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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나이트 1 - 백야Белые ночи : 아나스타샤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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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6-01, 2017 22:49에 작성됨.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계절이 지나고 사람들의 차림이 가벼워지던 시기였다. 낯선 거리에는 사람과 연인과 생명의 기운이 태동했지만 나에겐 모두 낯선 이야기였다. 이곳에서는 누구도 나를 모르고, 나 또한 이곳을 모르기에. 몇 평 되지도 않는 좁은 방 안에서 나는 지나간 구름을 회상했다. 냉기를 한껏 품은 짙고 무시무시한 구름을.

 계절과 함께 깊어진 구름이 낮고 어둡게 그 무게를 더해가다 눈을 쏟으며 부상하면, 내 마음에도 하얀 눈이 내렸다. 지금은 그 자리를 벚꽃이 대신하고 있다. 하늘하늘 내리는 하얀 조각은 눈과 닮았지만, 자세히 보면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겉보기에 닮았을 뿐이지 너와는 본질적으로 달라, 그리 말하는 듯 했다.

 아쉬운 겨울이 남긴 마지막 바람이 꽃샘추위로 다가왔다. 나는 창문을 열고 겨울을 받아들였다. 너도 여기로 와. 쉴 곳을 마련해 주었다. 녀석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봄이 쫓아 들어왔다. 뺨에 달라붙은 벚꽃이 텃세를 부렸다.

 

 *

 

 ‘새롭다’는 것은 일종의 기대감과 함께 공포감을 몰고 온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장소, 새로운 복장, 새로운 일. 모두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공포와 닮아있었다. 핥아도 될 만큼 깔끔한 건물 바닥도, 처음 입어보는 검은 정장도,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한 막막함까지도. 그 중에 무엇이 가장 골치 아프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간단했다. 바로 사람. 시선.

 분주하게 움직이다가도 갑자기 공간 전체가 조용해지는 때가 있다. 하필이면 첫 출근 날의 자기소개 시간이 바로 그런 때였다. 사무실 안의 시선이 모두 나를 향해있었다. 안 그래도 딱딱한 정장들이 그에 어울리는 딱딱한 태도로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지? 눈을 끔뻑이며 침묵으로 독촉했다.

 “경력이, 없습니다.”

 또 하고 싶지 않았던 부끄러운 말을 해야 했다. 스물다섯이나 먹고 이런 버러지라서 죄송합니다. 속으로 덧붙였다. 그들은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몇 명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지만 대놓고 뭐라 하지는 않았다. 단지 관찰 중이었다. 자신들에게도 낯선 신입사원의 눈매, 차림, 그 외의 여러 가지를.

 마찬가지로 나도 그들을, 날카로운 눈빛이 혹시라도 살의로 오해 받지 않게 조심하며 새 직장의 분위기를 살폈다. 예전 의뢰인이 보답이라면서 구해준 직장인데, 그 인간은 나를 매우 싫어하는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나한테 좀 맞았다지만 이런 곳에 던져놓는 것은 아니지 않나. 이대로 있으면 나는 저 시선들에게 말라죽을 것이 틀림없었다.

 심란하게 쳐다보는데 센카와 치히로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놀라셨죠? 일단은 밖으로 나가요.

 “곤란한 질문을 드린 것 같아서 죄송해요. 사장님한테 이야기는 대충 들었는데 의아했거든요. 이력서에 아무것도 안 쓰여 있어서.”

 친절히 대해주고는 있지만 내게는 ‘그 나이 먹을 때까지 대체 뭘 한 거야’라는 질책으로 들렸다. 사실 그런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어서 구차한 변명만 우물거렸다.

 “이력이 없는 건, 일반적인, 이력서에 쓸 수 있는, 그런 것이, 없다는 겁니다. 제대로 된 직업 없이, 아르바이트, 그런 걸로, 살아왔어요. 그래도, 이것저것, 경험이 많으니, 뭐라도 도움은, 될 겁니다.”

 번역기를 돌리며 생각을 띄엄띄엄 말하는 것은 정말이지 죽을 맛이었다. 치히로는 참을성 있게 서툰 일본어를 들어주었다. 그녀에게 얼마만큼 신뢰를 주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면전에 대고 욕을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마 생글생글 웃으면서 버튼을 던져주고 말할 것이다. 그걸 누르면 당신이 살아요, 대신에 옆방에 있는 동료들이 죽고 말죠, 그들이 먼저 누르기 전에 얼른 결정해야 될 거예요, 후후, 절망에 찌든 얼굴이 참 마음에 드네요.

 “업무내용은 알고 계시죠?”

 “아. 대략적인 건, 들었는데, 그게.”

 “자세한 건 여기에 적혀 있어요. 그런데…….”

 치히로가 넘겨준 파일에는 당연히 알아먹지 못할 말들이 쭈르륵 적혀있었다. 하얀 건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로다. 고3 때 이후로 처음 느껴보는 경험이었다. 치히로는 내용을 쪽지에 간략히 정리해주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아이돌의 프로듀스입니다.

 .아이돌의 프로듀스란 말 그대로 아이돌을 만드는 일입니다.

 .아이돌의 공연부터 음악, 컨셉, 그 외 일정 등을 전부 당신이 책임지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당신만의 아이돌을 직접 키우는 것이 당신의 일입니다.

 .당신이 하는 일은 프로덕션에서 (특히 제가) 많이 도와줄 것입니다.

 .우리 프로덕션은 최근에 규모가 커졌고 그로 인해 인력을 확충하게 되었습니다.

 .정리되지 않은 일이 많지만 대외적인 신뢰도가 높으므로 일하는데 불편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당신은 최대한 아이돌들에게 신경을 많이 써주세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괜히 뻘짓했다가 회사 평판 말아먹지 말아달라는 고마운 메시지였다. 코팅해서 보관한 쪽지는 지금까지도 내 책상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하루에 한 번씩 읽으면서 마음을 다 잡고 있으면 치히로가 와서 말했다. 이제는 읽고 말하는 것도 제법 괜찮으신데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디까지나…… 처음보다는, 말이죠. 아직, 부족한 게 많습니다.”

 “불안하신 건가요?”

 책상 위 달력을 보며 치히로가 물었다. 오늘 날짜에 적힌 붉은 글씨. 담당 아이돌의 데뷔 무대. 싱글 앨범을 알리기에 좋은 기회였다. 쪽지에 쓰인 대로 회사의 신뢰도가 높았기에 가능한 일. 먼저 성공한 선배들의 부단한 노력으로 일군 성과. 부담은 있어도 치히로의 생각과 달리 불안하지는 않았다. 다만.

 “너무, 빠르지 않나, 싶어요.”

 아이돌하려면 몇 년 씩 연습생 생활을 하고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 독설까지 듣는 한국과는 달랐다. 프로듀서님이 노력한 성과예요, 치히로는 그리 말하지만 이것이 과연 아이돌에게 좋은 일일지 고민이 들었다. 무슨 일이든 급하게 가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니까.

 “그런 말은 아이돌 앞에서는 하지 말아주세요. 프로듀서님은 괜찮아도 직접 무대에 서는 아이돌은 다르니까요.

 “알고, 있습니다.”

 갖다오겠습니다. 책상 위로 드는 햇볕이 거슬려 커튼으로 침범을 막았다. 잠깐 빛에 닿았을 뿐인데 손끝이 따가웠다.

 나가기 전에 화장실에 들러 정장 안쪽에 쿨패치를 붙였다. 파스를 붙인 것처럼 차가움이 팔 안쪽으로 퍼졌다. 목 뒤에는 아이스팩을 대고 문질렀다.

 “더워.”

 사무실에서 복도로, 다시 실외로. 바깥으로 나올수록 기운이 급속도로 빠져나갔다. 한기 없이는 살 수 없는 빌어먹을 체질 때문이었다.

 옷으로 가린 부분은 천천히, 드러난 부분은 빠르게 익어간다. 더운 공기가 폐 속에서부터 혈관을 타고 몸을 지배했다.

 “더워.”

 흐르는 열은 땀이 되어 몸 밖으로 나온다. 마치 힘 또는 생명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그러다 아직 초여름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죽어간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터질 듯이 강하게 아이스팩을 쥐고 얼굴에 문댔다. 이러다가 떼어내면 살갗이 떨어지겠지. 처음에는 아픈 줄 모르다가 흘러나온 피를 보고 눈이 뜨일 거야. 거울을 보면 얼굴은 전보다 흉악하게 변해 있고. 직사광선이 빨간 속살을 쑤시면서 타오르는 아픔으로 괴롭히겠지.

 “프로듀서?”

 독특한 R 발음이 나를 망상에서 건져 올렸다. 아나스타샤가 나를 의아하게 보고 있었다. 햇빛이 눈부셔서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좋은 아침.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차에 태웠다. 좋은 아침이에요, 프로듀서.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

 

 저기, 실례지만.

 Что(네)?

 잠깐,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

 혹시, 여기, 사람이신가요? 홋카이도.

 Да(네). способ, 길…… 물어보는 건가요?

 아뇨. 그게 아니라.

 그럼?

 저는, 그, 이런 사람, 입니다.

 아이돌……. 프로듀서?

 네.

 뭔지 잘 모르겠어요.

 아, 죄송합니다. 설명을. 그러니까…….

 천천히 하셔도 돼요.

 감사합니다. 아직, 말이, 서툴러서.

 저도 그래요. 편하게 얘기 하세요.

 네. 그, 이름이?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

 저, 외국인은 아니에요. 일본과 러시아의 혼혈입니다.

 네? 아. 그러시군요.

 어…….

 왜, 그러시죠?

 Нет(아뇨). 아무것도.

 그럼, 그, 설명을 계속……. 저기, 죄송합니다. 핸드폰, 번역기, 꺼낼 테니까, 잠시…….

 

 *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홋카이도에 갔었다. 선배의 출장에 따라가는 것이었는데 지원자를 받을 때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사무는 익숙하지 않아 손에 안 잡히는데다, 홋카이도는 한 번 쯤 가보고 싶어서였다.

 아직 봄이라서, 혹은 벌써 봄인데도 쌀쌀한 날씨가 마음에 들었다. 관광 안내책자에서 본 것처럼 눈 쌓인 정경은 없었지만. 선배 말로는 지구온난화 때문에 여기도 여름에는 덥다고 한다. 한숨 밖에 나오지 않았다. 겨울이 되면 다시 와야지. 속으로 맹세하며 일터로 갔다.

 우리, 정확히 말해 선배의 업무는 제휴 중인 패션 브랜드의 시찰작업이었다. 꽤 유명한 브랜드의 광고모델이 우리 프로덕션의 아이돌들이었다. 사무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였다. 남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내가 괜한 동조감을 느끼는 사이 선배는 온갖 전문용어를 쏟아냈다. 신칸센에서 “내가 영업 하나는 자신 있지.”, “잘 보고 배워둬.”라고 듣긴 했지만 솔직히 알아먹을 수 있는 단어가 없었다. 내가 일본어를 마스터했어도 이해 못할 말들로 선배는 대화를 이어나갔다.

 장장 30분의 고문이 끝나고도 선배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는 자신의 위대함을 설명하고 있는 듯 했다. 존경해주고 싶었지만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적당히 ‘네’, ‘그렇습니까.’로 받아주면서도 눈은 딴 곳을 향했다. 아까까지 바빠 보이던 직장인들이 로비에 몰려있었다.

 “무슨 일이지.”

 무심코 흘린 말에 선배가 눈동자를 굴렸다. 나는 몰려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선배는 잠깐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와서는 설명해주었다. 번역기가 말하기를, “공장에 일손이 부족하여 제품의 배송이 지연되고 있다.” 정장부대는 손을 빌려줄 지원군들이었다. 그들이 인원체크를 하고 있을 때 나도 슬쩍 손을 들었다.

 여기서도 낯선 사람 대하는 시선이 쏠렸다. 선배가 “대체 뭐해?”라는 얼굴로 쳐다봤다.

 “밥값은 해야죠.”

 슬쩍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알아듣지 못 했다.

 

 공장에는 뒷문을 활짝 연 트럭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대부분 텅 비어있었고 회색 작업복의 직원들이 박스를 나르고 있었다. 나도 도우러 온 사람들 사이에서 박스를 옮겼다. 전체 분량의 3분의 1쯤 옮겼을 때 직원들이 하나씩 손을 놓았다. 정장이든 작업복이든 이미 상의를 내팽개친 이들이 수두룩했고, 그들 중 몇 명은 나를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흐트러짐도 지친 기색도 없이 박스를 한 번에 세 개 씩 옮기는 모습이 꽤 놀라웠나 보다. 박스를 전부 옮겼을 때는 박수를 치는 사람까지 있었다. 중간에 ‘스고이’나 ‘스바라시’ 같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이 섞여있었다.

 직원 숙소에서 밤을 지내고 아침에 선배와 통화했다. 들뜬 목소리로 나를 칭찬하는 것으로 보아 노동이 빛을 발한 모양이었다. 입사 이후 처음으로 회사에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선배는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다고 했다. 나도 그쪽으로 따라가기로 했는데 의외로 먼저 도착하고 말았다. 할 일도 없어서 시내를 구경하다 지나가던 소녀 한 명에게 시선이 꽂혔다. 반짝이는 은발과 흰 피부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아름다워.”

 그 소녀는 정말이지…… 미치도록 아름다웠다. 보는 순간 일어 사전에서 보았던 ‘綺麗い’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키레이. 뜻은 예쁘다, 아름답다. 단순히 예쁘거나 아름다운 것을 넘어서 정말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할 정도로 예쁘고 아름답다는 표현.

 희고 고운 피부, 더러운 것을 막아주는 긴 속눈썹과 그 속의 청명한 눈동자. 신비로운 느낌을 더해주는 은발. 그리고 겨울.

 소녀는 겨울이었다. 눈 내린 정경을 걷는 그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눈이 없더라도 그 소녀가 발을 내딛으면 그 자리에 눈꽃이 피고, 입을 열면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소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소녀가 낯선 이를 대하는 표정으로 모르는 언어를 구사했다. 일본어도 영어도 아니었다. 독특한 발음이 귀에 선명하게 꽂혔다. 내가 서투른 일본어를 말하자 조금 신기한 것을 보는 얼굴로 변했다. 이해가 갔다. 소녀도 일본어가 살짝 서툴렀는데, 자신보다 서투른 사람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내 눈빛이 날카롭다고 겁먹지 않아 다행으로 여겼다.

 명함을 건네주고 신분을 밝혔지만 의도가 잘 전달되지 않았다. 노력은 전해졌는지 응원을 받았다. 이름은 아나스타샤. 혼혈이라고 했다. 대화를 진전시키고 싶었지만 능력이 부족하여 번역기를 꺼냈다. 우리는 끈기 있게 배려하고, 배려 받았다. 택배상하차 따위는 힘든 축에도 끼지 못할 만큼 기력을 쏟아 간신히 목적을 전할 수 있었다.

 “아이돌,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갸웃했다.

 “TV에 그…… 아이돌 말인가요?”

 “네. 그, 아이돌입니다.”

 마침 건물에 걸려 있던 대형전광판에 제휴 중인 브랜드 광고가 나왔다. 키가 굉장히 크고 스타일 좋은 아이돌과 키가 아주 작아 어린애 같은 아이돌이 함께였다. 둘 중에 한 명이 홋카이도 출신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다.

 “저런, 광고를, 찍죠.”

 손짓발짓 섞어서 설명했더니 아나스타샤는 조금 관심을 보였다. 자기도 이용해본 브랜드라고 했다. 선배에게 진심담긴 존경과 감사를 표한 순간이었다.

 나는 아이돌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춤이나 노래, 인터뷰, 아이돌이 하는 여러 가지에 대하여. 당신이 그렇게 될 수 있고, 그렇게 되어줬으면 한다고. прекрасно. 아나스타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훌륭하다는 뜻이었다. 아이돌도, 열심히 일하는 나도.

 선배가 오기 전까지 우리는 좀 더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분명 이 대화가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올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태어나서 감이 틀린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더욱.

 선배가 출장업무를 하는 동안 나는 자주 아나스타샤를 만났다. 회사로 돌아올 때는 처음으로 담당 아이돌이라는 것이 생겼다.

 

 *

 

 이동하면서 무대의 정보를 정리했다.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유명한 상가건물. 성공한 아이돌은 한 번씩은 서봤을 정도로 업계의 흥행 보증수표 같은 곳. 우리 회사에서 신인이 이 무대에 서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만큼 중요한 일이라고 치히로가 강조했다.

 솔로 곡을 부르고 CD 홍보를 겸해 약간의 토크를 하면 끝이다. 아나스타샤가 쏟은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치히로의 말이 맞았군.

 룸미러로 보이는 아나스타샤의 얼굴이 그리 밝지 않았다.

 “불안해?”

 “Нет. 아니에요. 그냥 조금……. 큰 무대라서 긴장돼요.”

 “연습, 열심히 했잖아. 괜찮아. 분명.”

 신호가 바뀌어 액셀을 밟았다. 차가 조금 심하게 흔들렸다. 취업에 앞서 급하게 면허를 따 운전이 익숙지 않은 탓이었다.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는 성격이라 감독관은 눈치 못 챘지만 사실 처음 차를 몰았을 때 복잡한 감정들이 교차했다. 아나스타샤도 그런 것일까 싶어 룸미러를 주시했지만, 아니었다.

 “뭔지, 말해줘.”

 아나스타샤의 눈빛이 떨렸다. 어떻게 알았냐고 묻고 싶은 얼굴이었다. 조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불안해요.

 “노래는 괜찮아요. 레슨 열심히 했고……. 트레이너 씨에게도 칭찬, 받았으니까……. 하지만 사람들이 저를 봐줄지…… 모르겠어요.”

 “…….”

 “모르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저를 봐주겠죠. 그건 제가 сингулярность, 특이하니까…… 눈에 띄니까 그럴 거예요. 전에도 그런 적, 자주 있었고.”

 “…….”

 “그럼 저는, 아이돌이니까…… 사람들이 원하는 저를…… 보여줘야 할까요?”

 “아니.”

 즉답을 하자 아나스타샤의 눈이 커졌다. 왠지 말을 끊는 모양새가 되었다. 나는 핸들을 꺾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 건, 아름답지 않아. 내가 널 프로듀스 하는 이유는, 네가 아름다워서야. 있는 그대로의 네가, 아름다워서. 그게 나의, 프로듀스 방침이야. 아나스타샤의 프로듀스는, 내가 정해. 하기 싫은 일, 남들이 원하는 일, 억지로 시키지 않아.”

 그 따위로 살게 두지 않는다고. 마지막 말은 무심코 거친 어투의 한국어가 나와 버렸다. 아차, 싶어 뒤를 살폈다. 뉘앙스로 이해했는지 아나스타샤는 뜻을 묻지 않았다. 불온한 의미에 불만을 보이지도 않았다. 대신에 웃었다. 금방 녹아버릴 한 송이 눈처럼 은은하게.

 “Спасибо(고마워요). 프로듀서.”

 “…….”

 쥐어짜낸 말이었다. 더 이상의 말은 힘들어. 심지어 운전하면서. 에어컨 바람에도 땀이 났다. 그것을 모르는 건지 아나스타샤는 계속 대화를 구했다. 어색함을 견디기 어려웠나보다.

 러시아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10살 때까지 살았다고 했나. 할머니가 만들어준 보르시치라는 음식, 할아버지가 읽어준 동화, 아버지에게 사냥을 배웠다는 조금 놀라운 이야기. 흘려듣지 않으려 애썼지만 대답은 거의 하지 못 했다. 아나스타샤도 조금씩 말수가 줄었다.

 “도착했어.”

 곧장 대기실로 이동했다. 아나스타샤가 의상을 입는 동안 나는 무대를 확인했다. 꽤 화려하게 꾸며놨군.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깃거렸다. 스태프 한 명이 와서 뭐라고 말하길래 고민하는 척 천천히 해석하니 무대는 괜찮으냐는 뜻이었다. 괜찮습니다. 최대한 유려한 발음으로 말했다. 허세 같더라도 아나스타샤를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었다.

 일을 할 때는 얕보이지 않는 것이 좋다는 치히로의 말을 되새겼다. 무대 위의 일은 아이돌의 영역, 프로듀서의 영역은 무대 아래의 일. 무대 아래에서 내가 얕보이면 아나스타샤까지 얕보일 수 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런 눈빛 덕에 아직까지 얕보인 일은 없었다. 대신에 성격 더러운 놈이라고 수군거리는 것은 들었다. 진짜로 그들이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그렇게 들렸다. 아나스탸에게 해가 될까 싶어 행동을 좀 더 조심키로 했다.

 단추 하나까지 철저하게 갖춰 입고, 아무것도 안 할 때는 양손을 공손히 모았다. 어울리지 않는 서정적인 눈빛을 지어 왠지 다가오기 힘든 분위기를 만들었다. 물론 가끔 그런 것을 무시하고 말을 거는 사람은 있었다.

 “거기, 자네. 이번 일을 맡은 신참 프로듀서 맞지?”

 ‘백야’라고 했나? 30대 중반에 머리에는 기름칠을 한 남자, 배가 조금 나왔고 기분 나쁠 정도로 친근한 싸구려 미소, 그와 대비되는 고급 정장을 입은  남자가 내 이름을 불렀다. 백야. 오랜만에 불리는군, 방송 쪽 관계자라고 했던가. 나는 그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이번 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허허. 아니야, 괜찮아. 저런 아이를 데려와주면 우리도 고맙지. 이 일도 꽤 하다보면 잘 될 애와 안 될 애가 보여. 저 아이는 잘 될 애야. 그런데 자네, 듣던 대로 말이 좀 서툴군.”

 “아직 좀, 익숙지 않아서요.”

 “금방 괜찮아 질 거야. 젊고 유능하잖아. 이 일만 잘 되면 내가 밀어주지.”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악수를 하니 미지근한 땀이 묻어났다. 몰래 돌아서서 닦았다. 남자는 무대를 준비 중인 스태프들 사이로 들어갔다. 남자가 뭐라 말하자 스태프들이 분주히 진땀을 흘렸다.

 무대 뒤로 돌아가니 무대의상으로 갈아입은 아나스타샤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은 모습이 새삼 당연하게도 아름다웠다. 긴장은 좀, 풀렸어?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대 위의 일은 아이돌의 영역. 내가 감히 침범할 수 없는 별들의 세계.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어두우니까 조심하라고, 손전등을 비추는 것뿐이다.

 “다녀올게요, 프로듀서.”

 별이 어둠 속을 걸었다.

 

 *

 

 여기가 네 새 집이다.

 새 집.

 네 또래 친구들도 많이 있지.

 고아원이라고 써져 있어.

 그래. 고아원이지. 너처럼 부모 없는 애들이 오는 곳.

 나, 엄마도 아빠도 있는데.

 이젠 없어. 죽었잖아.

 …….

 잘 들어라, 얘야. 이제부터는 내가 널 키울 거다. 이 ‘학수’가. 네가 어떻게 자랄지는 내가 정해. 알아들었느냐?

 더워.

 뭐?

 여긴 너무…… 더워.

 

 *

 

 아나스타샤가 노래했다. 조명과 무대를 포함해 우주 전체가 아나스타샤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주변을 기웃거리던 관객들이 중력에 이끌리듯 가던 길을 멈췄다. 그저 살아갈게, 별의 실루엣에 손을 흔들며 헤어진 그 날을……, 좀 더 좀 더 안아줘, 기적을 모으겠어, 당신만을 향하는. 가사를 곱씹으면서 나도 아나스타샤의 우주로 빨려 들어갔다.

 우주와 별. 겨울과 함께 아나스타샤에게서 떠올리는 이미지였다. 아나스타샤는 즈베즈다(звезда), 별이라는 말을 자주 입에 담았다. 그 때는 아나스타샤의 눈도 호수에 비친 별처럼 반짝거렸다. 머릿속에 익숙한 시 한 구절이 스쳤다. 그것을 아나스타샤에게 맞춰 읊조렸다.

 “별 하나의 계절.”

 부모 손을 잡고 놀러온 아이들이 있었다. 열 살 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들이 신기한 듯 아나스타샤를 보고 있었다.

 문득 궁금해져 러시아를 검색했다. 시베리아의 설원, 두꺼운 옷을 입은 사람들, 보드카, 눈 쌓인 숲, 도시. 보르시치라는 음식은 맛있어 보였고, 어느 동화나 괴담에서 나올 법한 운치 있는 산장도 있었다. 성질 더러운 불곰과 불곰을 때려잡은 사냥꾼들의 기념사진도. 그리고 오로라. 아나스타샤가 보고 자라왔을 풍경이 폰 안에 선명했다.

 열 살의 아나스타샤가 느꼈을 시선을 상상해 보았다. 별과 겨울을 품어 남들 눈에 띄었을 아이는 낯선 환경에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지.

 러시아에서 살았던 아이에게 홋카이도는 덥지 않았을까. 별도 오로라도 보이지 않는 빌딩 숲은 외롭지 않았을까. 지금 열다섯이 된 아나스타샤는 어떤 심정으로 무대에 서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일까. 어떤 마음으로.

 “남들이 원하는 자신이 되려 했을까.”

 열 살의 내가 떠올랐다. 지금보다 작고 불안했던 내가 저 아이들과 함께 아나스타샤를 보았다면…… 조금은 위로를 받지 않았을까.

 

 *

 

 치히로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무대는 잘 끝났는지, 별 다른 문제는 없었는지 형식적이면서도 진심이 담긴 걱정을 했다. 나는 있는 그대로 답했다.

 “네. 잘 끝났습니다. 물론이죠. 아나스타샤가, 그 만큼 노력했으니까. 저는, 지켜봤을 뿐이죠. 감사해요, 치히로 씨한테도. 금방, 돌아가겠습니다.”

 뒷정리는 본무대보다도 어지러웠다. 사실 대부분의 준비나 중요한 지휘는 거의 선배가 해주었기 때문에 내가 할 일은 별로 없었다. 홋카이도 때에 이어 한 번 더 선배를 존경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내가 저런 일을 해야 된다는 말에 부담스러워졌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배우기 위해 무대 뒷정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조명장치 네댓 개를 한꺼번에 옮기는 모습은 여기서도 반응이 좋았다. 슬슬 정리를 마치고 아나스타샤를 데리러 가려는데 스태프 한 명이 심각한 얼굴로 나에게 무언가를 알렸다.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눈을 찌푸렸다.

 아까 전의 남자, 방송관계자가 아나스타샤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상대가 누군지 모르는 아나스타샤에게 남자가 내게 보인 것 이상의 과도한 친근감을 보였다. 나는 어쩔 줄 모르는 스태프에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가서, 일 하세요. 그 사이에 남자가 나에게 한 것과 같은 멘트를 지껄였다.

 “이 일도 꽤 하다보면 잘 될 애와 안 될 애가 보이거든. 아냐는 분명히 잘 될 거야. 내가 보장해.”

 “아……. Спасибо. 감사, 합니다.”

 “오오, 그거 러시아어인가? 아까 무대 위에서도 더 하지 그랬어.”

 “Что(네)?”

 “처음부터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야 살아남기 편하다고. 좀 더 서툴고 재밌게, 사람들이 원하는 그런 식으로.”

 남자가 한 마디를 뱉을 때마다 내 눈매가 가늘어졌다. 해석 할 필요 없이 역겨운 어조만으로도 불쾌했다.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묵직하게 발을 들었다. 네가 그 따위로 말하면 내가 뭐가 되니. 그 때, 아나스타샤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미간에 힘을 풀고 발을 내렸다. 계속 걱정이 되었는지 스태프가 돌아와 말을 걸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정말로.”

 의아해 하는 스태프를 돌려보내고 상황을 주시했다. 겨울은 쉽사리 건드릴 계절이 아니지, 모든 계절이 그렇지만, 특히 겨울이 그래.

 남자가 노골적인 욕망을 드러냈다.

 “모처럼 예쁜 얼굴을 타고났는데. 그것 말고도 매력을 키워야지 않겠어? 뭣하면 내가 가르쳐 줄 수도 있는데. 응? 듣고 있어?”

 “…… 예쁘다고 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차갑지만 어딘가 부드러운 말투였다. 마치 눈처럼.

 “조언 해주신 것도 감사해요. 하지만, 제가 어떤 아이돌이 될지는 프로듀서가 정합니다. 다음번에는, 더 노력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은은하게 웃어보였다. 멍하니 굳은 남자를 두고 아나스타샤가 내게로 왔다. 안도 섞인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긴장했어요. 저, 혹시 실례한 건 아닐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잘했어.

 “신중하고 탁월한, 좋은 대처였어.”

 “프로듀서 덕분이에요.”

 “그런가.”

 쥐어짜낸 그 말이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프로듀서로서 조금은 잘 해나가고 있구나. 아이돌에게 묻어가지만은 않는구나. 밥값을 하고 있구나. 치히로 씨와 선배에게 면이 서겠구나. 아나스타샤가 정말로 나를 믿어주는구나. 다양한 형태의 안심이 조금씩 짐을 덜어주었다.

 주차장으로 가는 동안 마음을 다시 잡았다. 이 정도로 해이해져서는 안 되겠지. 겨우 시작일 뿐이야. 차문을 열 때 스태프에게서 전화가 왔다. 조금 다급한 목소리였는데, 대충 ‘일이 생겼으니 올라와주세요.’라는 내용 같았다. 정리는 다 끝났을 텐데.

 “아나스타샤. 잠깐 갖다올 테니까, 먼저 타 있어.”

 위로 올라가니 생각 이상으로 곤욕을 치른 듯한 스태프와 곤욕의 주체인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태프는 괜스레 내게 미안해하며 자리에서 빠졌다. 이것만으로도 남자가 어떤 말을 할 것인지 충분히 내용을 예상할 수 있었다. 또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심적 피해를 가져다줄지도. 태어나 한 번도 틀려본 적 없는 직감이 속삭였다. 지금부터 일어나는 모든 것이 네 자존심을 후벼 팔 거야.

 “백야 씨. 자네 아이돌 아냐 말일세. 아까 얘기를 좀 해봤는데 말이야.”

 남자가 입을 여는 것. 내 이름을 부르는 것. 아나스타샤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 아까 일을 지껄이는 것.

 “이제 막 시작한 신인인데 상사한테 따박따박 말대꾸나 하더군. 이런 건 자네가 사전에 가르쳐놨어야 하는 거 아닌가? 업계에 예의라는 게 있지 않나.”

 아나스타샤가 평가당하는 것. 여기서 이런 말을 듣고 있는 것. 이런 남자에게 무시당한다는 것. 그래서 자괴와 분노가 몰아친다는 것.

 “하기야. 자네만 해도 업계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참이니. 듣자하니 이력서에 쓸 것도 없었다면서? 그럼 회사 차원에서라도 관리를 했어야지. 이런 것도 안 가르치나? 아니면 자네가 제대로 못 한 건가? 응? 말 좀 해보게. 어?”

 회사가 무시당한다는 것. 주워들은 소문으로 나를 힐난하는 것. 그게 사실이라는 것. 그 중 가장 참기 힘든 것은 이 모든 것이 ‘나로 인해’ 벌어졌다는 것이었다.

 무대 아래의 일은 프로듀서의 영역이다. 그 영역에서 나는 약자였다. 무대 위 아나스타샤의 아름다움이 이딴 남자에게 무시당하고 있었다. 나 때문에. 내가 얕보였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도 프로듀서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에.

 남자가 계속 소리쳤다. 왜 대답을 안 해?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학수’에게 배운 것을 떠올렸다. 약자가 강자에게 대적하는 방법은 비겁해지는 것이다. 치사하고, 약아빠지고, 비열하게, 쥐새끼처럼 굴고, 악해져야 한다. 자존심을 걷어차고 수단과 방법을 가려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살아남기만 하면 된다. 앞에 놓인 선택지에서 나는 각오를 버리고, 비겁해지는 길을 택했다.

 “죄송합니다.”

 미안해, 아나스타샤.

 “다, 제 잘못입니다. 사과의 뜻으로…….”

 약속을 못 지킬 것 같아.

 “술, 한 잔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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