 파일을 받아 그 내용을 살펴보았다. 아직 정리가 덜 된 탓에 자료 자체의 가독성은 떨어지지만, 그 안에는 연습생들의 간단한 프로필부터 시작해서 개개인의 특이사항, 면담 내용 등등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수시로 수정이 들어간 모양인지, 리포트 여기저기에는 빨간 펜으로 그어진 수정선과 포스트잇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이거……생각보다 제법이군. 마스터 트레이너한테 이야기는 들었다만, 내 상상 이상이야.”

“그렇죠? 프로듀서 씨가 연습생 분들한테 얼마나 신경을 쓰시는데요!”

 

상무는 마치 자신의 일처럼 가슴을 펴면서 말하는 루키 트레이너를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

 

“잘 봤다. 좋은 자료로군. 내게도, 그녀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겠어.”

“아, 프로듀서 씨도 안에 있는데, 필요하시면 부를까요?”

“아니, 괜찮다. 프로듀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내가 여기 왔다는 건 말하지 말도록.”

“네, 그럼 저는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해.”

 

그녀에게서 파일을 돌려받은 루키 트레이너는 그녀를 향해 꾸벅, 허리를 숙인 뒤 종종걸음으로 연습실로 향했다. 그녀가 연습실로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던 상무 또한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덜커덕, 하는 묵직한 충격에 눈을 떴다.

기내를 가득 메우는 강렬한 소음과 진동이 흐물흐물 늘어져있던 의식을 좀 더 확실하게 두들겨 깨웠다. 굼실굼실 몸을 움직여 자세를 바꾸자, 좁아터진 좌석에 웅크려 잠을 잔 덕분에 어깨에서 시작된 근육통이 목을 타고 머리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심호흡을 할 겸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옆 자리에 앉은 아주머니의 땀냄새, 뒷좌석에 앉은 아저씨의 발냄새, 앞좌석에 앉은 아이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곰삭은 냄새가 일제히 내 후각세포를 공격했다.

 

“흐에……콜록, 콜록, 콜록!”

 

그래, 이렇게 좁은 곳에 열 시간 가까이 옹기종기 모여 있으면 당연히 이렇게 되겠지. 터져 나오는 기침에 찔끔 흘러나온 눈물을 소매로 닦아내고, 코를 움켜잡은 나는 천천히, 코가 놀라지 않도록 조심해서 심호흡을 했다. 그러던 새 진동과 소음은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고, 쏜살같이 휙휙 넘어가던 활주로의 지시등 역시 조금씩 그 템포를 늦추기 시작했다.

 

-손님 여러분, 나리타 공항에 도착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비행기가 완전히 멈춘 후, 시트벨트 사인이 꺼질 때까지…….

 

실 상단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잔뜩 피곤에 절어 있는 기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격렬하게 활주로 위를 질주하던 비행기의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눈에 띄게 잦아드는 진동과 소음과는 정 반대로, 객실에 앉아 있는 승객들이 술렁거리는 소리가 점점 그 크기를 키워가기 시작했다.

나는 비행기의 조막만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LA에 비하면 무척이나 높은 스카이라인이 눈에 띄었다.

 

‘일본이라……내 발로 스스로 돌아올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시트벨트 사인이 꺼지고, 여기저기서 벌떡 일어난 사람들이 자신들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주위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나는 담요 대용으로 쓰던 두툼한 코트의 주머니로 손을 집어넣었다. 손 끝에 무언가가 걸리는 느낌이 났다. 그것은, 다소 억센 종이로 만들어진, 납작한 직사각형 모양의 종이 조각, 명함이라고 하는 물건이었다.

나는 손 끝으로 그것을 잡아 주머니 밖으로 끄집어냈다. 비행기의 실내등을 받아 반짝거리는 글자가 무척 인상적인 명함이었다.

 

Cinderella Girls

 

자, 약속대로 나는 너를 찾아왔어. 너는 내게 어떤 대답을 들려줄까?

무척 기대되는걸.

 

 

 


 

 

 

 

다음 날 아침. 프로듀서는 직원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상무와 집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집무실 한 켠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프로듀서를 앞에 둔 채 테이블 위에 쌓아놓은 서류를 하나하나 살펴보던 상무는 고개를 들어 프로듀서를 바라보았다.

 

“예정대로면 3월의 데뷔인원은 14명인가?”

“네, 따로 분류해둔 두 명은 아직 체력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되어서요. 4월쯤으로 조금 늦춰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군……그런데, 그 두 명이랑 동시기에 들어온 닛타는 3월 순번에 들어가 있군?”

“네, 닛타는 체력적으로는 이미 아득하게 합격점을 넘어섰습니다. 취미가 라크로스라더니 명불허전이었어요. 시마무라를 제외하면 테크닉은 다들 비슷한 수준이니까, 중요한 건 체력이죠.”

“그렇군……잠깐만.”

 

서류를 살펴보던 상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낯익은 이름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의 이름이 왜 여기에 적혀 있지? 전업 계획이라도 있나?”

“네. 처음부터 그걸 조건으로 온 사람이었습니다. 아직까지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시기에 가만히 있었을 뿐입니다. 늦어도 이번 달 안으로 대답을 받기로 했으니까요.”

“그렇군……네가 이끌었던 타카가키나 카와시마의 경우도 있어서 큰 걱정은 안 된다만, 그래도 그녀의 성격을 따져보면 분명 힘든 일일텐데.”

“그렇겠죠. 원체 조용하신 분이고, 사람들에게 당한 것도 있는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오히려 그렇기에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무조건 팔립니다.”

“그건 프로듀서로써의 의견인가, 아니면 남자로써의 의견인가?”

“……반반으로 해 두죠.”

 

난처한 듯 웃으며 대답하는 프로듀서를 바라보던 상무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거, 실례되는 질문을 한 모양이군. 어디, 다음은 이 쪽인가.”

 

들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 한 켠에 내려놓고, 상무는 곧바로 테이블의 반대편 끝자락에 놓여 있는 마지막 서류를 집어 들었다. 신데렐라 걸즈의 첫 번째 프로모션 비디오 촬영에 관한 기획 보고서였다.

 

“3월에 공개할 신곡이나 의상에 대해선 이미 이사님께 샘플이 전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럭저럭 나쁘지 않더군. 가능하면 빨리 완성본을 듣고 싶었어. 노래를 제외한 나머지는 어떻지? 보아하니 안무도 다 맞춰가는 모양새던데.”

“네, 남은 건 장소 뿐이죠.”

“표정을 보아하니 그것도 이미 생각해 둔 게 있나보군.”

 

보고서를 넘겨보던 상무는 고개를 들어 프로듀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받아넘기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장소에 관해서는 몇 군데 생각해둔 곳이 있습니다. 예산만 어떻게 된다면 해외 쪽도 괜찮다고 봅니다만.”

“해외라……그러고 보니, 해외 진출은 생각 없나? 네 연줄 정도면 충분히 가능할텐데.”

“아직 국내도 제패하지 않았는데 해외라뇨. 너무 멀리 나갔습니다.”

“그렇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피식 웃으면서 상무는 손에 들고 있던 보고서를 가볍게 톡, 하고 두드렸다.

 

“예산이 문제라는 거지. 그래, 그럼 이 쪽은 내가 알아서 해 보지.”

“과연, 믿음직스럽네요.”

“어찌되었든 이렇게 뛰어든 이상 나도 내 입지를 스스로 다져야 한다. 거기다 아랫사람한테 못난 모습을 보여줄 순 없지. 이렇게 되었으니, 너도 내 실적을 위해 개처럼 뛰어 줘야겠어.”

“여부가 있겠습니까.”

“자, 그럼 오늘은 이 정도면 끝인가? 더 할 말 있나?”

“아뇨, 없습니다.”

 

상무는 마지막으로 들고 있던 보고서를 테이블의 한 켠으로 옮겨두었다. 프로듀서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에 담긴 차를 쭉 들이키고, 그는 테이블 위에 여기저기 산개한 서류들을 하나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상무의 머릿속에, 어제 연습실에서 봤던 광경이 떠올랐다.

 

“아아, 맞아. 한 가지 개인적으로 물어볼 게 있는데.”

“말씀하세요.”

“그래. 어제 오후에 조금 독특한 트레이닝을 하던 것 같던데 말이다. 안대를 씌우고 하던……”

“아아, 그거라면 격주에 한번 꼴로 하는 트레이닝입니다.”

“트레이닝? 무슨 효과를 노리고 하는 거지? 얼핏 보기만 해서는 좀처럼 짐작이 안 가더군.”

”별 거 아닙니다. 무대에 대한 적응력 훈련이라고나 할까요?”

“적응력 훈련?”

“네.”

 

자료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프로듀서는 고개를 들어 상무를 바라보았다.

 

“무대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이 스테이지 위에 올라가면 가장 먼저 느끼는 게 있어요. 텅 빈 공간에 나 혼자 서 있다는 부유감이죠. 이 감각은 사람의 감정을 고양시키는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만, 대개는 안 좋은 효과를 먼저 일으킵니다.”

“안 좋은 효과라……구체적으로 말하면?”

“흔히들 눈 앞이 캄캄해진다고 표현하는 그겁니다. 강렬한 조명, 관중들의 환호성, 눈부신 스포트라이트……정말 특수한 일이 아닌 이상, 무대 위에서는 아무것도 눈에 안 보이거든요. 그런 걸 한번 겪어보면 누구라도 당황하기 마련입니다. 막다른 곳에 몰린다고도 하더군요.”

“그렇다면, 안대와 이어폰은 그 상황을 조성하기 위한 소품인가?”

 

“그렇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력이 한계에 몰리게 되면, 멘탈은 피지컬을 잠식합니다. 그렇게 막다른 길에 몰렸을 때 몸을 이끄는 것은 반복된 연습으로 체득한 것들이죠. 비록 유사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런 식으로 체득한 경험은 분명히 큰 도움이 될 거에요.”

“그렇군. 굉장히 구체적인 대답인데, 혹시 네 경험담인가?”

“아니라고는 못하겠군요. 2003년의 데뷔전, 기억하십니까?”

“물론, 어떻게 잊겠나. 메트로의 팬이라면 평생 잊지 못할 걸.”

 

상무의 질문에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 때, 제가 제 실력을 내지 못한 건 난생 처음 가 보는 빅리그의 무게에 짓눌렸기 때문입니다. 설렘과 짜릿함, 그리고 두려움이 뒤섞인 그 감정은, 그 때의 저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어요.”

“그렇겠지. 그 때의 너는 고작해야 18살이었으니.”

“단순히 어렸다는 것으로는 변명이 될 수 없습니다. 그저 준비가 부족했던 것이죠……마이너로 내려가고 나서도 저는 오랫동안 그 두려움을 잊지 못했습니다. 가장 자신 있었던 무대에서 최악의 결과가 나왔으니까요.”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트레이닝은 그렇게 방황하던 경험에서 나온 방법입니다. 어차피 겪어야 할 리스크라면, 그 충격을 가능한 한 완화시켜 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방법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옛 두려움을 되새기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닐텐데, 내 생각보다 진지하게 그들을 대하는군.”

“네, 지금은 그들을 이끄는 것이 제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이 업계에 발을 디딘 이래로 저는 단 한 순간도 이 일을 가벼이 여긴 적이 없습니다.”

 

그 때, 프로듀서의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에서 땡, 땡,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프로듀서는 황급히 시계로 손을 가져갔다.

 

“죄송합니다. 알람을 꺼놓는다는 게…….”

“아니, 괜찮아. 다음에 일정이 있나?”

“네, S방송국에서 타카가키 카에데와 카와시마 미즈키의 토크쇼가 있습니다.”

”이거 쓸데없이 시간을 뺏었군. 얼른 가 봐.”

“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프로듀서는 상무에게 깊게 허리를 숙이고 집무실을 나갔다. 조심스레 문이 닫히고,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상무는 등받이에 몸을 깊게 묻었다.

 

“정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부을 생각인가. 추억, 그게 대체 무엇이기에…….”

 

 

 

 


 

 

 

상무와 이야기를 마치고 가능한 서둘러 방송국으로 출발했지만, 프로듀서가 방송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촬영이 진행되고 있었다.

 

“미후네 씨!”

“아, 프로듀서 씨…….”

 

스태프들이 모여있는 장소에서 약간 떨어진 장소에서, 우두커니 서서 촬영장을 바라보던 미유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반색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죄송합니다. 이사님과 이야기가 길어져서……촬영은 잘 되고 있습니까?”

“이제 10분 정도 지났어요……두 분 모두 대본은 확실하게 체크하셨고요…….”

 

미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프로듀서는 촬영용 라이트가 밝게 빛나는 촬영장을 바라보았다. 촬영장을 바라보기가 무섭게 프로듀서는 눈살을 찌푸리며 곧바로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눈을 찌푸리던 그는 안경을 벗고 왼쪽 눈을 손으로 덮으며 머리를 좌우로 붕붕 흔들었다.

 

“프로듀서 씨……?”

“아, 잠시 현기증이 좀 나서……죄송합니다.”

 

잠시 후, 눈이 어느 정도 어둠에 익숙해지자 몇 번인가 눈을 깜박거린 그는 다시 안경을 쓰고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괜찮으세요……?”

“네. 아무래도 비타민 부족인가봅니다. 갑자기 밝은 걸 보면 가끔 이러더군요.”

 

그 때, 슬레이트를 때리는 소리와 함께 촬영 담당자의 우렁찬 구령소리가 들려왔다.

 

“컷! 잠시 필름 점검하고 가겠습니다!”

 

카메라의 빨간 램프가 꺼지고, 곧바로 세트장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매니저들이 우르르 올라가 출연자들의 메이크업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들과 약간 떨어진 곳에 서 있던 프로듀서는 미유와 함께 메이크업을 점검받는 카에데와 미즈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는 그다지 손 댈 곳이 없었던 모양인지 그들을 담당하는 매니저는 다른 출연자들에 비하면 무척이나 일찍 세트장 밖으로 나왔다. 그들과 교대하듯이 프로듀서와 미유는 세트장 위로 올라가 두 사람을 향해 다가갔다.

 

“아, 프로듀서. 오셨군요?”

“죄송합니다. 좀 더 일찍 왔어야 하는데 상무님과 이야기가 길어져서요. 어디 문제는 없습니까?”

“그럭저럭 괜찮아요. 카메라는 오랜만이라서 조금 떨리긴 하지만요.”

“녹화방송은 거의 석 달만이죠? 카와시마 씨는 어때요?”

“나도 문제 없음! 그보다도, 오늘 저녁에 한 잔 어때?”

“그 소리 언제 하실까 했습니다. 하는 거 봐서 생각해 볼게요.”

 

프로듀서는 촬영장 주위를 둘러보았다. 토크쇼의 테마는 새해 연휴. 성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방송인만큼 술이나 잔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을 수 밖에. 그 때, 목에 'STAFF'라고 적힌 명찰을 걸고 있는 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이번 토크쇼의 각본을 담당하고 있는 담당자였다.

 

“P씨? 대본 때문에 할 이야기가 있는데, 잠깐 시간 좀 될까?”

“네, 얼마든지요. 자리를 옮길까요?”

“아, 그럴 필욘 없어. 그냥 몇 가지 확인만 해 주면 되니까.”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들고 있던 서류를 프로듀서에게 내밀었다. 종이를 받아 들고 그것을 살펴보면, 거기에 적혀 있는 내용은 후반부에 나오는, 카에데와 미즈키에게 돌아갈 분량의 질문이었다.

 

“여기에 나와 있는 것들을 물어보려고 하거든. 사전에 그쪽이랑 합의는 됐는데, 아무래도 담당자한테 직접 확인 받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어서.”

 

가만히 서류를 살펴보던 프로듀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이 정도라면……별 문제 없겠네요. 그냥 진행하셔도 됩니다.”

“그래? 그럼 예정대로 진행할게.”

“네, 수고하십시오.”

 

발걸음을 옮겨 진행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담당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프로듀서는 자신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자, 미즈키와 카에데가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야? 저기에 뭐 있어?”

“별 건 아니고요, 저번에 제가 인터뷰 관련해서 말씀드렸던 내용 기억나시죠? PV라던가 활동계획이라던가…….”

 

프로듀서의 말에 두 사람은 나란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내용입니다. 아마 촬영 재개하면 곧바로 질문이 돌아올건데, 제가 말씀드린 범위 내에서 적당히 필터해서 말씀하시면 될 거에요.”

 

그 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 촬영장 위로 스태프 한 사람이 뛰어 올라왔다.

 

“30초 후 촬영 재개합니다! 모두 준비해주세요!”

“……자, 이제 절반 왔습니다. 후반부도 열심히 해주세요.”

“네, 고마워요.”

“아자! 뒷풀이를 위해! 화이팅!”

 

카에데와 한 번, 그리고 미즈키와 한 번. 가볍게 주먹을 맞부딪히고 프로듀서는 미유와 함께 잰걸음으로 촬영장을 벗어났다. 두 사람이 촬영장을 벗어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슬레이트를 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카메라의 빨간 불이 들어왔다. 스태프들이 서 있는 자리에 설치된, 촬영화면을 보여주는 작은 스크린에는 진행 역을 맡은 유명한 연예인의 모습이 들어오고 있었다.

 

 

 


 

 

 

한편, 프로듀서가 방송국으로 출발한 지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 

CG프로덕션의 본관으로 들어가는 정문 앞에 택시 한 대가 멈춰 섰다.

택시의 뒷좌석이 열리고, 그곳에서 한 소녀가 모습을 나타냈다. 웨이브가 들어간 다갈색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자신의 머리색과 거의 비슷한 톤의 코트를 걸친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헤에, 여기구나. 꽤나 대기업이라고 들었는데……상상 이상인걸?”

 

택시에서 내린 그녀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앞을 가로막듯 서 있는 커다란 빌딩을 올려다본 뒤,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명함이었다.

 

“자아, 그럼 어디, 한번 만나러 가 보실까요~?”

 

혀 끝으로 입술을 살짝 핥으며 명함을 다시 주머니 속으로 집어 넣은 그녀는 ‘입구’라고 적힌 팻말이 걸려 있는 쪽으로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정문으로 막 들어가려던 찰나, 그녀의 두 배 정도 되어 보이는 커다란 검은 양복 차림의 남자가 그녀의 앞을 막아 섰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아……그게, 사람을 좀 만나러 왔는데~?”

“사람이요?”

“응,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들었거든.”

 

고개를 갸웃거리는 남자를 올려다보며, 그녀는 한 손에 쥐고 있던 명함을 그를 향해 불쑥 내밀었다.

 

“P라고 하는 사람인데, 혹시 알고 있어?”

 

 

 


 

 

 

 

-자, 그럼 이번에는 우리 미녀 게스트 두 분께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카에데 씨, 요즘 활동이 뜸하신데, 새로운 활동을 준비중이시라구요?

-네. '신데렐라 걸스'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활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기 있는 미즈키 언니와 다른 동료들도 함께요.

-그렇군요. 듣기로는 새로운 신인들도 대거 영입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만?

-맞아요. 새로운 아이들이 정말 많이 찾아왔어요. 하나하나가 무척 개성이 강한 아이들이라서요.

-개성이 강하다니, 카에데 씨나 미즈키 씨보다도 더합니까?

-하하하하!

 

후반부 촬영이 시작되고, 프로듀서와 미유는 스태프들과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촬영장의 모습을 비추는 작은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프로듀서 씨……?”

 

그 때, 잠자코 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프로듀서의 옆에 서 있던 미유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그것은 두 사람 사이에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지만, 프로듀서에게는 확실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프로듀서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그 곳에는, 촬영장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미유가 있었다.

 

“프로듀서 씨께서는 말씀하셨죠……제겐 아직 제가 해 보지 않은 일이 많이 남아 있다고……아직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요…….”

”그랬었죠.”

“저기……혹시, 저도……정말로 할 수, 아니, 될 수 있을까요……?”

 

프로듀서는 물끄러미 미유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눈치챈 그녀는 곧바로 손을 내저었다.

 

“죄, 죄송해요……제가 괜한 질문을…….”

“미후네 씨.”

 

고개를 내저으며 황급히 이야기를 수습하려던 미유의 말허리를 끊고, 프로듀서는 약간 자세를 낮추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처음의 한 걸음이 중요한 법입니다. 확실하게 말해주세요. 저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 당신께서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미유는 주뼛거리면서 프로듀서의 눈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렌즈 너머로 반짝이는, 의지에 가득 찬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눈에 비쳤다.

꿀꺽, 침을 삼키고, 그녀는 두 손을 꼬옥 움켜쥐었다.

 

“변하고 싶어……무섭지만, 망설여지지만……두 번 다시 후회는 하고 싶지 않아요……이런 저라도, 정말로 될 수 있을까요……?” 

 

그는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당신께서 하고자 하는 마음만 먹으신다면, 그 다음은 제가 책임지고 이끌어 드리겠습니다. 저는 프로듀서니까요……아, 잠시만요.”

 

그 때, 프로듀서의 휴대전화가 윙윙거리는 진동을 내기 시작했다. 품 속에서 업무용 휴대전화를 꺼낸 프로듀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니 무슨 전화가 하필이면 이럴 때……정말 죄송합니다.”

“아, 아뇨, 괜찮아요……제가 원하는 대답은 이미 들었으니까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뇨, 제가 감사해야죠. 힘든 결정을 내려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그럼,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그가 전화를 받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미유는 카메라를 통해 모니터로 보이는 미즈키와 카에데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시간 정도가 소요된 촬영을 마치고, 승용차로 카에데와 미즈키를 집으로 데려다 준 프로듀서가 다시 회사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오후 다섯 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먼저 올라가세요. 상무님께는 허락을 받아 놨으니까 시간 되면 먼저 퇴근하셔도 됩니다.”

“프로듀서 씨는요……?”

“저는 저를 찾아온 손님이 계시다고 해서요. 아마 위에 센카와 씨도 계실텐데, 센카와 씨에게도 그렇게 전해 주세요.”

“네, 오늘 하루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이따 저녁에 다시 뵙죠. 뒷풀이 장소는 매번 가던 그 선술집으로 오시면 됩니다. 위치 기억하시죠?”

“네…….”

 

별관의 입구를 통해 미유를 먼저 사무실로 올려 보내고, 자동차를 주차장에 갖다 놓은 프로듀서는 곧바로 1층의 정문으로 향했다. 프로듀서가 정문에 서 있는 보안팀 직원에게 다가가자, 뒤늦게 그를 알아본 직원이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 P씨! 어서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저를 찾아 온 사람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아뇨, 괜찮습니다. 어쨌든 시간 안에 오셨으니까요. 자, 따라오세요.”

 

프로듀서는 직원의 뒤를 따라 정문 옆에 위치한 경비실로 향했다. 프로듀서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경비실의 소파에 앉아 있던 ‘손님’은 그를 알아보더니 벌떡 일어나 머리 위로 두 팔을 붕붕 흔들기 시작했다. 등을 덮을 정도로 풍성한 그녀의 다갈색 머리카락이 그녀의 몸짓에 따라 살랑살랑 흔들렸다.

 

“아, 여기야, 여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는 총총거리는 발걸음으로 프로듀서를 향해 다가왔다.

통통 튀는 콧소리가 인상적인 그녀는 프로듀서 역시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몇 주 전, 그의 본가가 있는 미국으로 휴가를 떠났을 때 만난 적이 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것보다 조금 더 오래된 인연이었지만, 그녀에게서 직접 그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그는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안녕! 이번에는 나 기억하지? 안 잊어버렸지?”

“안 잊었어요, 이치노세 양.”

“냐하핫, 이치노세 양이래. 일본어로 들으면 이런 느낌이었구나. 간질간질~”

“명함을 들고 있었으면 전화라도 걸지 그랬습니까? 거기 휴대전화 번호도 적혀있을텐데.”

“냐하핫, 미안~휴대전화 놓고 와버렸어!”

 

시키는 멋쩍게 웃으면서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쓱쓱 문질렀다. 그 모습은 마치 그루밍을 하는 고양이의 모습처럼 보였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직원은 프로듀서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아는 사이였나보네요. 그럼 이 분은 이제부터 P씨께 맡겨도 될까요?”

“네, 지금부터는 제가 맡겠습니다. 폐를 끼쳤네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뒷일은 부탁드릴게요.”

“냐하핫, 오빠야, 고마웠어! 안녕~!”

 

직원을 남겨두고 경비실을 빠져 나온 뒤, 그때까지 얌전히 그의 뒤를 따라오던 시키는 주위의 인기척이 없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달려들어 코를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킁킁~ 좋아좋아. 역시 이 곳의 너는 전보다 더 좋은 냄새를 풍기는구나. 이건 베르가모트~? 자스민~? 냐하핫, 매니악한 냄새인걸. 아니지아니지, 혹시 여자 냄새인가?”

“단순히 냄새만 맡자고 이 먼 곳까지 온 건 아닐텐데요?”

“맞아맞아.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니거든. 내가 여기에 온 건, 대답을 듣고 싶어서야.”

“대답?”

 

잠시 후, 그의 몸에 코를 처박고 냄새를 맡던 그녀는 그에게서 떨어져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약속대로 너를 찾아 왔으니, 이제는 네가 약속을 지킬 차례야. 가르쳐 줘. 내가 이전에 했던 질문의 대답을.”

 

 

 

-------------<결말을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것(下)>로 계속됩니다.


 

쓰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무언가 계속해서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듭니다.

혹시 원인이 눈에 보이시는 분은 따끔하게 지적해주세요.

 

 

6월 7일 새벽 1시 수정 ; 제목이 너무 길다고 생각되어 제목을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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