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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제] 키타자와 시호 "나비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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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5-31, 2017 23:04에 작성됨.

번데기를 찢고, 나비는 하늘로 날아오른다.

그 짧은 황금기를 질투하며.

눈 앞에 없는 황혼을 두려워해줄 자를 찾는다.

 

 

--

 

 

[대부분의 벌레들은 최대한 많은 수의 자손을 남기는 번식 전략을 택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많이 낳을수록 많은 수의 성체들이 살아남아 다음 세대를 이어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곤충은 대자연 속에선 연약한 존재이며, 수 많은 포식자의 좋은 식사거리입니다.  자기들 사이에서도 말이죠. 따라서, 그들은 최대한 많은 자손을 남기는 걸로…..]

 

TV가 꺼졌다. 누가 껐나 해서 고개를 돌려보니, 세상 모르고 자는 미키 선배가 무의식중에 꺼버린  것이었다. 머리 아픈 다큐멘터리 같은 건 쾌적한 수면에 방해될 뿐이다라고, 자신의 온 몸을 배배 꼬아가며 표현하는 그녀를 보며 무심코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인 걸까.

 

“이 시기에, 이렇게 세상 편하게 자고 있구나……”

 

시기, 어쩌면 이 시기이기에 편하게 잘 수 있는 걸 지도 모른다.

벚꽃은 오래 전에 시들었다. 화사한 봄은 이미 저물어, 계절은 예년보다 조금 길 거라는 장마의 초입 앞에서 어물쩡거리고 있다. 봄 특집이다 뭐다 해서 밥 먹을 틈도 없이 바쁘게 뛰어다닌 게 벌써 오래 전의 일로만 느껴진다. 느낀 만큼 오랜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겠지만.

그리고 장마를 앞둔 지금부터, 뜨거운 여름이 올 때까지는 상당히 한가하다. 아이돌 일도 한 철 장사인 것이다.

 

“한 철 장사라….. 시즌 오프라는 거네.”

 

창 바깥을 보았다. 꾸물꾸물한 하늘이 드디어 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장마의 초입을 알리는 빗소리가 점점이 창문을 때리다, 고장난 TV같은 음색으로 조금 낡은 건물 전체를 천천히 감싸기 시작했다.

 

“음냐아….. 허니야 탄핵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노….”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건지….”

 

기분 좋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지, 미키 선배는 헤실거리며 침을 흘리며 자고 있다. 한 쪽으로 치우친 몸과 얼굴은, 일어날 때 즈음엔 고운 피부에 붉게 눌린 소파 자국을 남기겠지. 침 냄새는 덤이고. 아이돌로서의 이미지와 몸가짐을 생각한다면 바로 깨우거나, 적어도 자세를 바로잡아줘야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봄철 동안 지쳤고, 여름날이 시작되면 더 지칠 테니. 지금이라도 조금 자게 내버려두는 게 최소한의 인정이라는 거다. 지금처럼 다시 TV를 켜도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 내가 깨운다고 해서 일어날 것 같지도 않다.

어차피 내가 아니어도, 리츠코 프로듀서가 와서 두들겨 깨울 게 분명하기도 하고.

 

그러고보니, 리츠코 프로듀서도 예전에는 아이돌이었다. 정확히는 프로듀서가 되기 위해서 입사했다가 인재 부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떠맡게 되었던 형태였다고 한다. 억지로 떠맡은 것 치고는 본인도 꽤 즐거웠던 것 같고, 아이돌을 관 둔 지금도 가끔씩 대타로 공연에 들어가곤 한다. 역시 미련은 남은 것 같다.

 

“오늘 트레이닝은 리츠코 프로듀서가 담당한다고 했었지…..”

 

리츠코 프로듀서의 트레이닝은 엄격하다. 아미쨩…. 아미 선배가 ‘귀신 중사 리츠코’의 악담을 매일같이 입에 올리고 사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나, 키타자와 시호는 자신에게 엄격하고, 그건 사무소의 다른 사람들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매일같이 자신을 담금질하는 걸 빼놓지 않는 내게 있어서도 리츠코 프로듀서의 트레이닝은 엄격하다.

참고로, 미키 선배는 오늘 트레이닝 담당이 리츠코 프로듀서인 걸 아직 모른다. 전통이니 뭐니 하면서 대탈주극을 벌이는 선배를 잡아오는 일은 사양하고 싶다. 어차피 도나도나 노래를 부르면서 죽음을 향해 끌려갈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저항해보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라는 걸까.

 

“……나도 도망칠까?”

 

풋, 스스로 내뱉은 실없는 소리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도망칠 리가 없잖아, 이 키타자와 시호가.

빗소리가 이 작고 낡은 건물을 뒤덮듯이 강해진다. 곧 트레이닝 시간이다.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장마의 초입, 여기서 어물쩡거리다간 폭우를 뚫고 트레이닝을 받으러 가야 한다.

 

TV를 다시 켰다. 슬슬 선배를 깨우고, 잠시동안 다큐멘터리를 보자.

 

[곤충은 성충이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생을 마감합니다. 곤충에게 있어서 성충기란, 수 많은 형제자매들은 누리지 못했던 생의 황금기이자 동시에 황혼기인 셈이죠. 그리고 그 중에서 성충이 된 후에도 살아남은 일부 개체 중의 일부만이 짝짓기에 성공해, 자손을 남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손들 대부분은, 지금은 세상에 없는 수 많은 삼촌과 고모의 뒤를 밟게 되겠죠.

 

다큐멘터리 곤충의 생태 1부는 여기까지입니다. 2부에서 뵙겠습니다.]

 

 

--

 

 

“원, 투, 쓰리, 포! 원, 투, 쓰리, 포! 거기서 턴!!”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나와 미키 선배는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가쁜 숨이 턱 위까지 올라와, 바깥의 빗소리조차 자신의 숨소리로 막아버린다. 트레이닝 룸에 가득찬 열기는, 춤을 멈춘 지금도 식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수고 많았어~ 마실 거 가져왔으니까 좀 마셔.”

 

“이거 마시고 미키 선배는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호오, 누구 맘대로? 연대책임으로 2세트 더 추가!”

 

역시 귀신 중사 릿쨩. 그렇다면, 나도 유구한 전통에 따라 이곳에서 감히 대탈주를 감행해야겠지. 시호는 전통에서 오는 단결을 존중하는 멋진 아이돌이라고.

 

“시호, 너도 미키 따라서 탈주할 생각 하지 마.”

 

“타, 탈주라니요~ 우리 765의 아이돌들이 탈주 같은 걸 할 리가 없잖아요~”

 

…..그래, 남의 마음 정도는 읽어내야 귀신이라는 별명이 부끄럽지 않겠지.

 

“어휴, 미키는 둘째치고 시호 너까지….. 뭐, 마음은 이해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면 귀신 중사 리츠코 대신 친절한 릿쨩을 주는 거야! 그렇게 하면 모두 행복한 거야!!”

 

“행복이라는 건 정해진 총량이 있지. 누군가와 나누면 배가 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몫이 줄어드는 거야. 미키, 네 행복을 나에게 넘겨. 날 위해서.”

 

“오니! 악마! 치히로!!”

 

“잠깐만! 그쪽은 초일류 대기업이라고! 건들면 안 돼!!”

 

그 대기업의 아이돌들도, 뜨거운 여름이 올 때 까진 상당히 한가하다는 듯 하다. 물론 고정적으로 들어가는 프로그램이 많다면, 이 시기는 조금 덜 바쁠 뿐인 시기가 된다. 촬영 외의 다른 일정에 쓸 틈은 커녕, 사적인 생활을 즐길 시간도 부족하게 된다.

 

“미키, 이렇게 틈이 있을 때 트레이닝을 해 둬야 한다고.”

 

“미키는 천재니까 괜찮은거야….. 아후…. 주먹밥 먹었으니 잘까…..”

 

“시호를 조금 본받지 그래? 시호는 트레이닝이 없어도 항상 자주적으로 트레이닝을 하고 있다고. 게다가 트레이닝 끝나고 사무소에서 공부까지. 열심히 하라곤 안 하겠지만 조금은…..”

 

하늘에 끼인 먹구름이 한층 더 짙어진다. 빗발이 강해진다. 세차게 창문을 때린다. 어제도 본 트레이닝 룸 바깥의 경치가, 오늘은 유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에 일그러져 보인다. 잔소리와 딴청의 이중주를 뚫고서, 빗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미키는 유토리 세대인 거야~ 비교당하면서 크는 건 교육적으로 안 좋은 거야~”

 

“음, 역시 적절한 폭력이야아말로 권위를 세워주는 법이겠지?”

 

딱콩, 하는 소리와 함께 미키 선배가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을 구른다. 그 소리를 신호로, 나는 자리에서 바로 일어났다.

 

“……충분히 쉬었어요. 다시 시작하죠.”

 

“에? 벌써? 조금 쉬어둬.”

 

“맞아! 시호는 조금 쉬어야 하는거야!”

 

리츠코 프로듀서가 의아한 듯 말하며 나를 제지하였다. 미키 선배는 때는 지금이다란 식으로 손바닥을 뒤집고 리츠코 프로듀서에게 동조했다. 창가를 보았다. 비가 더 세차게 내린다. 얼마나 더 강해질진 알 수 없다. 먹구름이 한층 더 짙은 먹구름에 먹혀간다. 이 이상 강해지면, 우산으로는 막을 수 없을 것 같다. 안타깝게도 비옷은 챙겨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편의점에서 사기엔 조금 돈이 아깝다.

 

“어물거리면 비가 더 세질 거에요. 젖은 들짐승같은 꼴이 되서 돌아가긴 싫어요. 빨리 끝내죠.”

 

스스로 말하기엔 좀 뭣하지만, 내 비주얼은 충분하다. 하지만 보컬과 댄스 실력은 같은 시어터 조 동기들에 비해서 뒤쳐지는 편이다.

조금이라도, 하루라도 빨리 뛰어넘어야 한다. 여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시호, 히비키 욕 하면 안돼. 히비키는 착한 아이라고.”

 

“미키 니가 가장 심하거든? 아무튼 뭐, 일리 있네. 그러니까 미키, 당장 일어나! 휴식시간 없이 풀코스 트레이닝이다!! 안 그래도 시간도 없는데 마침 잘 됐네! 스파르타아아아!!!”

 

‘시호야 여기서 통수치노?!’ 라니, 대체 어디서 저런 말을 배워온 걸까. 설마 요즘 구글 검색에도 안 걸린다는 모 한국산 쓰레기장에 들어간 건 아니겠지? 그런 동료라면, 재빨리 인연을 끊는 게 피해를 줄이는 게 최선일 텐데....

 

.....아무튼 시간은 많다. 여름이 되면 그래도 좀 바빠질 테지. 그 전까지, 할 수 있는 일을 해 놓자. 한철 장사를 위해선, 남은 계절 동안 그 한 철에 대비해야 하는 법이다.

 

“너무한거야!!”

 

“미키 넌 따로 트레이닝 할 시간도 얼마 없잖아. 잔말말고 움직여! 어차피 다음 현장은 라디오라서 몸도 안 쓰잖아!”

 

“우리 보이스트레이닝 하는 중이었던 거야!”

 

 

--

 

 

“아~ 심심해라~”

 

사무소 탈의실. 마침 나보다 조금 먼저 도착한 카나가 있었다.

 

“그러면 나처럼 트레이닝이라도 갔다오는 건 어때?”

 

“음….. 관둘래. 챌린지 하고 온 히비키 꼴이 되고 싶진 않아.”

 

카나가 날 보며 말했다. 결국 빗발은 강해져버렸고, 우산으로는 도저히 커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차를 타는 게 현명한 판단이었겠지만, 미키 선배가 리츠코 프로듀서의 차를 타고 다른 현장으로 향했고, 아카바네 프로듀서도 하루카 선배를 신제품 가방 광고 촬영 현장까지 회사 차로 데려다주었기 때문에 결국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다. 빗소리만 먹먹한 조용한 귀환이었다.

 

“미키 선배 같은 말을 하네…. 것보다,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안 그래도 온 몸이 젖어서 기분 나쁜데.”

 

윗옷을 벗었다. 비주얼만큼은 출중한 몸이 빗물을 머금어서 축 늘어져버렸다. 몸에 달라붙은 옷이 피부 위를 기어가듯 끌려올라갈 때 마다 온 몸에서 생기가 빼앗기는 것 같다. 바지는 더 심했다. 피부와 일체가 된 바지가, 살갖에 착 달라붙은 속옷을 함께 끌어내렸다. 중요한 곳을 스쳐 지나가는 불쾌감이 다리 사이를 민달팽이처럼 눅진하게 타 올라왔다. 거대한 민달팽이가, 다리 사이와 가슴 사이를 지나 코와 입을 막아버리고 뇌에 파고들어간 듯 한 불쾌감에 온 몸을 떨었다.

 

“추워?”

 

“그런 것 같네. 미안한데 따뜻한 차라도 타 줄래?”

 

“응!! 차♪를♬타♩야♬지♪”

 

카나는 즉흥적인 노래를 부르며 탈의실을 나갔다. 이번엔 빗소리 덕분인지 창문이 깨지지 않았다. 오히려, 카나의 끔찍한 노랫소리가 몸에 들러붙은 민달팽이 같은 불쾌감을 날려주었다. 지금만큼은 폭음룡의 폭음파보다 더 강력한 카나의 노래에 감사할 수 있다. 상쾌해진 기분에, 미리 준비해 둔 새 옷을 입었다. 젖은 옷은 가방 속에 넣었다.

 

“아…..”

 

그리고, 가방 속에 참고서와 공책이 있었다는 걸 직후에 떠올렸다. 급히 옷을 꺼내고 공책과 참고서를 꺼냈다. 역시 젖어버렸다. 내 가방은 비를 제대로 막아주지 못했다. 하루카 선배가 협찬으로 받은 가방은 방수가 된다고 들었다.

 

“으으으…..”

 

가방에 붙인 나비 마크가, 765프로덕션의 시어터조를 상징하는 나비 마크가 빗 속에서 색이 바랜 것 같았다.

짜증나.

잠시 사무소에서 공부 좀 하려 했는데 하필 이런 일이.

 

“차 타왔어~ 어라? 무슨 일이야?”

 

“…..하아, 책이 다 젖었어.”

 

“뭐야, 여기서 공부하려 했던 거야?”

 

“당연하지. 기껏 왔는데 시간낭비할 수는 없지.”

 

트레이닝 전 까지 시간 낭비를 즐기던 내가 할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조금 말리면 가방의 색도 돌아올까.

 

 

--

 

 

켜 놓은 드라이기 앞에, 오늘 쓸 예정이 없는 책을 가방과 함께 펼쳐놓았다. 창문을 후드려 물로 수놓는 빗소리의 박자가, 베이스 같은 드라이기 소리와 미묘하게 어긋나 신경을 날카롭게 갈아버린다. 신경질적으로 집중하기엔 딱 좋은 정도다. 신경에서 잡념을 긁어내고, 공부에 집중한다.

 

“여기 녹차.”

 

카나가 차를 타 왔다. 입에 갖다대자, 비 속에서 차가워진 몸이 누그러들며 뱃 속에서부터 따스해지기 시작한다. 카나가 날 보며 싱글벙글 웃는다. 평소 마시는 것 보다 조금 따스한 차에 감사인사를 건낸다.

 

“고마워. 덕분에 공부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아.”

 

학생의 신분으로서 교육받을 권리와 의무는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다. 종종 가혹한 노동이 세간의 화두가 되는 이 시대인만큼, 제대로 쉬지 못하는 아이돌들에 대한 이야기도 종종 화두가 되고 있다.

지금 참고서에 나오는 내용도 그 부분을 다루고 있다. 과로라는 건 역사적인 현상이라는 거다. 과로라는 것이 질병이나 사인으로 취급받기 시작한 건, 그 역사가 의외로 길지 않았다. 지금의 나와는 관계 없는 이야기지만, 나중을 위해서라도 자세한 내용을 미리 알아두는 게 좋으려나.

 

“아~ 그나저나 요즘은 한가하네~”

 

“봄 철에 비하자면 말이야. 하지만 그 때도, 선배들에 비하자면 우린 상당히 한가했던 편이었어.”

 

“그야 어쩔 수 없지. 그 때 선배쨩들, 엄청 바빴으니까. 우리랑 같이 현장 뛰던 거 끝나자마자 바로 다음 현장으로 이동하고…..”

 

“문부과학성인지 후생노동성인지 하는 곳 사람이 사무소까지 왔을 땐 볼만했지.”

 

나도, 카나도 상당히 바빴지만 선배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정말로, 일이 끝이 없었다. 평범한 우리들도 방과 후에는 아이돌! 같은 게 아니라, 학기 초부터 학교를 빼먹는 게 일상다반사일 정도였다. 그리고 빼먹은 분량만큼 사무소나 현장에서 틈틈히 보충까지 했다. 현대 일본의 청소년 및 아동노동 실태에 대해서 고찰하는 시사고발 프로가 나와도 좋을 정도였다…. 고 생각한다.

어찌되었든 난 수업일수나 성적이 부족하진 않았다. 그 만한 일도 없었고.

 

“선배들 따라가는 일은 당분간 없을까?”

 

“장마 끝나기 전까진 없겠지.”

 

“그럼 그 동안 쉬어둘까~ 후우….”

 

속편하기도 하지. 이쪽은 오늘도 트레이닝인데. 원래 있지도 않은 트레이닝 일정을 부탁해서 끼워넣었을 정도인데.

 

카나는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파 한 구석에 기대선 기지개를 피곤 누워버렸다. 내 친구지만, 이럴 때 보면 정말 인생 편하게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생에 관해 논하기엔 아직 어린 나이지만, 이 업계에서 빛나는 건 대체로 어른보다 어린아이들 쪽이다. 8~90년을 살아가는 인간의 생에서 보자면, 꽤나 이른 황금기다.

어쩌면 황혼기일지도 모른다. 한 철 장사다.

 

아아, 집중집중. 하지만 한 마디만.

 

“……시간이 있으면 공부라도 하지 그래?”

 

“음, 난 벌써 할 거 다 끝내놨어.”

 

“그래.”

 

살짝, 아주 살짝 카나의 일정표를 보았다. 내 일정표보다 공백이 조금 더 많았다. 학생의 본분에 충실할 시간은 나오는구나, 라고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불쾌감이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긁어낸다. 고장난 텔레비전 같은 소리가 창문을 두들기고, 너무 뜨거워진 드라이기 소리에 집중력이 말라 비틀어진다. 집중, 집중. 더 이상 바깥에 신경쓰지 마. 트레이닝도 공부도 진지하고 엄격하게.

스스로에게 과제를 부여하듯, 하지만 어째서인지 스스로의 발을 재촉한다.

 

“……..”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신경을 건드리던 드라이기를 껐다. 카나의 숨소리가 들려 소파를 쳐다보니, 그녀는 어느 새 세상 모르겠다는 느긋한 표정으로 자고 있었다.

 

“어휴, 보이스 트레이닝이라도 좀 받지.”

 

카나의 노래는, 친구인 나로서도 어떻게 실드를 쳐 주지 못할 정도로 엉망진창이다. 학교 취주악부에서 클라리넷 담당으로 스카우트를 받을 정도면 재능이랑 실력은 있다는 뜻인데, 왜 그걸 살릴 생각을 안 하고 음파병기로 남아있는 걸까. 어째서. 카나의 기본적인 실력과 기량은 내가 동경하는 치하야 선배도 인정하고 있는데. 어째서.

 

…..난 다시 한 번 가슴을 쓸어내렸다. 불쾌하다.

 

“……그러고보니까 카나는 오늘 왜 온 거지? 일정 비었을 텐데.”

 

프로듀서는 오늘 외근이라, 이 시간에 온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코토리 씨는 며칠간 휴가를 내었다. 선배들은 각자 일하러 나갔고, 우리 시어터 조는 한가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나처럼 트레이닝 하는 김에 공부도 하려고 온 사람을 빼면 출근했을 리가 없다. 그럼 왜?

 

“…..집에 가서 공부하자.”

 

젖은 옷을 비닐에 싼 다음에 가방에 집어넣었다. 어느 새 잠든 카나를 뒤로한 채 사무실을 나서려는 순간, 마치 당장 나가라는 듯 사무실 문이 세차게 열렸다.

 

“시즈카.”

 

“시호.”

 

모가미 시즈카였다. 종종 부딛히는, 그런 관계다. 불행 중 다행으로, 지금 나에겐 다툴 만한 기력은 없었다. 그럴 만한 정신력도 없었다. 다만 신경질적인 짜증만이, 평소에도 다투는 그녀를 보자마자 섬광처럼 머리 속에서 번뜩였다.

번쩍이고, 잠시 후 하늘이 울린다.

 

“오늘 아무 일정 없는 거 아니었어?”

 

“리츠코 프로듀서한테 부탁해서, 트레이닝을 조금 받았어. 시즈카는?”

 

“트레이닝이랑 일. 시간이 좀 남아서 공부나 하려고 사무실에 들린 거야.”

 

“그래? 알았어. 수고해. 난 이만 가 볼께. 트레이닝 열심히 받고.”

 

“수고해. 말 안해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젖은 히비키 선배 꼴이 된 시즈카에게서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집에 있으면 왠지 공부가 안 될 것 같다고 말한 오전의 자신과, 여기선 공부가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한 오후의 자신은 다르다. 적어도 지금은 한가하진 않다. 하지만 계절에 맞는지 아닌지 판단하기 애매한 식은땀이 이마와 뺨을 가로질러 흘러내렸다. 곧 비 속에 섞여 사라졌다.

가방에 찍힌 나비 무늬는 여전히 빛바랜 채.

 

 

--

 

 

“그러니까, 감기 안 걸렸다니까.”

 

[에에~ 이럴 땐 감기에 걸려야 하는 거 아냐? 그런 게 클리셰라는 거잖아.]

 

“클리셰라니 무슨….. 아무튼 난 멀쩡하다고.”

 

다음날.

오늘은 사무소에 가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도 사무소로 나온 카나는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전화하자마자 감기에 안 걸렸는지 물어보길래 걱정해주는 줄 알았다. 감동과 감사가 배신당하기까진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래? 감기 걸려가지고 안 나온 줄 알았는데…..]

 

“나라고 항상 사무소에 있는 건 아냐…. 것보다, 오늘은 딱히 트레이닝도 일정도 없다고. 카나야말로 왜 거기 있는 거야?”

 

카나는 오늘도 딱히 일정이 없었을 터. 그런데도, 그녀는 사무소에 있다. 혹시 나처럼 별도로 트레이닝을 신청한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혼자서 학교 뒷산에서 노래 연습을 한다는 거면 또 모를까, 일부러 트레이닝을 받으러 나올 것 같진 않다. 그럴 거야. 틀림없어.

 

[오늘 아카바네 프로듀서가 공부 봐주기로 했거든. 지금 시즈카랑 같이 공부중이야.]

 

시즈카가, 있는 건가. 사사건건 나와 부딛히는 그 여자가.

 

“아아… 프로듀서, 오늘은 사무실에 있구나. 시즈카도 공부 때문에 온 거야?”

 

[아니, 이따가 일 있다고 해서 미리 온 거야. 하는 김에 공부도 하는 중이고. 시호는 지금 뭐해?]

 

학교가 다르니 같이 공부하는 것도 나쁜 방법은 아니다. 서로 성적 가지고 경쟁할 일은 없으니.

하지만, 가지 않는다.

 

“혼자서 공부중.”

 

전혀 진도가 나아가지 않은 참고서를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라고? 빗소리 때문에 잘 안 들려.]

 

“공부중이야.”

 

이번엔, 약간 신경질적인 높은 톤. 마치 예전의 치하야 선배와 닮았다는 평가를 받은, 그런 톤. 시즈카가 기분 나쁘다고 했던 그 어투.

 

[수고~ 너무 무리하진 마~]

 

날카로운 목소리는, 지금도 내 방 창문과 사무소 창문을 두들기는 빗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속도 편하네. 알았어. 이만 끊을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끊어버렸다. 끝없는 빗소리만 계속 귓가를 맴돌고 있다.

 

“……”

 

거실로 내려와 TV를 틀었다. 고장난 텔레비전 소리 속에선 공부가 되지 않았다. TV에선 마침 어제 보던 다큐멘터리의 후속편을 방영하고 있었다.

 

[나비의 생을 살펴보죠. 나비 애벌레 알에서 깨어난 후, 자기가 태어난 알껍질을 먹은 다음 풀잎을 갉아먹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계속, 계속, 끝없이 먹기만 하죠. 이런 애벌레들은 다른 포식자들의 훌륭한 먹이가 됩니다. 예를 들자면, 저기 날아오는 새나, 저 밑에서 기어오는 개미들 말이죠. 생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이 애벌레들은 전멸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먹다 말고 도망치느라 여념이 없네요.]

 

…..봄 동안은, 바빴다고 생각한다. 트레이닝을 할 여유는 얼마 없었고, 학교도 종종 빠졌다. 가끔씩, 밤 늦게까지 일한 날은 페이가 세게 나왔다. 그 추가 페이를 가지고 산 게 어제 수난을 당한 가방과 참고서였다. 선배들은 따로 돈 주고 사진 않았다. 참고서도, 가방도 협찬이나 선물로 들어왔었다. 개 중에는 우리에게 돌아온 것도 있었다. 아즈사 선배에게 란도셀이랑 동화책 세트를 보낸 놈의 화상은 대체 어떤 꼴일지 보고 싶기도 했다.

 

[다른 나비가 낳은 알을 보러 가죠. 이 나비의 애벌레들은 태어날 때부터 괜찮은 생존 기술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나무 위에서 편안하게 식사를 즐기던 애벌레들은, 적이 나타나자마자 자신의 몸을 나무 아래로 내던집니다. 이렇게 해서 천적들을 피하는 거죠. 물론 애벌레는 가느다랗지만 강한 줄을 뿜어 자신을 지탱하고 있으니 바닥에 떨어질 일은 없습니다. 방금처럼 운이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요. 바닥에 떨어진 애벌레 시체는 곧 개미들의 먹잇감이 됩니다.]

 

다큐멘터리는 담담히 애벌레들의 죽음을 읊어간다. 수 많은 이유로, 나비 애벌레들은 아름다운 나비가 되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이번 한 번 살아남았다고 해서, 모두 성충이 되어 짝짓기를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지난 화에서도 말했다시피, 짝짓기 또한 수 많은 경쟁을 뚫은 일부 개체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죠. 이들에게 있어서 황금기란, 결국 수 많은 형제자매들을 이기고 올라와야 하는 시련까지 부과된 힘든 노년기입니다.]

 

우린, 피어날 수 있는 걸까.

그런 것을 고민하기엔, 여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진지하게 임하는 만큼,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에 초조하게 쫒겨간다. 말 없이 채널을 돌렸다.

 

[…..오늘 해체식을 가진 아이돌 그룹은 예전에 인기곡을 낸 후,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다 오늘 해체식을 가졌습니다. 다음 뉴스입니다.]

 

이름모를 아이돌 그룹의 해체식이 부고처럼 가볍고 짧게 지나갔다. 곧이어 뉴스는 아이돌 그룹의 생사보다 훨씬 더 중요한 시사문제를 사뭇 진지하고 무거운 분위기로 다루기 시작했다. 정치가 어떻니, 경제가 어떻니 하는 이야기에, 다시 채널을 돌렸다. 뉴스나 시사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 걸 보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내일, 트레이닝이지.”

 

당분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편하겠지. 하지만, 시즈카는 어제도 오늘도 일이 끊이질 않는다.

어제 훔쳐본 일정표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 일정표엔 백지가 남들보다 조금 더 많았던 것 같다.

 

 

--

 

 

“거기까지!”

 

리츠코 프로듀서의 구령이 떨어지자, 모두 그 자리에 멈춰 주저앉았다.

 

“시호, 동작이 늦어. 그리고 음정도 흔들리고.”

 

“죄, 죄송합니다……. 하아, 하아…..”

 

오늘, 가장 지적을 많이 받은 건 나였다. 비주얼은 충분하지만 보컬과 댄스 실력이 부족하다는 건 치명적인 단점이다. 부족한 점을 키워나간다는 스토리텔링으로 노선을 잡을 수도 있다고 프로듀서 둘은 말했지만, 스스로 납득할 수 없었다.

조금 더, 완벽에 가깝게. 하지만 지금은 너무 멀다.

 

“몸 안 좋은 거 아냐?”

 

카나가 기어와서 물어보았다. 애벌레처럼, 몸을 꿈틀거리면서.

 

“아냐, 괜찮아….”

 

목소리에서 힘이 빠진 건, 단지 지쳐서만은 아니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땀이 바깥의 비처럼 쏟아지고, 우리들의 몸에서 나온 열기가 구름처럼 떠올랐다.

 

“그래? 평소답지 않게 기운이 없는데?”

 

시어터 조의 동료들도 같은 생각인 지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감기 걸린 거 아냐? 그저껜 완전히 챌린지 마치고 온 히비키 꼴이었잖아.”

 

“본인 앞에서 너무해….. 자신, 요즘은 코시미즈 사치코랑 듀오 취급당하고 있다고….”

 

“극우파 취급당하는 미키보단 낫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저께 라디오에서도 그거 가지고 놀려대길래 진행자 얼굴에 주먹밥을 던져준 거야.”

 

“저도 고정 코너 하나 있으면 좋을텐데…. 히비키 챌린지 같은 거라도 괜찮으니까.”

 

“왜 자신이 기준이 되는 거야…..”

 

“그야 히비키니까?”

 

“우와, 하루카가 새카매.”

 

“항상 그렇지 않나?”

 

“자, 잠깐 마코토 무슨 소리를…”

 

“아니야. 하루카는 이럴 때만 새카매. 어째서 하루카가 리더인 걸까?”

 

“치하야 너마저!!”

 

어느 새, 다들 날 두고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메이크도 안 한 데다가 땀 범벅이 된 모습은 아름답다곤 할 수 없지만, 여기서 이야기하는 모두는 마치 피어나기 직전의 번데기, 혹은 이미 피어나버린 나비처럼 보였다.

 

나만이 아직 꿈틀거리고 있었다. 홀로.

피어나지도 않은 나비는, 벌써부터 동족들간의 경쟁에서 밀려나가고 있다.

 

“좀 쉬는 게 어때? 시호 너, 진짜로 안 좋아 보인다고.”

 

“괜찮아.”

 

시즈카가 말했다. 그러니까 더더욱 쉴 수 없다. 적어도 눈 앞에 있는 사람들만큼은 뛰어넘어야 한다. 잎을 갉아먹고, 덩치를 불리고, 날개를 키워, 더 화려한 색이 되어야 한다. 적어도, 시즈카만큼은 뛰어넘어야 한다.

 

“조금 더 연습하면, 괜찮아질 거야.”

 

“아니, 지금 몸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시즈카도 지친 건지, 내 쪽을 향해서 애벌레처럼 기어온다. 민달팽이가 기어오르는 듯 한 혐오감에, 무심코 몸을 뒤로 빼냈다. 땀과 땀이 찰싹 소리를 내며 무언가에 달라붙었다. 황급히 몸을 떼어내다, 앞으로 굴러 넘어졌다.

 

“시호, 괜찮아?”

 

리츠코 프로듀서였다.

 

“안 괜찮은 거야! 미키도 휴식을 원하는 거웁웁” “미키, 조용히해.”

 

하루카 선배가 미키 선배의 입을 막고 눌러버렸다.

 

“몸 안 좋아 보이는데 오늘은 쉴래?”

 

아키츠키 리츠코. 한 때 나비처럼 화려했고, 지금은 그 자리에서 내려온 사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아이돌이 되었던 사람은, 내려온 지금도 무대를 잊지 못해서 종종 현장에 나서곤 한다. 펑크가 나서 대처할 사람이 없다는 건, 어디까지나 핑계에 불과하다는 걸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저렇게, 빨리 끝나고 싶지 않다.

 

“괜찮아요.”

 

저렇게, 화려하게 날아보고 싶다.

 

“음…. 안 괜찮아 보이는데, 조금 쉬는 게 어때?”

 

시즈카가 사뭇 걱정되는 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알고 있다, 걱정 같은 건 스스럼없는 진짜 마음을 숨기기 위한 가식일 뿐이다. 나비는 조금 떨어져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 접사해서 보면 곧바로 괴상한 겹눈과 기분 나쁘게 생긴 입과 몸통을 드러내버린다. 남이 뒤쳐지면, 그만큼 안심한다. 화려하게 빛나는 나비는 결국 곤충에 불과하다.

이 짧은 한 철 장사에선, 동료는 가까이 있는 라이벌이다. 서로 써먹을 수 있기에 같이 손을 잡고 있을 뿐이다. 나비 문양이 어울리는 관계다.

 

“괜찮다니까!”

 

그래서, 큰 소리를 질러버렸다.

 

“잠깐 너, 사람이 걱정하는데 그게 뭐야?”

 

“몇 번이고 말했잖아. 그러니까, 각자 할 일이나 신경쓰자고.”

 

“시호 너….. 요즘 일 없었다고 우울증이라도 온 거야?”

 

“우울증? 감이 떨어진 걸 보니 너야말로 좀 휴식이 필요한 것 같은데?”

 

“이게….! 누가 할 소린데!!”

 

나와 시즈카는 거의 동시에 바닥을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거기 둘, 오늘은 쉬어.”

 

동시에 서로를 향해 넘어졌다.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울린다, 한 순간의 충격이 지나자, 의식은 폭우 속에 휩쓸려 사라졌다.

 

 

--

 

 

[나비는 인간이 보기에 아름다운 모습 때문에, 인간으로부터 싸움과는 멀다는 오해를 종종 사곤 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정 반대죠. 나비들은 서로 치열하게 싸웁니다. 왜 싸울까요? 먹이 때문일까요? 짝짓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나비들은 햇빛이 잘 드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웁니다. 나비는 햇빛을 쬐는 것을 좋아하고, 다른 나비가 자기 ‘영역’을 침범했을 경우 격렬한 공중전을 벌입니다. 멀리서 보면 화려하고 아름다운 나비가 어울려 춤을 추는 것 같지만, 사실은 곤충의 본능을 한껏 살려 날아다니는 곤충답게 싸우고 있는 거죠.]

 

하지만, 곤충은 결국 약자이다. 어제 TV를 보면서 한 생각이다.

그러니까, 결국 난 스스로를 감추고 허세를 부린 셈이다.

 

“일어났어? 걱정했다고.”

 

“여긴…..”

 

“트레이닝 룸 옆 의무실. 쓰러진 원인은 둘이 부딛히면서 생긴 가벼운 뇌진탕. 시간은….. 쓰러진 지 한 5분쯤 지났나? 아마 네가 깨어난 지 3분 정도 지난 것 같은데.”

 

리츠코 프로듀서가 내가 알고 싶어하던 모든 것에 대답했다. 정신을 잃고 들어올려지자마자 바로 깨어났다는 건 그냥 모르는 척 하며 입 다물고 있어야겠다. 아니, 어쩌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리츠코는 귀신이니까.

 

“어차피 둘 다 일어나 있을 테니까, 조용히 머리 식히고 있어. 난 다른 아이들 트레이닝 시키고 있을 테니까. 참고로 너희 둘은 나중에 보충이야.”

 

그렇게 말하고, 리츠코 프로듀서는 의무실을 나섰다. ‘슬슬 우리 사무소도 트레이닝 룸 빌려쓰는 건 졸업해야 할 텐데….’라는 말을 하는 리츠코 프로듀서의 모습에, 무심코 웃어버렸다.

….내가 웃은 거, 눈치 못 챘겠지?

 

“……일어났지?”

 

스마트폰에 붙인 나비 모양 스티커를 바라보고 있자니, 저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온다. 솔직한 건지, 염치가 없는 건지. 하지만 나보단 나으리라.

 

“일어났어.”

 

그래서 대답했다.

역시라고 해야 할까, 그녀도 일어나 있었다. 애초에 심한 부상이 아니라, 서로 머리를 부딛혔을 뿐이다. 개그만화 같은 웃기는 일일 뿐이라, 서로 웃어넘길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이 부딛혀 버렸다면 웃어넘길 수 없다. 나비 가면을 벗어던지고, 추한 벌레 둘이 부딛혀 버린 거다. 날개짓하는 나비들의 공중전처럼 화려한 듯 보이면서, 실상은 고작 햇살 같은 흔해빠진 걸 위해 싸우는 것이다. 그것이 소중한지 아닌지는 관계없이.

 

“일.”

 

“응?”

 

“쉬었잖아. 난 이제 한가하게 쉴 거고. 넌 벌써 여름부터 일거리 예약이 넘칠 정도고.”

 

자신의 꺼림칙하고 추한 모습을 솔직하게 인정하느냐, 아니면 그것을 동료애로 숨기고 미소를 짓는가. 키타자와 시호와 모가미 시즈카의 차이는 그 정도라고 생각한다.

 

“흥, 그쪽이야말로 시즌 오프인 주제에 실컷 벌어놓고선.”

 

“그 만큼 트레이닝이 부족하다고. 여름엔 다들 바빠서 트레이닝 일정 잡기도 쉽지 않고.”

 

동료들의 발목을 잡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사실은 동료들을 다 제치고 뛰어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나, 모가미 시즈카다. 어차피 같은 곤충의 마음을 가졌다면, 솔직한 쪽이 차라리 낫지 않을까.

 

“그래서, 몸은 괜찮아?”

 

“괜찮다고 몇 번이고 말했잖아. 그냥, 신경쓸 게 많아서 좀 안 좋았을 뿐이야.”

 

단순히 신경쓸 일 때문에 흔들렸던 걸까? 아니면 진짜 아팠던 걸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 문제다. 중요한 건, 시호의 상태를 보고 걱정했던 나는, 사실 시호보다 조금이라도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서 기뻐하고 있었다는 거다.

솔직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추악할 정도다. 남과 자신을 비교해서 자신보다 못하면 안심하며 날개를 접고, 자신보다 나으면 질투에 불타 날개짓한다. 하루하루, 매일매일, 남과 자신을 비교해서 우열을 가리는 것 만큼은 노력을 거르지 않는다.

그래놓고선 결국 동료애. 이래서야, 시호가 싫어할 만 하다. 차라리 조금 솔직했으면 하지만, 결국 난 오늘도 나비 모습 가면을 쓴다. 스마트폰에 붙여놓은 나비 모양 스티커가 조금 떨어졌다. 손가락으로 눌러서 붙여보지만, 이미 갈라지고 떨어진 스티커는 그 부분만큼은 붙질 않았다. 이대로, 점점 뜯겨갈 뿐이다. 언제까지 이 가면을 쓸 수 있을까.

 

“…..예약이 잔뜩 쌓인 여름철 일이라도 신경쓰고 있던 거야? 부럽네. 솔직히, 부러워.”

 

“…..시즈카, 어디 안 좋아? 아픈 거 아니야? 쉬는 게 어때?”

 

일단 베게를 던졌다.

 

“후캬악!!”

 

스마트폰이 손에서 빠져나가고, 손가락이 스티커의 약간 갈라진 부분을 쭉 긁고 지나갔다. 불길한 감각에 급히 고개를 돌렸다. 직후, 베게가 내 관자놀이에 정확히 명중했다. 침대 위에서 휘청거리며 본능적으로 베게를 잡아

 

“죽어어어어!!!!”

 

돌격했다.

 

“와 봐!! 우동 면발처럼 불어터지게 해 주마!!”

 

“너!! 넌 방금 넘어선 안될 선을 넘었어!!”

 

손목 스냅을 이용해 후려치고, 반동을 써서 방어에서 공격으로 이어간다. 나도, 시호도 액션 연기를 할 때 배운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멋진 기술로 베게를 휘두르며 한다는 짓이, 눈 앞의 곤충을 때려잡는 거다.

 

“비랑 같이 우동 먹는 일거리가 들어와서 참 행복하시겠습니다!”

 

시호가 힘과 무게를 한껏 담아 베게를 내려찍는다. 내 얼굴에 세로로 정확히 박혔다.

 

“여름 동안 수영복 일이 쌓이고 쌓인 누구보단 낫지!!”

 

베게를 가로로 크게 휘둘로, 시호의 턱을 날려버렸다. 고개가 옆으로 확 돌아가는 게 웃기다.

 

“어차피 금발우익모충이랑 가슴이랑 엉덩이에 묻어가는 거라고!!”

 

시호가 몸을 멋지게 회전시켜 내 엉덩이를 베게로 날려버렸다.

 

“누구는 좋아하지도 않는 라면 억지로 먹으러 가는데 어디서 불만이야?! 너 한여름에 돈코츠 먹어볼래?!”

 

엉덩이를 치느라 낮아진 시호의 몸 위에 베게를 계속 꽂아넣었다. 뒷통수에도 몇 발 박아주었다.

 

“니가 먹고 찌면 일거리는 반이 되겠지!!”

 

위에서 쏟아지는 베게 세례를 막으며, 시호가 몸과 베게를 앞세워 내 배를 몸으로 밀어버렸다.

 

“니 여기 들어와서 합숙 첫날부터 하루카 선배한테 어당리 드립 친 거 폭로해줄꺄아악!!!”

 

결국 침대 위에 둘 다 사이좋게 넘어져버렸다. 침대 위에서도 서로 마운트 포지션을 차지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위를 노리기 위해 정말 사이좋게 뒤엉켰다. 서로 온갖 추잡한 욕을 해 가며 위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하아….” “허억….”

 

사이좋게 침대에 반쯤 걸친 채로 누워버렸다. 침대 매트리스가 푹신해서, 무심코 잠들어버릴 것만 같다.

 

“너어….”

 

“왜에….”

 

“왜 나보다 잘 나가는 거야….”

 

“너야말로…. 왜 나보다 인기 많아….”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면서, 참 지리멸렬한 소리나 해대고 있다. 그만하자, 라고 한 마디만 하면 될 것을, 그건 죽어도 싫다고 서로를 노려본다. 나비는 적어도 따스한 햇살을 위해 서로 싸우기라도 하지, 이건 곤충보다도 못한 꼴이다.

곤충 같은 서로의 민낮을, 정말 웃기지도 않는 꼬라지로 드러내버렸다. 추잡함을 뛰어넘어 골계미가 느껴질 정도다.

 

“……”

 

“……”

 

그렇게 서로를 노려 보길 수십 초, 이젠 지기 싫어서 그냥 서로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다. 사실은 이런 수준낮고 지리멸렬한 싸움 당장 그만두고 싶지만, 나비 가면을 뒤집어써서 솔직한 마음을 꺼낼 수가 없다.

 

“야.”

 

시호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혹시 나보다 인격적으로 더 뛰어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화해를 시도하는 걸까.

 

“왜.”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비처럼 아름다운 가면을, 시어터를 상징하는 나비 문양을 얼굴에 뒤집어써도 그 속에 있는 벌레는 언제나 나올 기회만을 노린다. 어쩌면, 남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 하고 걱정해버린다. 스스로를 내놓을 타이밍을, 두려움 속에서 냉정하게 계산하는 본능을 볼 때마다 구역질이 치솟는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싫어서, 남의 성공에 질투하는 자신을 동료애로 덮어버리고 시선을 돌린다.

그런데, 시호는 나보다 솔직한 주제에 이제 와서, 나보다 더 마음씨 넓은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려는 건가? 나보다 가슴이 크다는 걸 자랑이라도 할 생각인가?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호.”

 

“죽여버린다.”

 

“해봐.”

 

시호는 비웃는 듯 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내 쪽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나도 그걸 기회로 삼아 시선을 거두었다.

 

“…..”

 

“……”

 

그리고, 침묵.

불편하고, 어색하다.

 

저기, 라고 한 마디만 하면 될 것을. 그 한 마디를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다. 시호도 나와 똑 같은 생각일까? 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남들보다 치졸하지 않다는 근거를 마련하며 안심하는 마음에선 치졸함 이외의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 그렇다면.

차라리

 

 

--

 

 

먼저 말을 걸자.

좀 더 마음이 넓어 보이기 위해.

절대로 친해지거나 사과하거나 하기 위해서는 아니야.

 

“저기” “저기”

 

그런데, 이 년은 왜 또.

게다가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아무것도” “아냐…..”

 

“왜, 계속해봐.”

 

“에, 꺄악!!” “꺄아아아얏!!”

 

리츠코 프로듀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타이밍에.

정말 멋질 정도로 같은 타이밍에 완벽하게 동시에 일어나, 다시 한 번 서로의 머리를 박아버렸다.

 

“저기저기, 릿쨩. 지금 들어가는 건 역시 좀 그렇지 않을까?”

 

“나도 같은 생각인데…. 둘이 좋아 보이는데 눈치없이 들어가는 것도….”

 

우리가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을 굴러다니는 동안, 마미 선배와 아미 선배가 리츠코의 뒤에서 나타났다. 둘 뿐만이 아니다. 지금 한창 트레이닝을 받고 있어야 할 사람들이 전부 복도에서 우리 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아아, 그것도 그렇네. 침대 위에서 뜨겁게 엉키고 설키면서 뒹굴고 있었는데 들어오는 것도 실례지. 미안했어. 둘이 좋은 시간 보내.”

 

잠깐, 설마….

 

“아, 아니에요!! 이건 그런 게 아니에요!! 리츠코 프로듀서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에요?!”

 

“미키를 우익이라고 불렀으니까 그 정도는 각오해야 하는 거야. 이 가위치기’s”

 

“그, 그러니까 오해라고요!! 미키 선배!! 저랑 시즈카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니까요!! 시즈카 너도 뭐라고 말좀 해봐!!”

 

얼굴이 시뻘개져선 시즈카를 재촉했다. 설마 여기서 날 엿쳐먹이려고 하지는 않겠지? 아니야. 그러진 않을 거야. 분명해. 여기서 날 그런 취향으로 몰아버렸다간 자기도 그런 취향이라는 걸 인정하는 꼴이잖아. 서로 선은 넘지 말자고.

 

“가위치…. 기? 그게 무슨 뜻인가요? 혹시 시호는 무슨 뜻인지 알고 있어?”

 

“사람을 가슴이랑 엉덩이로 부른 만큼, 상당히 조숙한 게 아니온지… 우후후…”

 

“꺄아아아아악!!! 시즈카 너어!!!”

 

“나, 나는 정말 무슨 뜻인지… 푸훕. 푸후후후후….. 아하하하하!! 가위치기래! 난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시호는 무슨 뜻인지 아나봐?”

 

“야!!”

 

좀 더 마음이 넓어 보이기 위해?

절대로 친해지거나 사과하거나 하기 위해서는 아니야?

아 몰라, 일단 요 지지배만큼은 눌러놔야겠어!!

 

“레이카도 아니고 웃어? 어?! 웃겨? 웃기냐고!!”

 

“조숙하지도 못하고 남들 깎아내리기는 선수고, 하지만 저는 동료를 믿고 있답니다? 당신 같은 사람도 마음 속 한 구석에선 동료를 소중히 여기고 있을 거라는 걸.”

 

“이게에!!”

 

노골적으로 날 놀려대는 시즈카에게 달려든 순간 몸이 공중에 떠 버렸다. 시즈카의 팔다리와 내 팔다리가 공중에서 버둥거린다. 목 뒷덜미를 잡힌 듯한 감각이, 분노를 부유감과 약간의 공포로 덧칠해간다.

 

“마코토, 나이스 그랩.”

 

“일단 이 둘은 트레이닝 룸에 다시 던져두면 되는 거지?”

 

“응. 정말이지 둘 다 솔직하질 못하다니까.”

 

동조하는 듯 한 동료들에 웃음소리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서로를 노려보는 걸 멈추지 않는다.

 

“나, 너 마음에 안들어.”

 

“누가 할 소린데.”

 

그리고, 솔직하지 못한 말을 내뱉어버렸다.

이것이 솔직한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모른다. 장맛비가 우리의 모습을 보고 웃는 건지 창문을 세차게 때린다. 아직 하늘은 먹구름에 둘러쌓여서, 갤 것 같지가 않다.

 

 

--

 

 

하지만 폭우와 먹구름 속을 헤메는 마음에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앞으로도, 난 동료와 자신을 비교하고, 동료에게 질투하며 살아가겠지.

 

 

 

 

 

 

 

 

 

 

그리고, 찢어진 나비 가면을 기워서 쓰고 다니는 사람이 나 말고도 한 명은 있다는 걸, 그 사람에게 고맙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말할까 보냐, 그런 거.

 

 

---

 

세잎!!!!

시호는 어당리를 뛰어넘는 인성을 증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765 시어터즈의 유대인 것이다!!

나비 하면 765 시어터즈를 상징하는 문양 아니겠습니까. 자세한 건 언젠가 쓸 후기에 남기죠. 아 후기는 31일 내에 쓰라는 제한 없죠? 우선 오늘 이벤부터 한 판 돌아야 하는데.....

 

p.s 퇴고 전의 물건을 실수로 잘못 올려서 조금 수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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