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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일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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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5-29, 2017 19:25에 작성됨.

안녕하세요. 아마미 하루카입니다. 

오늘은 '그 사람'에게서 메일이 왔습니다. 얼굴이나 보자는 내용의.

혹시 바쁘다면 거절해도 좋다는 평범한 문구에서 어째선지 그 사람의 향기가 납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당연히 좋다고 말했습니다.

아마 달리 이유가 있었더라도 수락했을 겁니다.

'오랜만이야, 하루카.'

약속시간 오분 전, 그는 하치코 동상의 아래에서 다가가던 저를 보며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본 그는 조금 달라져 있었습니다. 

수염을 조금 길렀고, 익숙한 양복이 아니라 긴소매 맨투맨 티셔츠에 시어서커 소재의 줄무늬가 들어간 반바지를 입고 새하얀 스니커즈 운동화를 신고 있었습니다.

솔직한 감상으론 그의 나이에는 맞지 않다고 보지만 어딘지 자유로워 보였습니다. 꽉 조인 양복을 입을 때엔 억지로 옷에 맞추고 있는... 그런 느낌이었거든요.

'안녕하세요. 프로듀서씨, 아니 이젠 P씨라고 불러야 하나요?'

'어느쪽이든 상관없어. 하루카가 편한대로 불러. 프로듀서라... 오랜만에 그렇게 불리니까 그립네.'

'벌써 몇년이나 지났으니까요.'

그는 '그러게...'하고 중얼거리곤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한 얼굴로 잠시 어딘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시선을 좇아 저도 그곳을 바라봅니다.

눈에 비치는 것은 거리의 풍경, 그래도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다를 겁니다. 저는 그가 떠올리는 것을 함께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듯 그는 고개를 젓고는 미안하다 사과하며 말했습니다.

'요즘들어 자꾸 옛날 일들이 그리워지는 거 있지. 아무래도 나이를 먹었나봐.'

'후훗, 그렇게 차려입으니까 젊어보이시는 걸요.'

'아니, 이건 내가 좋아서 입은게 아니니까...'

'이오리의 코디인가요?'

그는 겸연쩍게 웃었습니다. 그리고는, 어딘가에 들어가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근처의 조그만 카페에 들어가 각각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아이스 초코를, 그리고 허니 브레드를 하나 추가 주문하였습니다.

'프로듀서씨 그거 생각나나요?'

'뭐?'

'옛날에 로케 현장에서 자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곤 하셨잖아요?'

'그랬었지?'

'그때 제가 그렇게 쓴걸 어떻게 마시냐고 물어봤더니 프로듀서가 뭐라고 대답했었는지 기억하세요?'

'음...'

그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그리곤 아이스 초코를 빨아들이며 대답했습니다.

'미안해. 기억이 안나네. 그래서 내가 뭐라고 말했었는데?'

저는 그 당시 그의 표정, 몸짓, 목소리, 말투를 따라하려 애쓰며 말했습니다.

'~인생보다 달기 때문이야.~ 아, 프로듀서씨 괜찮아요? 손수건 필요하세요?'

저는 콜록이는 그의 뒤로 다가가 등을 살짝 두들겨주곤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주었습니다.

'고마워, 하루카.'

그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습니다. 새하얀 티셔츠의 가슴 부분에 방울방울, 검붉은 얼룩이 졌습니다. 아마 저대로 돌아가면 '키이잇! 잘 안지워진단 말야!'하며 소리치는 이오리에게 크게 혼날지도 모르지만 그런건 제 알바 아닙니다.

'그런걸 잘도 기억하는구나. 큼... 크흠...'

헛기침을 하며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려는 그.

'그러게요. 잘도 그런 부끄러운 말을 하셨었죠.'

'아마 어딘가의 책에서 읽었던 문구 아닐까. 그 시절엔 그런 거에 영향을 크게 받았으니까.'

'그럴까요?'

'맞다니까!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그를 보며 저는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네, 맞아요.' 

그는 들을 수 없게 속으로 중얼 거립니다. 그 때에도 저는 똑같이 그런 부끄러운 말을 잘도 한다고 했고, 당신은 부끄러워하며 최근 읽고 있는 희망의 배신이라는 책에 나오는 문구라며 필사적으로 변명했었습니다. 그저 조금이라도 더 대화를 하고 싶어서 당신을 더더욱 놀리던 제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런 말을 진지하게 할 수 있는게 프로듀서씨의 장점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정말?'

'네, 그리고 이오리도 프로듀서씨의 그런 점을 좋아했잖아요. 톱 아이돌이 되고 갑자기 은퇴선언을 할 정도로 말이에요.'

'그랬었지... 솔직히 그땐 욕좀 많이 먹을줄 알았는데, 결혼식때 이오리의 팬들이 다 같이 모금해서 선물을 보내줬을땐 깜짝 놀랐지만 말야.'

'프로듀서씨에겐 저주에 가까운 편지들 뿐이었지만요.'

'그만큼 이오리를 좋아했었다는 거니까. 오히려 기분이 좋았었어. 제대로 보살피지 않으면 빼앗아가겠다는 식의 격려문구도 있었고 말야.'

'그래서 그 프로듀서씨는 이제 이오리를 잘 보살펴주고 있나요?'

'글쎄... 내가 보살핌 받는 처지랄까...'

쪼옥... 하고 아이스 초코를 빨아올리는 그를 보며, 저 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아 들였습니다. 

역시 그 때의 당신은 옳았습니다. 이렇게나 다니까요.

어느새 날이 어두워지고 우리는 카페를 나와 가볍게 식사를 하고 프로듀서의 단골 바라는 '별헤는 밤'이라는 가게로 향했습니다. 

블루 하와이와 미도리 샤워를 한 잔씩 마시고 이런 저런 칵테일을 마시며, 잡담을 조금 섞은 시간.

...

......

프로듀서는 얘기하고 저는 마시면서 듣는, 그런 흐름이 되었습니다. 거의 대부분 이오리와의 이야기. 그리고 다른 아이돌들의 근황.

'그러니까 히비키는 벌써 애를 셋이나 낳았다고 하더라구. 메일로 사진을 보내줬는데 정말 귀여웠어. 이누미 새끼들이랑 잘 놀던데. 이오리가 자기도 이렇게 귀여운 애기를 낳고 싶다고 하지 뭐야.'

'헤에, 그렇군요. 아, 여기요! 이 추천이라고 적혀있는 밀키붐이란건 뭔가요? 아, 네. 네. 오리지널 칵테일이군요.'

'그거 정말 맛있다고 하더라고. 여자들이 정말 좋아해. 이오리도 자주 마시고.'

'그런가요? 그럼 이걸로 한잔 주세요. 프로듀서 혹시 미키 얘긴 들었어요?'

'아, 이번에 A급 배우인 하리타 쥬우랑 결혼한다고 뉴스에서 봤어. 깜짝 놀랐다니까.'

'왜요? 그렇게나 프로듀서를 허니라고 부르면서 따라다녔었는데. 이제와서 결혼한다니까 아쉬워서요?'

'그럴리가 없잖아! 농담으로라도 그런 얘긴 하지 말라고. 이오리가 듣기라도 했다간 위험하니까.'

조금 들어간 술때문이었을까요? 마치 이오리가 어딘가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사방으로 시선을 옮기는 모습에 어쩐지 쓴웃음이 나왔습니다.

자신의 농담이 통했다고 생각해서인지 프로듀서는 한결 높아진 목소리로 갓 나온 밀키붐을 홀짝이는, 아. 이거 달고 좋네. 홀짝이는 제게.

'사실 오늘 하루카를 만난다고 하니까 이오리가 막 걱정하지 뭐야.'

'헤에...?'

어쩐지 말꼬리가 늘어지고 몸이 가볍습니다. 아무래도 조금, 아니 어쩌면 많이, 취한 것 같습니다. 이럴땐 언제나 기분이 좋은 저와, 그런 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오리가 뭐라고 했는데요...?'

'응? 하루카. 취한 거야? 조금 이상한데.'

'지금!'

저는 카운터를 탕! 내리치며 외쳤습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무언가가 끓어올랐습니다.

'그런게 중요한가요? 이오리가 저한테 뭐라고 했냐니까요!'

'아니, 그게 별 얘기 아니었는데...'

'별 얘기 아닌데 왜 꺼내신건데요! 그렇게 자랑하고 싶었어요? 솔로 앞에서 염장질이 그렇게 좋아요? 아니면 자기가 얼마나 행복한지 얘기하고 싶었던 거에요? 뭐든지 이오리. 이오리. 이오리 얘기가 아니면 할 얘기가 없는 거에요? 좀 더, 뭔가 다른... 저하고 할 만한 그런 얘기는 없었던 거에요?'

마지막에 가선 거의 울먹이듯이 얘기했습니다. 어쩐지 수도꼭지가 터진 것처럼, 감정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눈 앞이 뿌옇게 흐려집니다. 하면 안될 말까지 해버린 것 같은데. 그래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잠시 조용히 있던 프로듀서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합니다.

'아니, 그게... 하루카가 아직까지 솔로인줄은 몰랐지 뭐야... 미안해. 그 앞에서 이렇게 결혼 생활이 행복하다느니 그런 얘기를 하면 화가 나는게 당연하겠지.'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하려 드는 버릇은 프로듀서답습니다. 하지만 그 답답함 또한 여전히 프로듀서다웠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해도 알아채지 못하면 화가나다 못해 황당할 지경이기에, 오히려 머리가 냉정하게 식어버렸습니다.

'제가 맞춰볼까요?'

'응? 뭘?'

'이오리가 저에 대해서 한 얘기, 아마 제가 아직 프로듀서를 좋아한다고. 둘이서 만나는 건 조금 불안하다. 뭐 그런 얘기였을 거에요. 맞나요?'

'어, 맞았어. 그런데 어떻게 안거야?'

저는 프로듀서의 대답을 무시하고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프로듀서는 이렇게 말했겠죠. '이오리, 하루카는 날 좋아하지 않아. 유능한 프로듀서로서 함께 일하긴 했지만 거기에 연애 감정은 없었을 거야.' 맞나요? 아니, 맞든 틀리든 관계 없어요. 프로듀서가 보는 저는 이랬던 거에요. 이랬을 거에요. 왜냐면 당신은 프로듀서니까. 당신이니까. 이오리가 고백하기 전까진 이오리가 자기를 좋아하는 줄도 모르고, 감정을 접으려던 당신이니까.'

'......'

그제야 '그' 프로듀서도 상황을 이해한 듯 했습니다. 이제서야. 몇년이 지나고서야 겨우, 제 마음을. 전하지 못했던 마음을 술기운을 빌려 토해내고서야. 드디어.

'그날 제가 어떤 감정이었는지 알아요? 예쁜 드레스를 입고, 당신이랑 키스하고, 반지를 끼고, 함께 케이크를 자르던 이오리를 보면서, 간신히 웃으며 축하하던 제게 너도 곧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그 사람과 행복한 결혼을 할 수 있을 거라던 당신의 앞에서, 제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

겹겹이 덮이고 퇴적되고 굳어져 꽁꽁 싸매고 있던 추악한 자신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말 한 마디 하지 못하는 프로듀서를 보면서 저는 프로듀서가 마시던 잔을 들어올렸습니다.

'아, 그건...'

당황하며 말리려던 프로듀서를 보며 슬며시 웃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바카디 151. 75도가 넘는, 독하디독한, 차가운 불을 입안에 머금습니다. 입안을 태우는 듯한 강렬함.

저는 걱정스런 얼굴로 바라보는 그를 마주보다 기습적으로 입을 맞추었습니다.

프로듀서는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진 눈으로 저를 바라봅니다. 이내 당황하며 멀어지려는 그를 꾸욱 끌어당깁니다. 꼴깍꼴깍, 서로의 침과 뒤섞인 술이 그의 목을 타고 넘어갑니다. 저 또한 그것을 삼키었습니다. 

잠시 후 떨어진 저는 입가에 묻은 술을 닦아내고는 텅빈 샷을 좌우로 흔들어보이며 말했습니다.

'저기 프로듀서, 불장난 한 번 해볼래요?'

 

 

 

 

 

 

이미지 출처 : https://www.pixiv.net/member_illust.php?mode=manga&illust_id=46905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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