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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나이트 1 - 백야Белые ночи : 아나스타샤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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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6-01, 2017 22:54에 작성됨.

 돌아가는 내내 차 안은 조용했다. 어떻게든 대화를 이으려던 아나스타샤도 창밖만 바라보았다. 프로덕션에 도착했을 때서야 나는 늦은 축하를 전했다. 아나스타샤.

 “오늘, 정말로 잘했어. 아름다웠어.”

 진작 해줬어야 할 말을 이제야 해줬는데도 아나스타샤는 고마워했다. спасибо(고마워요). 내 옆으로 바싹 다가왔다.

 “치히로 씨가 партия, 축하 파티 연다고 했어요.”

 “그래.”

 “프로듀서도 같이 갈 거죠?”

 “미안해.”

 아이스팩을 목에 대고 문질렀다. 일이 있어, 못가.

 아나스타샤의 발이 멈췄다. 앞서가는 나를 깊은 눈빛이 쫓아왔다.

 “바쁜 건가요?”

 “조금. 잔업, 같은 거지.”

 “프로듀서랑 함께…… 축하 받고 싶어요.”

 “나도. 그러고 싶지만, 안 되겠어.”

 “…….”

 끝까지 나를 잡으려다 아나스타샤가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Извините(미안해요). 은빛머릿결 아래로 침울함이 보였다. 귀찮게 했어요.

 “네가, 미안할 일이 아니야.”

 

 *

 

 필요한 건 힘이다, 이 세상은 결국 강자를 중심으로 움직이지, 물리적으로든 뭐든 간에, 힘을 기르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못하고 당할 뿐이다.

 

 *

 

 학수의 가르침이 머릿속에서 일렁였다.

 망상을 시작한 것은 열 살 때부터였다. 뭘 하든 힘들고 외롭던 시절이라 이런 식으로라도 버티려고 했던 것 같다. 그것이 쭉 이어져 지금까지도 과거의 일들이 망상처럼 떠오른다. 싫은 건 아니지만 여름이 되면 조금 심해져서 의식적으로 줄일 필요가 있었다. 다만 지금은 제어를 놓기로 했다.

 농담으로라도 학수는 좋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족속이었다. 쓰레기 중의 쓰레기. 그럼에도 배울 점, 존경할 점이 있었고 나는 모두 받아들였다. 그것들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하고 살아남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또 하나 나를 있게 만든 것은 각오였다.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할 때마다 필요한 각오를 챙겼다. 학수 아래서 자라기로 했을 때와 독립을 했을 때, 첫 직업을 가졌을 때, 프로듀서를 시작했을 때. 이렇게 네 번은 정말 남다른 각오를 하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직원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소란스러워도, 이해, 해주십시오. 그들은 알았다는 듯 별 관심 없이 나를 흘려보냈다. 물렁해진 아이스팩을 버리고 소매를 올려 쿨패치를 새로 붙였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나는 준비해둔 방으로 들어갔다. 먼저 도착한 남자가 소파에 편히 앉아 담배를 물고 있었다.

 “여어, 백야 씨.”

 당신도 태우겠나? 남자가 라이터를 들었다. 나는 남자의 옆에 앉았다. 담배, 피우지 않습니다.

 남자가 독한 연기를 뱉었다.

 “꽤 좋은 가게를 알고 있군. 이런 데가 있는 줄도 몰랐어. 서비스도 좋고, 술맛도 좋고.”

 “지인 분이, 소개시켜준 가게입니다. 저를, 이 일에 소개시켜준.”

 “좋은 지인을 두었군.”

 남자가 호탕하게 웃으며 잔에 얼음을 따랐다. 술을 따라 나에게 잔을 돌렸다.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술, 안 마십니다.

 “아니, 이 사람. 술도 안 마셔 담배도 안 펴. 대체 무슨 낙으로 살아? 나 혼자 외롭게 마시라는 거야?”

 “기분, 풀어드리려고, 준비한 거니까요. 오늘, 끝까지, 모시겠습니다.”

 남자가 호탕하게 웃으며 잔을 기울였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되나? 말끔히 비우고 금방 새 술을 따랐다.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내 눈빛이 술잔에 어둡게 비쳤다.

 “그런 일쯤이야 이미 다 풀렸지. 백야 씨가 이렇게 노력하잖나? 그럼 풀어야지.”

 “네. 감사합니다.”

 “아. 하나 궁금한 건데, 자네는 자네 나라 말 안 쓰나? 한 번 좀 해봐. 궁금한데.”

 “…….”

 “거 참. 튕기기는. 됐네, 됐어. 그건 그렇고.”

 남자가 또 술잔을 비우고 내게 잔을 넘겼다. 내가 술을 따르자 얼마 안 남은 갈색 액체가 흘러나왔다. 남자는 은근한 어조로 속삭였다. 여기, 여자들도 꽤 이쁘더만. 나는 무심히 답했다. 그렇습니까.

 “뭐야. 만날 아이돌들이랑 일하니까 그 정도는 눈에 채이지도 않나? 하긴. 나도 아냐 같은 아이랑 같이 있으면 그럴 거 같아. 아직 어린데도 아주…….”

 “아직, 어리니까.”

 그런 얘기는, 하지 마시죠. 탕, 소리 나게 병을 내려놓았다. 남자는 순간 흠칫하더니 눈을 흘겼다. 내 말 속에 섞인 감정을 읽어내지는 못했는지 다시 잔을 들었다. 이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백야 씨. 그런 것도 좀 조심해야 해.”

 “그렇습니까.”

 “물론이지. 기껏 잘 되가는 관계인데 오해가 생기면 안 되잖아.”

 그렇지? 열기를 품은 독한 연기가 허공을 유영했다. 코에 찌릿한 감각이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매캐하고 더웠다. 남자는 또 잔을 비웠고 나는 구경했다. 내 앞에 아까 거부한 잔이 돌아왔다.

 “거절하지 말고 마시게. 무안하게 어떻게 나만 마시겠나. 나도 새로 한 잔 따라주고.”

 물방울 맺힌 잔 옆에 빈 잔이 나란히 놓였다. 얼음이 거의 녹아있었다. 나는 새 술병을 들고 다시 각오를 했다. 이 일을 시작했을 때 했던, 정정당당과는 반대되는 비겁한 각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서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던 직감이 심심한 위로를 표했다. 이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야.

 태어나 감이 틀린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나는 병을 고쳐 쥐었다.

 “야.”

 있는 힘껏 남자의 얼굴을 후려쳤다.

 유리와 안면이 깨졌다. 술과 피가 터져 나왔고, 놈의 코와 감정이 뭉개졌다. 뭐, 뭐야? 상황을 따라오지 못한 정신이 강한 불만을 표했다. 나는 바닥을 나뒹구는 놈의 머리카락을 잡아 들어올렸다. 옆구리와 회복되지 않은 정신에 주먹을 박았다. 술로 흠뻑 젖은 바닥과 깊은 절망 아래에서 놈이 벌레처럼 기어 다녔다. 야, 이 같잖은 새끼야.

 “말이면 다인 줄 아나.”

 익숙한 언어를 쏟아냈다. 놈에게는 하나 같이 낯선 말들을. 내가 이 나라에 처음 왔을 때 느낀 장벽을 녀석도 느끼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일부러 나의 언어로 말했다. 놈에게 여기가 너의 낯선 영역이라는 것을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좆같은 새끼.”

 처음 본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 남의 약점을 서슴없이 찌르고 아랫사람에게 참견과 명령이 능숙했지. 스태프들도 불편해 했어. 이 새끼는 상습범이야. 반성을 할 줄 모르고 얄팍한 권위를 부림으로서 체면을 회복한다고 생각하지. 더러운 똥은 피하고 끝이지만, 너는 똥을 뿌려대는 쓰레기야. 지속적인 문제를 가져올 게 뻔한.

 결국 내가 나서게 했지.

 “아나스타샤를 위아래로 흝어 봤지. 역겨운 눈으로.”

 어이. 도망치려는 녀석의 앞에 테이블을 집어던졌다. 이제 시작인데 어딜 가려고. 잔과 재떨이, 라이터 등 잡다한 것들이 흩어졌다. 얼음을 주워 내 목덜미로 가져갔다. 짜릿한 감각이 망상을 더 선명하게 했다. 학수의 가르침과 치히로의 조언이 겹쳤다. 필요한 건 힘이다. 무대 위의 일은 아이돌의 영역, 무대 아래의 일은 프로듀서의 영역. 그리고.

 “폭력은 백야의 영역이야.”

 옆구리를 걷어차고 다시 머리채를 잡았다. 너, 대체……. 찢어진 눈두덩 속 악의로 가득한 동공에 신참 프로듀서와 백야가 비쳤다. 정장을 입은 프로듀서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백야의 언어로 말했다.

 “경력이 없어. 어디까지나 이력서에 쓸 경력 말이야. 어릴 때부터 어떻게든 살기 위해 돈 벌려고 아르바이트를 했거든. 공장에서 일하다 운 좋게 첫 직업을 얻었지. 내 전직. 위험한 인간들이 모인 사무실.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 해결사, 흥신소, 조폭, 깡패. 어느 쪽이든, 아이돌 프로덕션 이력서에 쓸 건 못 되지. 그런데 말이야. 어느 쪽이든 그 바닥에서 백야라고 하면 모르는 새끼들이 없었어.”

 볼품없이 튀어나온 배에 어퍼컷을 때렸다. 내가 그 바닥에서 최고였다는 거야. 안면을 무릎에 박고 구둣발로 걷어찼다. 폭력으로 말이지, 내가 누구보다 강했다고.

 “특히 과정은 더러운데 뒤처리가 깔끔한 걸로 유명했어. 그래서 의뢰인들이 참 좋아했고. 깔끔한 거 말고, 더러운 걸.”

 방송 쪽에서도 일 많이 맡겼어. 놈이 간신히 팔을 움직였다. 살……려……. 옆구리를 때려 신음을 끊었다. 너 같은 놈들 많았지, 너보다 더한 놈들은 더 많았고. 목을 잡아 숨통을 조였다. 난 항상 그런 새끼들의 적이었어. 그 시절의 기억들이 망상으로 떠올랐다.

 얼굴을 얼음에 비비고 살갗을 뜯어냈다. 달궈진 아스팔트에 갈아버린 적도 있다. 패거리를 싹 다 잡아놓고 추악한 게임을 진행하는 내내 나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학수의 가르침대로, 또한 학수와는 반대로. 나에게 한 번 걸린 녀석들은 죽거나 망가졌으며, 그 대상은 언제나 악당이었다. 복수할 엄두를 내지 못 했고, 결과적으로 깔끔한 뒤처리로 이어졌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백야의 이름은 함부로 부르는 게 아니야. 하지만 네가 나를 백야로 부른다면 나도 백야로서 너를 대해야겠지.”

 자조했다. 비겁한 새끼. 약자라고 모두가 비겁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확실히 비겁하고 더러운 새끼였다. 청산의 각오를 버리고 폭력의 각오를 다시 들었다. 자존심의 큰 상처였다.

 근데 뭐.

 “씨발. 내 아이돌을 위해서라면, 못 할게 뭐가 있겠어.”

 주먹으로 광대를 부쉈다. 부수고 부순 다음 또 부쉈다. 얼굴이 원형을 알 수 없는 고깃덩어리로 변해갔다. 하나 다행인 건 말이야.

 프로듀서의 영역과 백야의 영역에는 교집합이 있다는 것. 무대 뒤의 어둠이라는 교집합. 별이 반짝이려면…… 내가 존나 더럽고, 어두워져야겠지.

 “이것도 참 비겁한 말이야.”

 불붙은 담배를 놈의 이마에 비볐다. 핏대 서는 목을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끽, 깩, 거리는 괴상한 소리가 토막 났다.

 아, 그러고 보니. 놈이 지껄인 말이 떠올랐다. 좀 더 서툴고 재밌게, 라고 했나. 놈의 귀에 대고 놈이 알아들을 언어로 경고했다.

 “아나스타샤에게, 찝쩍대지마.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재미있냐? 주먹으로 턱을 겨눴다. 난 재미있어, 이러는 게. 폭력을 터뜨렸다. 쓰러진 테이블과 곤죽이 된 놈이 처참하게 뒤섞였다.

 돌아서서 서랍 안의 물건들을 꺼냈다. 송곳, 밧줄, 망치, 그 외에 오랜만에 잡아보는 도구들을. 오늘은 끝까지 모시기로 했지. 꿈틀거리는 놈에게 똑똑히 보여주며 다가갔다. 오늘 밤은 백야야.

 “아주 긴긴 밤이지.”

 

 *

 

 무언가를 제작하는 사람을 프로듀서하고 한다면, 내가 아는 최고의 프로듀서는 학수였다. 나는 학수가 만든 최고의 작품이자, 또한 그의 인생 최악의 실수이기도 했다. 다행히 학수의 실수는 학수에게만 참혹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시간이 흘러 프로듀서가 된 나는 고민했다. 나는 어떤 프로듀스를 해야 할까. 나는…… 실수를 하지 않을까. 내가 실수를 한다면, 피를 보는 것은 아나스타샤가 될 텐데.

 

 *

 

 감사, 합니다.

 괜찮아요. 천천히 이야기 해줘요.

 네. 그, 아이돌,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TV에 그…… 아이돌 말인가요?

 네. 그, 아이돌입니다. 저런, 광고를, 찍죠.

 아이돌…….

 흥미, 있으신가요?

 잘 모르겠어요. 아이돌이 어떤 건지.

 기본적으로, 춤, 노래. 음악과, 관련된 것을, 하죠. 인터뷰도, 하고. 잡지, TV에 나오고,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여줍니다.

 прекрасно…… 대단하네요.

 당신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어떻게?

 아름다우, 시니까요. 외모만이 아니라, 전부. 고독함이나, 순수함. 꼭, 별처럼, 반짝이시는 것, 같아요. 그 모든 게, 아름답습니다.

 아!

 왜, 그러시죠?

 звезда(별). 그러니까, 별. 저, 정말로 좋아해요. 저한테서 별이 보이나요?

 네. 보입니다. 아이돌은, 별처럼, 반짝이는 존재니까.

 прекрасно. 훌륭해요. 아이돌도 당신도요.

 그렇습니까.

 저, 더 알고 싶어졌어요. 아이돌의 세계.

 

 *

 

 가게를 나오자 지나가는 약한 비가 내렸다. 나는 단추를 풀고 교수형처럼 옥죄는 넥타이를 느슨히 했다. 벌어진 옷 틈으로 빗물이 스며들었다. 프로덕션으로 가야 해. 상의에 이슬처럼 물이 맺히고 셔츠가 몸에 달라붙었다. 아직 정리 못한 자료가 있어. 입술을 적시는 빗물을 핥으면 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날씨가 더 추웠다면 좋았을 텐데.”

 눈이 내렸으면 좋겠어.

 비는 학수의 것이야. 빗속에서 일어난 망상속의 학수가 가르침을 내렸다. 빗소리가 마음을 차분케 하고, 진해진 피 냄새가 본능을 깨우고, 내가 한 일들을 씻어준다. 그래서 자신은 비가 좋다고.

 “나는 달라.”

 독립을 했을 때, 백야라는 이름을 쓰기로 한 그 날부터 내 마음 속에는 눈이 내렸다. 하얀 눈이 괴로웠던 삶과 내가 저지른 짓들을 소복이 덮어주었다. 밤에도 하얗게 세상을 물들여 길을 비춰주었다.

 눈에 묻히면 사라지지 않는 거잖아? 예전 일을 같이 하던 동료가 물었다. 나는 내리는 눈을 보며 답했다. 그래서 좋은 거야.

 “내가 어떤 놈인지 기억할 수 있으니까.”

 묻혀 있던 기억들은 가끔씩 얼음을 깨고 일어나 망상이 되었다. 학수를 비롯해 온갖 쓰레기들과 버러지들, 등에 칼 꽂으려던 같잖은 놈들, 그 녀석들의 찢어지는 비명 소리. 이거 한 입 먹어보라던 분식집 아주머니의 말, 딸 찾아달라고 사정하던 아저씨의 울음, 원수 갚아줘 고맙다던 사내의 처절한 인사.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상관없었다. 모든 것들이 나의 존재를 있게 하는, 지탱하는 것들이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가끔씩은 감당하지 못할 만큼 심한 망상이 올라올 때가 있다.

 “더워.”

 눈 뜨기도 힘든 햇빛이 사정없이 내리 쬐고 가늘게 뜬 눈에 아지랑이가 비치는 날. 굳건히 쌓여있던 눈이 녹아내리고 망상이 시체처럼 드러났다.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비가 열을 식혀주면 다행이지만, 열을 머금은 습기가 짙게 깔리면 오히려 심해진다. 하필 오늘이 그런 날이었고 나는 시달렸다. 피가 씻기기는커녕 습기가 되어 끈적하게 엉겨 붙는 느낌이었다.

 프로덕션에 도착할 때 즈음 비가 그쳤다. 곧바로 낯선 열대가 눈 녹은 물처럼 질척거렸다. 그저 여름의 한 날일 뿐인데 장례식처럼 우울했다. 불 꺼진 건물 계단과 복도에 음산한 기운이 가득했다. 예전 일을 하던 사무실과 분위기가 닮아있었다. 아니, 내 눈에만 그렇게 비치는 건가.

 “더워.”

 익숙한 사무실을 떠나 낯선 사무실에서 낯선 계절을 맞았다. 오늘 처리한 남자가 발목을 잡아 구두가 묵직한 소리를 냈다. 이젠 이 녀석도 망상이 되었군. 벌써부터 남자의 기분 나쁜 음성이 귀를 맴돌았다.

 이번 일을 맡은 신참 프로듀서 맞지? 듣던 대로 말이 좀 서툴군. 내가 밀어주지. 저런 아이를 데려와주면 우리도 고맙지. 뭣하면 내가 가르쳐 줄 수도 있는데. 무대 위에서도 더 하지 그랬어. 이목을 끌어야 살아남기 편하다고. 업계에 예의라는 게 있지 않나. 그런 일쯤이야 이미 다 풀렸지. 그런 것도 좀 조심해야 해. 백야 씨. 응? 말 좀 해보게. 어?

 “프로듀서.”

 독특한 R 발음이 망상을 잠재웠다. 아나스타샤가 맑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어두운 사무실에서도 은빛머리칼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제 왔네요? 반가운 기색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나는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왜, 여기 있어?

 “파티, 끝나고 기다렸어요.”

 “그러니까, 왜?”

 “프로듀서랑 축하하고 싶어서요.”

 어디 갔다 온 거예요? 어린아이 같은 미소를 짓던 아나스타샤가 어둠속에서 내 차림새를 알아봤다. 비 맞았어요? 놀란 목소리에 내가 변명했다. 잠깐, 밖에 일이……, 괜찮아, 이 정도는. 감각이 수집한 정보가 눈보라처럼 휘몰아쳤다. 아름다움. 綺麗い. 티끌 없이. 10살의 아이. 러시아와 홋카이도에서 온. 눈 쌓인 숲. 우주. 즈베즈다. 별 하나의 계절. 그리고 겨울.

 처음 만난 순간 직감이 본능에게 명령했다. 저 아이가 너를 살릴 거야, 저 아이는 겨울이니까, 그러니 관계를 열어. 망상에 빠져 있을 때 아나스타샤가 옆에 있으면 겨울을 느낄 수 있었다. 한기와 바람이 해빙을 막았다. 구원을…… 받은 기분이었다. 거기서 만족 못 하고 욕망이 피어올랐다. 저 소녀는 겨울이고, 내 마음에는 눈이 내려, 우린 정말 잘 맞을 거야, 만나야 할 사람이 만난 거라고.

 “미안해.”

 망상을 부쉈다. 이번에는 내가.

 아나스타샤를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급하게 지웠다. 눈길을 걷는 소녀에게 뻗으려던 손에 피가 묻어있었다. 멍청한 새끼, 지킬 건 지켜야지. 아나스타샤가 걷는 길에 피가 묻어서는 안 된다.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왔는지 기억하라고.

 “나도, 축하하고 싶었어.”

 “Да(네). 알고 있어요. 조금 сожалею. 섭섭했지만, 괜찮아요.”

 “미안해.”

 “어째서 미안해요?”

 그러니까……. 말할 수 있는 이유와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목에 걸렸다. 우물쭈물 거리는 사이 아나스타샤가 가까이 왔다. 프로듀서.

 “저를 피해요? 왜?”

 겨울바람이 정장을 파헤치고 들어왔다. 꽁꽁 감춰두었던 비밀과 부끄러움이 끌려나왔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순수한 눈이 대답을 강요했다. 저, 프로듀서랑 더 친해지고 싶어요. 하얀 입김이 닿을 것 같았다. 협박이야, 거부할 수 없는.

 “이런, 프로듀서라서.”

 털어놓았다.

 “나는, 약한 프로듀서야. 능력도 힘도, 부족해.”

 “저도 그래요.”

 “프로듀서는, 아이돌을 키워야 하잖아. 난, 약속도, 못 지키는 놈이야.”

 “назначение(약속)?”

 어물어물 입술을 움직였다. 바른 말 고운 말, 하기로 했는데. 눈을 깜빡이던 아나스타샤가 아, 하고 기억을 회상했다. 그 때, 그거요?

 데뷔 싱글을 준비하며 일이 잘 안 풀리던 때, 무심코 입 밖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불온한 의미를 짐작한 아나스타샤가 그런 말 쓰지 말아달라고 부탁했고 나는 약속 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예 한국어 자체를 쓰지 않으려 애를 썼는데.

 “지키지 못했어.”

 이런 간단한 약속도. 한심한 자괴감에 고개를 숙이자 아나스타샤의 시선이 따라왔다. 눈을 맞추고 “괜찮아요.” 라고 말해주었다. 프로듀서의 나라의 말, 편하게 해줘요.

 “저보다도 더, 힘들었죠?”

 “그냥, 신경을 좀, 많이 쓴 거야. 그렇게 힘들지는…….”

 “ложь(거짓말).”

 거짓말 하는 거, 싫어요. 아나스타샤를 만난 이래로 가장 슬픈 얼굴이었다. 프로듀서를 더 알고 싶어요.

 “저, 프로듀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눈빛이, 날카로워서 그래.”

 “Я знаю(알아요). 저도 그랬어요. 차갑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자주 들었어요. 생김새 때문에 조금…… 무서웠을 수도, 있겠죠.”

 나 이외의 사람에게서 듣는 익숙한 이야기에 기묘한 감각이 스쳤다. 어쩌면 우린 정말로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시답잖은 욕망이었다.

 “나는, 알아.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Да(네). 그래서 신기해요. 어떻게 아는 거죠?”

 “그냥, 알아.”

 “신기한 사람. 프로듀서는 정말로 신기해요.”

 또 궁금한 거, 있어요. 아나스타샤가 첫 만남의 기억을 꺼냈다. 제가 외국인이 아니라는 거, 혼혈이라는 걸 말했을 때.

 “프로듀서의 반응, 남들과 달랐어요. 놀라지 않았어요. 어째서?”

 “아무런…… 상관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사소한 요소일, 뿐이라고. 그냥, 그런 것이구나, 그렇게 생각했어.”

 감각이 속삭인다. 이 아이가 먼저 손을 내밀어줬어, 붙잡지 않으면 실망시키겠지. 파티를 거절당했을 때의 얼굴을, 원하는 것을 참는 사람 특유의 얼굴을 보여주며 비열하게 말했다. 또 이런 표정을 짓게 만들 거야? 즉각 받아쳤다. 나를 알게 되면 더 실망할 거야. 녀석이 끊임없이 유혹했다. 프로듀서로서 해줄 건 해줘야지, 각오를 완전히 져버린 것도 아니잖아.

 각오. 청산하고 프로듀서를 시작하면서 내가 챙긴 각오는 ‘최고를 만들겠다’는 각오였다. 진정으로 이 일에 몰두하고 정상을 노려야 한다고. 이를 위해 과거는 잠시 멀리하자고. 그 각오를 져버린 지금 나에게는 새로운 각오가 필요했다. 인생의 큰 갈림길에서 선택한 다섯 번째 각오가.

 “나는 네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 될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

 마이클 잭슨 같은 사람, 흑이나 백이 아닌 ‘팝.’

 “너의 노래에는, 색도 형태도 없어. 그저, 아름다울 뿐이야. 누군가를 포근히 감싸 안는, 그런 노래야. 너의 반짝임은, 같은 상처를 가진 많은 사람을, 치유해 줄 수 있어. 내가 느꼈어. 내가, 네 덕분에.”

 이렇게 살아가고 있으니까.

 백야의 영역과 프로듀서의 영역을 떠돌던 내가 발을 움직였다. 손에 묻은 피를 닦고 발목을 잡은 망상을 뿌리치고 아나스타샤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아니, 백야의 영역까지 우주가 팽창했다. 집어삼켰다. 빛의 속도로 도망친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침략이었다. 텅 빈 우주의 한 가운데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하는 별이 있었다. 그 별을 위해 내가 이 우주에서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너를 위해, 무엇이든 할게.”

 무대 뒤의 어둠.

 “네 아름다움을, 훼손하지 않고.”

 모든 더러움을 받아내는 어둠. 피의 붉은색도 거무튀튀한 담뱃재도 전부 물들이는 어둠. 너를 위해 살고, 너를 위해 지치고, 너를 위해 존재하는 어둠. 백야마저 새까맣게 만드는 칠흑 같은 밤. 그리고 지쳤을 때 잠시 네 노래를 듣고, 너를 만나며 겨울을 보내는.

 “그런 프로듀서가, 되고 싶어.”

 그것이 나의 새로운 각오였다.

 대답을 기다리며 나는 열 살의 나의 망상을 보았다. 아이가 물었다. 거긴 어때? 입김을 내보였다. 겨울이야.

 아나스타샤가 내 손을 잡았다.

 “같이 이뤄요. 프로듀서.”

 그 순간 깨달았다. 백야가 어둠에 물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지 밤을 비추는 빛이 바뀔 뿐이다. 건조한 태양빛이 아니라 은은한 별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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