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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리티 P 시리즈] 촛불과 별빛이 가장 밝게 빛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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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5-16, 2017 03:56에 작성됨.

<퍼스널리티P 시리즈의 이전 이야기들>

1. 타카가키 카에데 <밤 바다의 이정표>

2. 사기사와 후미카 <First Step>

3. P <인내의 삶> 

4. <신데렐라 걸스> 

5. 센카와 치히로 <함께 걷는 길> 

6. <'어제'가 '오늘'과 함께 할 '내일'에게> 

7-1. <방랑자라고 다 길 잃은 것은 아니다> 

7-2. 호죠 카렌 <히로인과 소녀, 꿈의 무게> 

8. 네가 모르는 이야기, 너만이 아는 이야기

9. (Re)Write─덮어 쓰는, 혹은 다시 쓰는

 

<외전격 이야기들>

메모리얼 <사쿠마 마유의 회상>

사기사와 후미카<걷지 않은 길>

사기사와 후미카 <파트너>

 


 

 

CG프로덕션의 본관 스튜디오에는 미디어제작팀의 사무실과 회의실이 위치하고 있다.

굳게 닫힌 두꺼운 방음문의 안쪽에서는 커다란 원탁의 자리를 가득 메우고 앉은 사람들이 회의를 하고 있었다.

 

“좋아, 다음은 팀별 집결장소다. 다들 자료 마지막 페이지 펼쳐 봐. 지도 있지?”

“네!”

 

그 중에서, 단상에 서서 빔 프로젝터가 비추는 자료를 이리저리 가리키며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하대를 하는 것으로 보아, 그가 이 사람들 중에서 가장 직급이 높은 사람인 듯 했다.

 

“……마지막으로, 오늘은 딴 짓 하지 말고 일찍 자라. 내일 새벽부터 출발할 테니까. 장비 팀은 집 가기 전에 장비 한번 더 확인하고.”

“넵!!”

 

프로젝터의 전원을 끄고, 그는 리모컨으로 회의실의 불을 다시 밝혔다. 끝났다는 것을 직감하기라도 한 듯, 앉아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크게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하도록. 그럼, 해산!”

“”수고하셨슴다!!””

 

해산 구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작업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직원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텅 빈 회의실에 혼자 남은 중년의 남자는 비어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크게 기지개를 펴고는 품 속에서 절반쯤 남은 담뱃갑을 꺼냈다. 담배를 꼬나물고 라이터를 찾아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그 때, 열려 있는 회의실의 문틈으로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있던가?’라고 생각하며 문 쪽을 바라본 그의 눈에 한 여성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꼬나물었던 담배를 황급히 손에 들고 있던 담뱃갑 속으로 되돌렸다.

 

“어이쿠, 여기까진 어인 일로……?”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다.”

 

누가 보더라도 남자가 여자에 비해 몇 살은 나이가 많은 것처럼 보였지만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연스럽게 하대를 내뱉었다. 하지만 그것을 들었음에도 그는 별 다른 언짢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그녀에게 먼저 다가가 가볍게 목례를 했다.

 

“제가 아는 것이라면 말씀드리지요.”

“아이돌 부서. 아니, 신데렐라 걸즈의 프로듀서에 대해서다만. 혹시 알고 있나?”

“남들만큼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 참 다행이군.” 남자의 대답에 여자는 작게 웃으면서 품 속에서 수첩을 꺼내들었다. 그것을 바라본 부장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것에 최대한 성실하게 답해주기 바란다.”

“……얼마든지요.”

 

 


<촛불과 별빛이 가장 밝게 빛날 때>

 

 

 

 

프로듀서가 자신의 입사 이래 최초의 장기휴가로부터 복귀한 지 1주일이 지난 월요일.

새해 분위기가 서서히 사그라지는 1월의 중순에 접어들자 추위가 좀 더 자신을 강하게 어필하기 시작했다. 목도리를 두르고, 두툼한 외투까지 걸쳤음에도 한기를 듬뿍 머금은 한겨울의 공기는 그 틈새를 집요하게 뚫고 들어와 살갗을 바늘처럼 콕콕 찔러대고 있었다. 그나마 야트막한 주택들이 모여 있는 거주구역이라면 따스한 해님의 가호를 받을 수 있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빌딩의 숲 속에서는 햇빛을 받는다는 것이 요원한 일이었다.

 

“으으, 춥다아아…….”

 

빌딩 사이로 쌩쌩 몰아치는 칼바람에 잔뜩 몸을 움츠리며, 치히로는 도망치듯 정문 안으로 뛰쳐들어왔다. 선글라스를 쓰고, 검은 코트를 걸치고 있는 보안팀 직원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로비로 들어선 그녀는, 그 곳에서 뜻밖의 사람과 마주쳤다.

 

“치히로 씨, 안녕하세요?”

“앗, 미유 씨? 안녕하세요!”

“밖이 많이 춥죠……?”

“으으, 무슨 칼바람이 몰아치는지……귀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가볍게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곧바로 나란히 사무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야기 들었어? 아이돌 부서.”

“아, 그 새로 오신 이사님 말이지?”

 

로비를 가로질러, 별관으로 연결된 통로를 향해 걷고 있던 치히로의 귓가에 로비 한 구석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딱히 귀가 좋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하필이면 그녀가 그들의 옆을 지나갈 때, 한순간 로비에 정적이 찾아왔던 것이다. 마치 우연처럼.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치히로는 그제서야 자신이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자 반 걸음 정도 앞에 서 있는 미유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치히로 씨……?”

“……아무것도 아니에요. 자, 얼른 가요.”

“……네.”

 

순진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미유에게 다가가며 치히로는 입술을 깨물었다.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도착했지만, 사무실의 보안장치는 이미 ‘열림’으로 해제되어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하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치히로는 조심스레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히터 특유의 냄새를 머금은 서늘한 공기가 후욱 빠져나왔다.

돌돌거리는 소리를 내며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는 사무실 안에서는 프로듀서가 소파 옆에 세워둔 커다란 박스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늘어놓고 있었다. 이번에도 해외에서 받은 것인지 박스 주위에는 운송장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인지, 프로듀서는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프로듀서 씨.”

“안녕하세요…….”

 

가볍게 목례하는 그에게 인사를 건네며 두 사람은 커다란 박스가 놓여 있는 테이블을 향해 다가갔다.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것은 일곱 개의 액자와 명패, 그리고 용도불명의 가루가 들어있는 커다란 통이었는데, 액자를 살펴보면 그 아랫부분에는 “Cinderella Girls”라는 금색으로 도금된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이건 뭔가요?”

“핸드프린팅을 하려고요. 틀이랑 재료를 좀 샀습니다.”

“핸드프린팅요?”

“네.”

 

아무래도 그것이 전부는 아닌 모양인지, 프로듀서는 다시 상자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잠시 후, 그의 손에 이끌려 나온 것은,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서 있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트로피와 축음기를 본딴 모양이 얹혀 있는 트로피였다. 미유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치히로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오스카 상이네요? 이거는 그래미 상이고.”

“정확합니다. 잘 알고 계시네요.”

“후훗, 폼으로 예능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게 아니랍니다. 그런데 이거, 진품……인가요?”

 

프로듀서는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짜였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냥 기념품이에요.”

“네? 이거 파는 거였어요?”

“네. 휴가 동안 LA에 다녀왔거든요.”

“LA에요? LA에 뭐가 있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치히로의 옆에서 미유가 작게 속삭였다.

 

“LA에는 할리우드가 있어요…….”

“아아, 맞다. 그랬었지!”

“예능회사 직원님?”

 

히죽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프로듀서에게 치히로는 손을 붕붕 내저었다.

 

“까, 까먹을 수도 있죠! 우리 나라도 아닌걸!“

“하하하.”

”그나저나, 갑자기 왠 핸드프린트인가요?”

”뭐 기념품으로 좋은 게 없을까 생각했거든요.”

“그냥 술이랑 과자만으로도 충분한데요…….”

 

치히로는 슬쩍 눈을 돌려 탕비실을 바라보았다. 탕비실의 안쪽에는 며칠 전 국제택배로 받은 과자나 술 따위가 아직도 박스 단위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던 것이다.

 

“뭐, 이제부터 후배들도 생기고 할 테니까, ‘선배님’들한테는 뭔가 기념이 될 만한 게 필요하겠죠. 멋지지 않습니까? 이런 거?”

“핸드프린팅에 트로피라니……어쩐지, 다들 할리우드 스타가 된 것 같네요…….”

“그렇죠? 그 느낌 내려고 사 온 거라니까요.”

 

미유의 말에 프로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지금은 기분만 내는 겁니다만, 언젠가는 이 레플리카들이 진품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죠……좋아. 다 들어 있네.”

 

아무래도 내용물을 확인하던 중이었던 모양인지,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물건들을 다시 상자 속으로 되돌린 프로듀서는 대충 뚜껑을 덮은 상자를 번쩍 들어올리면서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저는 이거 창고에 갖다놓고 올게요. 자, 슬슬 일과 준비합시다.”

“네.”

 

프로듀서가 사무실을 나가고, 미유와 치히로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일과를 시작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미리 갱신시켜둔 것인지, 이미 이번 주의 일정으로 갱신되어 있는 스케줄 보드에는 여전히 별 다른 일정 없이 아이돌들의 레슨과 트레이닝 계획만이 들어 있었다.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하면서 치히로는 ‘그 소문’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걸 말해야 할까……?’

 

휴가에서 돌아온 지 1주일이 넘게 지났지만, 프로듀서에게서 별 다른 이야기가 없는 것을 보면 그것은 그저 그녀 혼자만의 기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그 반대라면? 프로듀서조차도 모르는 곳에서, 무언가 은밀히 진행되는 이야기가 있다면?

 

“자, 그럼 오늘 하루도 힘차게!”

 

잠시 후, 사무실로 돌아와 자신의 자리에서 태연하게 업무를 시작하는 프로듀서의 모습을 바라보며 치히로는 마음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흘러, 점심 시간이 다가온 사무실에는 프로듀서와 치히로 둘만이 남아 있었다. 미유가 은행에 볼일이 있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다.

치히로는 소파에 앉아 잡지를 읽고 있었고, 프로듀서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창가의 햇빛을 받으며 자그마한 문고본을 읽고 있었다.

곁눈질로 프로듀서의 모습을 계속해서 바라보던 치히로는 속으로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소문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잡지의 내용이 도저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아, 몰라. 확 말해버려야지.’

 

생각을 정리한 치히로는 고개를 들어 프로듀서를 바라보았다.

 

“저……프로듀서 씨, 혹시 소문 들으셨어요?”

“소문? 무슨 소문이요?”

“그……인사개편 관련해서 나오던 소문인데요.”

 

새해를 맞이하여, CG프로덕션에서는 대대적인 인사개편이 벌어졌다.

생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신생 부서 중에서는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실적을 거두고 있던 아이돌 부서, 신데렐라 걸즈는 개편의 칼날에서 다소 멀찍이 떨어져 있었지만 다른 부서들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 올해의 개편에는 어지간해서는 움직이지 않는 임원진의 개편마저 있었기에 직원들은 저마다 이번 인사개편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새로 부임한 상무이사가 신데렐라 걸즈를 무척 탐낸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그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하필이면 프로듀서의 휴가가 한창이던 12월의 말 경의 일이었다. 새해를 앞두고 새로 부임하게 될 신임 이사가 프로젝트를 탐낸다는 것으로 시작한 그 소문은 이제는 ‘그 임원이 지금의 부서장인 프로듀서를 밀어내고 자신이 프로젝트를 차지할 계획을 노리고 있다’는 소문으로까지 번져 있는 상황이었다.

 

“치히로는 뭔가 짐작가는 거 있어?”

“으응……글쎄요……전 오늘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요?”

“그런가……아차, 거기는 치히로 혼자뿐이지?”

“네. 프로듀서 씨는 이번 주부터 휴가셔서요.”

 

정작 치히로에게 그 이야기가 새어 들어간 것은 연말에 진행된 직원 간담회의 뒤풀이 자리에서였다. 그 때만 하더라도 그녀에게 있어서 그 이야기는 그야말로 뜬구름 잡는 소리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이야기는 점점 회사 이곳 저곳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문의 진원지가 하필이면 인사팀 직원들이었기 때문이다.

 

“아아, 그 신규 이사님이 어쩌고 하는 그거요? 신경 쓰지 마세요.”

 

하지만, 프로듀서는 그녀와는 약간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정말 괜찮을까요?”

“괜찮다니까요. 설마하니 제가 모르는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그, 그렇긴 하지만요…….”

“거기다, 설령 소문대로 뭔가가 윗선에서 정해진다 하더라도,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 마음 편히 가지세요. 필요하다면 제가 직접 나설테니까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너무도 태연하게 대꾸하며 책으로 눈을 돌리는 그의 모습에 치히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 또한 무릎 위에 펼쳐놓은 잡지로 시선을 돌렸지만, 책이 안 읽히기는 마찬가지였다.

 

‘정말……사람 속도 모르고 태연하시긴…….’

 

그 때, 프로듀서의 팔에 채워진 시계에서 땡, 땡, 땡, 하고 가느다란 종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예정이라도 있는 것인지, 프로듀서는 책을 서랍속으로 돌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점심시간이 끝난 것인가 싶었던 치히로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점심시간은 아직 10분 정도가 더 남아 있었다.

 

“어디 가세요?”

“다음 달에 있을 뮤직비디오 촬영 있죠? 그 사전 회의가 있거든요. 예정으로는 3시까지인데……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네요. 일단 늦을 것 같으면 연락 드릴게요.”

“네.”

 

프로듀서가 사무실을 나가고 난 뒤,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 가는 것을 확인한 치히로는 소파에서 일어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괜찮아……괜찮을 거야……그 프로듀서 씨가 손 놓고 당하고 있을 리도 없고. 응, 문제 없어.’

 

프로듀서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마치 이미 소문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는 듯한 눈치였기 때문이다.

확실히, 지금까지 그녀가 알고 있는, 지금까지 그녀가 봐 온 프로듀서는 그런 소문에 결코 두 손 놓고 당하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평사원이라면 고개조차 함부로 들지 못하는 사장에게 당당히 다가가 1:1로 일기토를 벌이고, 사적인 자리에서는 술잔까지 부딪히는 사람이 아니던가. 다만, 정말로 불안한 것이 있다면, 그의 평소 행실이었다. 업무 측면에서는 두말 할 것 없이 유능한 프로듀서였지만, 그는 ‘정치’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실력과 실적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그야말로 프로페셔널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남자였지만, 그는 애석하게도 권력이나 세력 싸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그야말로 아웃사이더였다.

 

‘만약에, 정말로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나는, 그 사람을 따르던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칠 때마다 치히로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없는 아이돌 부서, 그가 없는 신데렐라 걸즈를 그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아…….”

 

점심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휴대전화의 알람소리와 함께, 기운차게 사무실의 문이 열리면서 두 사람이 모습을 나타냈다.

 

“아, 카에데 씨, 미즈키 씨. 안녕하세요?”

“안녕! 굿 애프터눈!”

“안녕하세요? 식사는 하셨죠?”

 

그 두 사람은, 다름아닌 오늘 오후에 연습이 예정되어 있는 카에데와 미즈키였다.

 

 


 

 

 

그날 오후. 별관의 지하에 위치한 트레이닝 파트에서는 연습생들과 아이돌들의 레슨이 진행되고 있었다.

 

 

“카렌, 반응이 늦다! 어깨 힘을 빼! 후미카! 호흡 관리하고!”

 

벽면에 설치된 앰프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의 리듬에 맞춰 크게 박수를 치며 아이돌들의 안무를 바라보는 베테랑 트레이너의 옆에는 트레이너와 루키 트레이너가 서서 차트에 무언가를 열심히 기록하고 있었다.

 

“흐음…….”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방음문에 설치된 창문을 통해 연습실 안의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는 자신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한쪽 옆구리에 서류뭉치를 끼고, 녹색 민소매 셔츠 아래에 트레이닝 복 바지를 입고 있는 마스터 트레이너가 서 있었다. 이미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듯, 마스터 트레이너는 그녀를 향해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네었다.

 

“별 일은 아니다. 한 번 구경이라도 해 볼까 싶어서 말이지.”

“들어가서 직접 참관하셔도 됩니다만. 실망시켜 드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괜찮다. 그보다도, 프로듀서는 없나? 듣기로는 여기에 왔다고 들었는데.”

“프로듀서라면……지금쯤 외부 영업처에서 회의가 예정되어 있습니다만……급하신 용건이라면, 부를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다음에 보면 될 일이지. 그 대신이다만.”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는 품 속에서 수첩을 꺼내며 마스터 트레이너를 바라보았다.

 

“잠깐 시간을 내 줄 수 있겠나?”

“……물론이죠.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

 

 

한편, 도내에 위치한 모 방송국의 회의실.

회의실에 모여 있는 사람들과 함께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던 프로듀서는 잠시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을 멈추었다.

 

“……잠시만요. 귀가…….”

“왜, 어디 불편한가?”

“아뇨, 누가 제 얘기라도 하나 봅니다. 갑자기 귀가 간지럽네요.”

“하하, 인기있는 남자구만.”

 

두어 번 헛기침을 한 뒤, 프로듀서는 다시 목을 가다듬고 이야기를 계속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이번 뮤직비디오는 ‘신데렐라 걸즈’의 이름으로 시작되는 첫 번째 프로모션입니다. 아직 최종 결정이 난 것은 아니지만, 사정에 따라서는 해외 촬영이 될 수도 있어요. 이 부분은 다음 회의에서 제가 다시 공지해 드리겠습니다. 혹시, 질문 있으십니까?”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좌중을 돌아보았다.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빙그레 웃으면서 그는 들고 있던 보드마카를 내려놓았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자료는 제가 각 부처 메일로 보내 드릴 테니, 한 번씩 훑어보시고 제게 다시 연락해주세요.”

“”네!!””

 

프로듀서의 말에 회의실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회의실에 앉아 있던 직원들이 일제히 자리를 일어나 우르르 빠져나가던 그 때, 자신의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던 디렉터가 자료를 정리하던 프로듀서에게 다가갔다.

 

“P씨.”

“감독님? 무슨 일이십니까?”

“당신, 혹시 회사에 밉보인 거라도 있어?”

“저요? 글쎄요…….”

 

디렉터의 질문에 잠시 동안 무언가를 생각하던 그는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최근에 휴가 다녀온 것 말고는 딱히 없는데요.”

“그런가? 이상하군…….”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디렉터는 프로듀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게, 요 전부터 너네 회사 쪽에서 자꾸 네 행적을 캐묻는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제 행적을요?”

“그래. 행적이라고 해야 하나, 평판이라고 해야 하나……아무튼, 너한테 무척 신경을 쓰는 눈치더라. 누군지 알고 있어?”

“글쎄요……딱히 생각나는 건 없는데요. 휴가 쓴 게 문젠가?”

 

어깨를 으쓱하며 디렉터는 자리에서 일어나, 프로듀서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뭐, 네가 모른다면 별 일 아니겠지. 아무튼 몸 조심하라고. 누군가 뒤를 캐고 있다는 건 분명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니까.”

“그렇네요. 주의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그럼, 난 먼저 가봐야겠어. 오늘 수고 많았다.”

“네, 편히 쉬세요.”

 

디렉터가 회의실을 나가고, 회의실에 혼자 남은 프로듀서는 가지고 온 가방 속에서 에너지 바를 꺼내 포장을 뜯어 크게 한 입 베어물었다.

 

“직접 찾아오시면 될 걸 가지고 꽤나 돌아서 가시네……내가 먼저 찾아가봐야 하나.”

 

반쯤 남은 에너지 바를 모두 입 속으로 던져 넣고, 종이컵 안에 남아있는 커피를 쭉 들이킨 그는 시계를 한번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본관 최상층에 위치한 사장실에는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보며 앉아 있었다. 벽면을 통째로 잡아먹고 있는 통짜 유리창에서 쏟아지는 햇빛은 그 밝기만큼이나 많은 열기를 방 안으로 보내주고 있는 것인지, 별다른 난방시설도 없었지만, 사장실 안에는 적당히 훈훈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래, 회사는 둘러봤고?”

 

자신의 앞에 놓인 머그잔을 홀짝이며, 사장은 자신의 건너편에 앉아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을 올려 묶은 그녀는 눈매를 강조한 짙은 화장과 목과 귀에 걸친 화려한 액세서리가 무척이나 강렬한 인상을 주는 여성이었다.

 

“네, 덕분에 시간을 들여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귀국하고 나서 바로 들어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안 피곤하냐?”

“저는 그다지……이런 이동은 익숙하니까요. 그나저나……”

 

인상만큼이나 잔뜩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대답하며 그녀는 자신의 머그잔을 들었다.

 

“......대단한 남자더군요. 넘겨주신 자료나, 혼자서 프로젝트를 구상했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때는 그저 꿈만 큰 얼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잠시 말을 멈추고, 머그잔을 다시 내려놓은 그녀는 자신의 재킷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었다. 무엇이 적혀 있는 것인지, 수첩의 내용을 한번 훑어본 그녀는 졌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가 깔아둔 초석들은 도무지 한 사람이 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래서……한 편으로는 두렵습니다.”

“두렵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어째서 이토록 필사적으로 그녀들에게 매달리는 것인지……숙부님. 아니, 사장님이나 저마저도 그의 장기말이 되어 버리는 건 아닌지……말입니다.”

“그렇군.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어. 하지만 말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지금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자신의 꿈이 아닐까, 하고.”

 

그녀를 바라보던 사장은 머그잔을 들어 안에 든 검은 액체를 한 모금 마셨다.

 

“......꿈이라는 건 생각보다 장애물이 많은 법이야. 누군가에게는 돈이, 누군가에게는 명예가,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그 두 가지 모두가 장애물이 될 수도 있지. 하지만 말이다. 그에게는 그런 장애물이 없어.”

 

사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녀는 잠자코 자신 앞에 놓인 머그잔의 내용물을 홀짝였다.

 

“부와 명예, 그는 두 가지 모두를 가지고 있지. 그렇기에 그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전력으로 앞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거다. 로켓처럼 자신을 태워가면서.”

“그래서 얻는 것이 무엇이기에……”

“글쎄다. 이 곳에서 새로이 무언가를 쌓아 올리고 싶어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어쩌면, 그 이유란 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단순한 것일수도 있어. 남자란, 때론 사소하고 바보같은 것에 목숨을 거니까.”

“그런가요…….”

“어쨌든……여기서 우리끼리 이야기하는 건 의미가 없겠지. 직접 이야기를 나눠 봐라. 생각보다 꽤 말이 잘 통하는 녀석이거든.”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그녀를 바라보던 사장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나저나 여기서는 힘 좀 빼라. 괜히 나까지 쫄리잖아.”

“지금의 저는 임원으로서 이곳에 있는 것이니까요. 힘 뺀 모습을 보고 싶으시다면, 술이라도 한 잔 하시겠습니까?”

“알았다, 알았어. 전에 말해준 가게로 가자. 저녁에 시간 비었지?”

“물론이죠. 먼저 내려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씁, 뻣뻣한 녀석 같으니라고.”

“이것도 다 어떤 분께 배운 거죠.”

“나는 아니길 빈다.”

 

작게 웃으면서 사장실을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사장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미지근해진 커피를 마저 들이마시고, 그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자, 이제 네가 바라던 마지막 퍼즐이 맞춰졌다. 돗자리라면 얼마든지 깔아줄 테니, 어디 한번 재량껏 날뛰어 봐라.”

 

마치 젊은 시절의 그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창 밖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비친 것은 무엇이었는지. 몇 분 뒤, 부속실에서 비서의 알림이 도착할 때까지 그는 가만히 앉아서 창 밖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한 주를 마무리하는 금요일.

 

 

“이봐.”

 

부서장 결산회의를 마친 프로듀서가 사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회의실을 막 나오려던 그 때, 프로듀서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자, 그 곳에는 정장 위에 회사의 로고가 그려진 잿빛 작업복 재킷을 걸치고 있는 남자가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 함께 회의에 참석했던 멀티미디어 제작부의 부장이었다.

 

“부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그의 말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부장은 자신을 따라오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여기는 보는 눈이 많으니까, 일단 자리를 좀 옮기지. 바쁜 건 아니지?”

“네, 괜찮습니다.”

 

멀티미디어 제작부의 부장은 말이 많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이번에는 얼마나 이야기가 길어지려나.' 프로듀서는 겉으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아깝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거 다행이군. 오래 걸리진 않을거야.”

 

팀장의 뒤를 따라 걸으며 프로듀서는 휴대전화를 꺼내 치히로에게 조금 늦을지도 모르니 시간 되면 먼저 퇴근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무슨 일이냐며 답장이 돌아왔지만, 그것에 대답할 여유는 없었기에 그는 ‘차후 연락 드리겠습니다’라는 디폴트 메시지를 보내고 휴대전화를 다시 주머니 속으로 되돌렸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미디어제작팀의 사무실이 위치한 실내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프로듀서를 먼저 회의실로 들여보낸 그는 인기척을 확인하듯 복도를 한번 더 둘러보고는 회의실의 문을 굳게 닫았다.

 

“갑자기 웬일이십니까? 무슨 사고라도 생겼습니까?”

 

그는 정말로 별 것 아니라는 듯 손을 붕붕 흔들었다.

 

“아아, 별 다른 건 아니고. 너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

“저한테요? 무슨 일입니까?”

”최근 네 뒤를 캐고 있는 사람이 있거든.”

“제 뒤를요?”

 

최근 며칠간, 주위에서 몇 번인가 들었던 이야기였다. 프로듀서가 되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 연말에 휴가였지?”

“네, 그랬었죠.”

“그 때부터 그 양반이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닌 모양이야. 우리 쪽에도 몇 번인가 연락이 왔었거든.”

“누군지는 알고 계십니까?”

“새로 들어온 상무이사. 불 같은 여편네지.”

“상무이사라……아아, 그 사람이군요.”

 

프로듀서는 며칠 전 사내 공문을 통해 본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직 직책을 맡은 것은 아니었기에, 사내 회의 등지에 모습을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사진에서부터 느껴지는 그녀의 기세는 ‘불 같다’는 평가가 그야말로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걸까요?”

“그건 나도 모르지. 듣기로는 자네의 평판 같은 것 위주로 물어봤다던데.”

“흐음……그렇군요. 말씀 감사합니다.”

 

부장과 헤어지고 다시 별관으로 향하면서 프로듀서는 턱을 쓰다듬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겉으로만 보기에는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보였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눈빛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침내 소문의 주인공이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주말을 넘긴 1월의 셋째 주 월요일 오후의 일이었다.

 

퇴근시간을 약간 앞둔 시각, 신데렐라 걸즈의 사무실에서는 치히로와 미유만이 남아 있었다.

오전부터 이른 오후까지 레슨이 잡혀 있던 아이돌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고, 프로듀서는 외근을 나가서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에게서 ‘곧 도착할 예정이지만, 혹시나 자신이 늦을 경우 먼저 퇴근해도 된다’는 연락이 들어왔기에 미유와 치히로는 곧바로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때, 사무실의 문이 열리면서 한 사람이 모습을 나타냈다. 정장 위에 걸친 화려한 장신구와 이목구비를 강조하는 짙은 화장이 무척이나 강렬한 인상을 주는 여성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퇴근시간일텐데 미안하군. 실례 좀 하지.”

“아, 아뇨! 괘, 괜찮습니다!”

 

두 사람의 인사를 받아넘기면서 사무실 안을 둘러보던 그녀는 고개를 돌려 치히로를 바라보았다.

 

“프로듀서는 벌써 퇴근한 건가?”

“프로듀서라면 외근입니다만……아마도 곧 돌아올 거에요.”

“확실한가?”

“네, 네! 방금 전에 그렇게 연락이…….”

“그런가……알았다, 혹시 프로듀서가 돌아오거든 내 집무실로 보내다오.”

“네? 아, 알겠습니다. 집무실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다시 한번 사과하지. 미안하다.”

 

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사무실의 문을 닫으며 밖으로 나갔다. 또각또각, 멀어져가는 그녀의 발소리가 희미해질 무렵, 미유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치히로에게 물었다.

 

“저……혹시 저 분은……누구신가요?”

“새로 부임하신 상무이사님이세요.”

“네……?”

 

‘상무이사’라는 말에 미유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어, 어쩌죠……인사조차 제대로 못 드렸는데……저, 제가 엄청난 실례를……..”

“괘, 괜찮아요. 그보다도 어서 프로듀서 씨에게 연락을…….”

“저 왔습니다!”

 

치히로가 우왕좌왕하는 미유를 달래던 그 때, 프로듀서가 사무실의 문을 힘차게 열어 젖히면서 모습을 나타냈다. 잠시 사무실 안을 둘러보던 그는 사색이 된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미유와 그녀의 옆에 서 있는 치히로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저, 그게…….”

 

 

***

 

 

본관의 상층부에는 임원들이 사용하는 사용하는 방들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의 임원들은 각자 맡은 부서가 있기에 부서의 집무실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집무실은 비워두거나 개인용도로 사용하는 편이었지만, 부임한지 얼마 안 되거나 혹은 성격상 개인적인 공간을 필요로 하는 임원들은 이 곳에서 사무를 처리하곤 했다.

 

'그녀'의 집무실 또한 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그녀’는 전자에 해당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커다란 업무용 책상에 앉은 그녀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무언가가 빼곡하게 적혀 있는 작은 수첩이었다. 정확하게는 프로듀서의 행적이 적혀 있는 수첩이었다. 수첩 안에 든 내용은 그가 언제 이 회사에 들어와서 무엇을 했고, 무슨 일을 시작했으며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 등등, 시간이 남는 틈틈이 며칠간 이곳저곳을 수소문하며 직접 모은 자료들이었다.

 

똑똑똑, 수첩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누구지?”

-신데렐라 걸즈의 프로듀서입니다.

“아, 들어와.”

 

달칵,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집무실의 문이 스르륵 열리기 시작했다. 문 뒤에서 모습을 나타낸 것은, 뿔테 안경을 쓰고 정장을 단정하게 갖춰 입은 남자였다. 결코 문이 작은 것은 아니었지만, 작아 보인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덩치가 커다란 남자였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곧바로 깊이 허리를 숙이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이리 와서 앉아. 이야기 좀 하지.”

 

책상에서 일어선 그녀가 집무실 한 켠에 마련된 테이블을 가리키자 그는 지체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가 비어있는 의자에 조심스레 앉았다

‘이거 참……정말로 본인이었군.’

읽고 있던 수첩을 다시 재킷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고, 그의 맞은편에 앉은 그녀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가 쓰고 있는 뿔테 안경을 제외하면, 그는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그때 그 시절과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실례인 건 알고 있습니다만.”

 

눈 앞의 그에게는 들키지 않도록 애써 태연한 얼굴을 유지하던 그녀에게, 눈 앞의 남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를 찾으신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불렀다.”

 

그녀는 준비해 두었던 이야기를 꺼내었다.

 

“……사장님께 들었다. 나더러 네 부서의 담당자를 맡아 달라 했다지?”

“네.”

“이유를 물어봐도 괜찮겠나?”

“……제 혼자서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역부족?”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그는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합니다. 단어선택이 미숙했군요. 제가 역부족이라 말씀드린것은……그렇죠. 관리자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건 무슨 뜻이지?”

“저는 회사라는 집단에 소속되어 본 적이 없습니다. 제게 주어진 일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있지만, 그 이외의 것에 손을 뻗을 여유가 도저히 없었습니다. 누군가, 제 시야 밖에서 저를 지켜봐주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녀는 팔짱을 꼈다. 양 손목에 찬 팔찌가 잘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겉으로만 보자면, 네 말은 나를 이용해 먹겠다는 말처럼 들린다만.”

“천만에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럼, 나는 네 말을 뭐라고 해석해야 하지?”

 

그녀의 말에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단어를 찾는 것인가, 눈을 이리저리 돌리던 그는 마침내 단어가 떠오른 듯,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를테면……프로페셔널.”

“프로페셔널?”

“저도, 상무님도 각자의 전문영역이 다릅니다. 서로의 영역에서 서로가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겠죠. 저는 제 일에 마음 놓고 매진할 수 있고, 상무님께서는 명예와 실적을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호오. 그 말은……자네의 전문영역은 프로듀스 쪽이라는 것처럼 들리는군?”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

 

자신감이 넘치는 눈으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되묻는 그의 눈을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시선을 피했다. 빈말로도 아니라고 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미 그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에.

프로듀서는 재차 입을 열었다.

 

“그것 이외에도……한 가지 이유가 더 있습니다. 상무님께서 이 프로젝트를 맡아주셔야 하는 이유가요.”

“말해 봐.”

“……저 사람들의 뒤를 책임져 줄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건 무슨 뜻인가?”

 

지금까지 흐르는 물처럼 술술 즉답하던 그가 대답을 망설였다. 그 모습을 본 순간 그녀는 그에게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말 그대롭니다……제게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당연히 말하기 어렵겠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한 가지 더 물어보지. 만약 내가 네 의견을 무시하고, 내 독단으로 일을 진행한다면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글쎄요……아마도 그 때쯤이면 저는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겠죠?”

“……도망치겠다는 뜻인가?”

 

그녀의 말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마요. 저 아이들은, 저 사람들은 모두 저를 믿고 따라온 이들입니다. 그들의 믿음을 배신하는 짓은 할 수 없어요.”

“그렇다는 건?”

“제 모가지를 걸고 버티겠다는 뜻입니다.“

 

그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물론 상무님의 뜻이 완고하시다면 결국엔 제가 지게 되겠죠. 그러니 저는 모가지가 날아가는거고요.”

“그런 인질극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나? 고작 너 한 사람에게, 내 뜻을 뒤집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안 될 건 없다고 봅니다.”

 

그녀의 질문을 듣고, 그녀의 책상 위를 한번 바라본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요 며칠간 계속 보셨지 않습니까? 제 가치를.”

“……알고 있었나.”

“어느 정도는요.”

 

‘굉장한 자신감이군……말단 프로듀서가 할 소리가 아니야.’

그녀는 눈 앞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서 어떤 선수의 모습을 떠올렸다. 마운드 위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당당하고 자신만만했던, 하지만 팬들 앞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친절했던 남자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정장 아래에 가려진 모습이기도 했다.

‘그래, 사람은 안 변한다는 건가.’

 

“……저도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봐.”

“작년 연말, 타카가키 씨를 미국으로 오도록 한 건 사장님의 부탁이었습니까, 아니면 현지 경영자의 판단이었습니까?”

“그건 무슨 뜻이지?”

 

그의 질문에 그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프로듀서는 재차 질문을 던졌다.

 

“미국까지 와서 찍는다기에는 그 분량이 너무 빈약했습니다. 스케줄도 느슨했고요. 곰곰히 살펴보니 위장기획의 냄새가 풍기더군요. 마치, 타카가키 씨를 미국으로 보내기 위한 작업의 일환처럼.”

“……글쎄다. 예전 회사의 일은 잘 기억이 안 나는군.”

“……그렇군요. 쓸데없는 질문을 꺼내 죄송합니다.”

 

그 정도로 만족한 것인지, 그는 더 이상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발을 뺐다. 마치 납득한 듯한 그의 태도에 내심 웃으면서 그녀는 마지막으로 생각해 둔 질문을 꺼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겠다.”

“말씀하시죠.”

“너는 이상하리만치 그 아이들에게, 아이돌이라는 것에 집착하는군. 뭔가 이유라도 있나?”

“글쎄요……뭐, 꿈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꿈도 꿈 나름이다. 너는 내게 명예와 실적이 남는다고 했지. 그럼 너는? 그렇게 해서 자신에게 남는 게 뭐지?”

“……’추억’이 남지요.”

“추억?”

 

되묻는 그녀에게,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 잔불조차 남지 않도록 모든 것을 모조리 불태운 추억이.”

 

 

 

프로듀서가 돌아간 뒤. 집무실에 혼자 남아 있던 그녀는 책상 위에 올려둔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아, 숙부님……아니, 사장님. 그 프로젝트, 제가 맡겠습니다. 아뇨, 당일에 제가 직접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별도의 자리는 마련해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그녀는 어느덧 별이 하나둘씩 뜨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추억…….이라고.”

 

그녀는 그의 마지막 이야기를 떠올렸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혹은 몹시 후련해 보이는 듯한 웃음. 좀처럼 형언하기 어려운, 마지막에 그가 지어 보였던 웃음을 아마도 그녀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현 시간부로, 프로듀서 P를 아이돌 부서의 부서장에서 해임한다.

 

결국, 안전할 것으로 보였던 신데렐라 걸즈도 인사개편의 영향에 아주 약간이지만 휩쓸리게 되었다.

신임 상무이사가 신설된 아이돌 산업부의 총괄이사로 임명되면서, 기존의 트레이닝 파트와 신데렐라 걸즈가 그 산하 직속부서의 형태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에 따라 제1 별관에는 새로운 방 하나가 생겨났다. 총괄이사가 머물면서 집무를 처리하게 될 집무실이었다.

그 집무실 안에서, 프로듀서는 새로 취임한 총괄이사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취임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제 고집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고집을 들어 준 게 아니다. 네 이야기의 끝을 보고 싶었을 뿐이지.”

 

프로듀서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물론이죠. 결코 실망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한다.”

 

그녀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을 맞잡으며, 그는 약간 머리를 숙였다.

 

“저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악수를 나누는 두 사람의 사이, 책상에 놓여 있는 검은 명패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아이돌 산업부 총괄이사 미시로.

 

 


 

 

 

“아, 여기까지 온 김에 부탁할 게 있다만.”

“말씀하세요.”

 

집무실을 나가려다 말고 몸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그에게 그녀는 가방 속에서 곱게 접혀 있는 유니폼을 꺼냈다.

그에게는 무척이나 익숙한 그것은 흰 바탕에 파란 줄무늬가 들어간, 주황색 테두리로 강조된 등번호가 새겨진 유니폼이었다. 그 유니폼에 적힌 등번호를 바라본 프로듀서는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이 사람도 ‘그쪽’ 사람이었던 건가.

 

“……사인 좀 해 줄 수 있겠나?”

“……얼마든지요.”

“고맙다. 대학교 시절부터 네 팬이었거든. 주위에서 네 사인 가지고 얼마나 자랑을 해 대던지……나중에 사진도 한번 찍어줄 수 있을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끝>

 

 

 

상무님! 상무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거의 23일만의 퍼스널리티 시리즈군요.

올해 안에 완결내는게 목표라고 해놓고 한달만에 한 편을 낼 줄이야....이건 좀 심하잖아....

개인적으로 굵직한 이야기들을 연결하는 징검다리 이야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이 이야기도 몇 번을 고쳐 썼는지 모르겠네요.

 

사실은 단편제도 있고, 총선도 있었고....이런저런 일이 많아서 좀처럼 집중을 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요.

 

미시로 상무의 등장으로 이제 '아이돌이 아닌' 레귤러 인물들은 거의 전부 나왔습니다.

상무라는 든든한 권력을 등에 업은 프로듀서가 어디까지 막 나갈지.

그리고 그래 펄펄 날아다니던 사람이 어째서 뜬금없이 타임아웃 어필을 하는 것인지.

앞으로도 풀어낼 이야기가 한가득입니다. 이거 이 페이스면 한 3년은 써야 완결 날 거 같네요.

 

아무튼, 각설하고 다음 이야기에서 뵙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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