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세 무희(武姬) 이야기 - 下. 화양연화(花樣年華)

댓글: 1 / 조회: 1004 / 추천: 5


관련링크


본문 - 05-07, 2017 14:17에 작성됨.

※ 上. 수라불 편 링크

※ 전국 시대 시대물 설정입니다.

※ 다소 잔인할 수 있는 장면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下. 花樣年華

 

두 사람의 생애

그 사이에

벚꽃의 생애가 있다



더욱 보고 싶어라

벚꽃에 사라져 가는

신의 얼굴을

 

- 松尾芭焦

 




 봄의 아침을 좋아한다. 봄에는 냄새로 잠을 깬다. 응축된 하늘과 언 땅이 풀리면서 만들어진 틈. 그 틈에서 세상의 모든 향기가 흘러나온다. 세상은 틈으로 가득 찬다. 나, 린은 이 향기로운 틈의 틈속에 누워있다.

 누운 채 손을 뻗어 문을 연다.

 봄에 냄새 다음으로 빠른 것은 소리다. 개구리 우는 소리. 산수유 가지 속에 숨은 멧새 소리. 벌레 소리. 겨울을 나며 말라붙었으나 떨어지지 않은 잔이파리들이 서로 몸을 비비며 바람을 긁는 소리. 동장군의 청승이 맑고 간지럽다.

 

 밖으로 나와 신을 신었다. 아직 아무것도 심지 않은 ‘우리 밭'을 그대로 가로지른다. 축축한 흙에 다른 발자국이 남아있다. 산 중턱을 타고 살짝 돌아서 오르막을 몇 보 올랐다.

 미오의 목소리가 반긴다.

 

 “린! 여기, 여기.”

 “너, 나 안 부르고 먼저 갔네.”

 “괜히 깨우러 갔다가 아저씨한테 붙잡히면 어떡해.”

 

 팔뚝을 꼬집어줄 요량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걸음 걸음마다 미오의 웃음소리. 개울물 소리. 그리고 조각구름 같은 목소리. 우즈키다.

 

 “린이 안 올 리가 없잖아요. 잘 잤어요?”

 “응. 잘 잤어?”

 “실은 너무 기대돼서 못 잤어요.”

 

 우즈키는 개울물에 발을 담그고 있다. 개울가에 이른 산벚꽃이 피었다.

 

 애옥살이 산골에서 우즈키의 집은 유복한 편이다. 성도 없는 촌것 신세는 마찬가지지만 산골 안에서는 나름대로 우두머리 구실을 한다. 어른들은 우즈키의 아버지를 ‘두목'이라고 부른다. 손바닥만한 땅이나마 제것으로 가진 마을의 몇 안 되는 사람이다.

 열한 살이 되었을 때, 나와 미오는 ‘우리 밭'이라 부르던 밭뙈기의 진짜 주인이 따로 있다는 걸 알았다. 우즈키는 아마 더 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즈키는 늘 ‘우리 밭'을 조심조심 피해 걸었다. 처음엔 그것이 고마웠고, 열다섯이 된 지금의 내게는 슬프다.

 

 이 고을 어른 중에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은 두목뿐이다. 가끔 성하마을(城下町)에서 높은 분의 심부름으로 사람이 올라오면 마을 사람들의 이름과 살림을 글로 써서 보내주곤 했다. 내 부모는 당신들의 이름을 소리로만 알았다.

 내 부모는 내 이름을 짓지 못했다.

 

 우즈키는 나와 미오보다 한 살 언니다. 작아빠진 마을에서 또래인 우리 셋은 어려서부터 친했다. 어른들이 바깥일을 할 때면 우리는 개울가에 모여 놀았다. 두목이 작은 빈객들에게 부를 이름을 붙여 주었다.

 

 - 네 어미가 너를 해산할 때 날이 무더웠다. 보음(補陰)하는 뜻에서 린(凜, 서늘하다)이라 하자.

 - 너는 위아래로 오라비가 있지? 첫째도 막내도 아니니 미오(未央, 다 차지 않다)라고 하마.

 

 우리는 뜻을 몰라도 그 이름자의 소리를 좋아했다. 어린 나는 집으로 뛰어들어와 부모에게 ‘두목이 그랬어. 나는 린이야!’ 라고 말하며 폴짝거렸다. 그 후로 부모도 나를 린이라고 불렀다.

 우리 이름을 쓰는 법을 가르쳐준 것은 우즈키였다. 우리에게 처음 가르쳐준 글이 우리의 이름이었다. 아비를 졸라 배웠다고 했다. 나는 문득 물었다.

 

 - 우즈키 이름은 뜻이 있어?

 - 네. 사월에 태어났다고 해서 우즈키래요. 卯月. 이렇게 써요.

 

 나는 땅에 그어진 획들을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나를 보면서 우즈키가 말했다.

 

 - 근데, 실은 卯月엔 이월이라는 뜻도 있대요.

 - 같은 글자인데?

 - 네. 중국이나 조선에선 원래 卯月이 이월이래요. 전 이월이 더 좋아요.

 - 어째서?

 - 산벚꽃이 피는 달이잖아요.

 

 열세 살 우즈키의 미소를 떠올린다. 눈을 뜨고, 나는 다시 열다섯 살이 된다.

 미오가 우즈키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산벚꽃이 펄럭인다. 나는 맞은편에서 발을 담갔다. 나와 우즈키의 발가락들이 부딪힌다. 발가락들 사이를 빠져나가는 개울물에 간지럽다.

 

 “아버님 읽으시는 책에서 좋은 노래를 알아 왔어요.”

 “이번엔 무슨 꽃?”

 “매화예요.”

 

 나의 친구이자 언니이자 스승인 그미는 꼭 꽃을 노래하는 노래들을 좋아한다. 아비의 책들을 틈틈이 읽고 묻기도 하면서 새로운 노래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다. 만엽집(萬葉集)이라거나 고금집(古今集) 또 시경(詩經)이나 이두(李杜) 같은 제목이라고 했으나 우리는 차이를 몰랐다. 그것들은 모두 우즈키의 노래였고 이제 우리 셋의 노래가 될 터였다.

 

 “오늘은 개울물도 기분 좋게 통통 튀니까 참 잘 어울릴 거예요.”

 

 이 노래 모임이 시작되면서, 바람이 불지 않거나 너무 거셀 때, 개울 물살이 세차서 시끄러울 때면 우리는 반 농담으로 걱정하고는 한다. ‘어쩌지, 반주가 이래서야 노래가 시들잖아.’

 

 노랫소리가 들린다. 우즈키의 선창.

 

 봄바람이여

매화 향기 실어 나르네

 그 꽃내음에 취하여

 두견새도 지저귀나니

 

 우리는 답가한다.

 

 벌써 여러 해 봄날을

 이 마음 다하여 왔나니

 내 정성을 알아다오

 요시노(吉野)의 꽃이여

 

 우리는 안다. 꽃과 노래는 한가지의 두 이름이다. 우즈키가 그것을 가르쳐 준다.

 우즈키가 노래하는 한 우리는 언제나 꽃이다. 배울 수 있는 것은 모두 노래로 배운다. 느낄 수 있는 것은 모두 꽃으로 느낀다. 간절함이란 무엇인가. 알맞은 바람 불지 않아서 매화 향기 나의 코에 와닿지 아니함이다. 나머지 이른바 간절함이라 부르는 모든 것들이 이것의 일개 비유다. 치열함이란 무엇인가. 그러고 나면 곧 사라질 것임을 알면서도 한바탕 황홀한 벚꽃잎의 쏟아짐을 기대함이다.



 해는 한낮을 너머 기울어졌다. 나와 미오는 하늘을 보며 주고 받았다.

 

 “사실 오늘 농구 손질 거들어야 하는데.”

 “나도. 종일 농땡이쳤으니 쫄딱 굶게 생겼네.”

 

 이제 며칠 있으면 제대로 농사를 시작해야 한다. 꽃놀이 한다고 태평세월을 보내고 있으니 돌아가서 지청구를 먹더라도 할 말이 없다.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 동무들이 우즈키는 귀여웠던 모양이다.

 

 “괜찮아요. 산벚꽃이 핀 동안은 뭐든지 용서가 된답니다.”

 

 듣도 보도 못한 소린데. 어째서?

 

 “산벚꽃은 꿈이니까요.”

 

 꿈이라?

 

 “언제 찾아왔는지 모르게 와서 깨달아보면 주위에 만발하고, 끝날 때면 누구나 끝이라는 걸 알 수 있도록 눈부시게 지죠. 산벚꽃은 세상이 꿈꾸는 중이라는 증거예요. 우리는 지금 꿈 속 동산에 들어와 있죠.”

 “말씀 좋지만, 아무래도 나나 린네 부모님한테는 효험 없는 소릴걸.”

 “부처님은 용서해주실 거예요.”

 “그것도 어떠려나. 아무튼 꿈이라면 오래 오래 안 졌으면 좋겠다. 벚꽃.”

 “린도 꽃 좋아하니까요.”

 

 나는 어려서부터 꽃에 빠졌다. 우즈키가 노래로 꽃을 피우듯 나는 꽃에서 노래를 들었다.

 언제나 ‘우리 밭'에 상상의 씨를 뿌리곤 한다.

 봄꽃밭, 여름꽃밭, 가을꽃과 겨울꽃밭에서 차례대로 백화(百花)가 피고 지는 마당은 죽을 때까지 향기로 차 있으리라. 아침 그 향기에 깨고, 낮에는 그것을 노래하고, 밤에는 그 향기에 취해 잠드는 인생을 살고 싶다.

 

 그런 이야기를 얼결에 털어놓았다. 미오가 짓궂게 웃으며 물었다.

 

 “꽃 심어서 어떻게 살아? 먹지도 못하고 팔지도 못하는데.”

 “뭐 어때. 꽃향기라도 먹으며 살면 되지.”

 “아니, 무슨 신선이야 그게.”

 

 시끄러워. 지금 여기는 꿈 속이니까 무슨 말을 하건…. 샐쭉해진 나는 입 안쪽으로 중얼거렸다. 우즈키가 말했다. 꽃향기를 먹으며 산다니, 멋진 일이잖아요. 꽃마다 모두 맛이 다르겠죠. 굉장하네요. 이 개울가에 산해진미가 가득할 거예요.

 우즈키가 나를 보며 웃었다. 그미의 목소리는, 통통 튀는 개울물 소리에 말을 얹은 것 같다.

 

 “린, 산벚꽃 향기만은 내게 파세요. 그걸로 밥 지어서 셋이 먹어요.”

 

 그 미소가 산벚꽃 향기의 맛이라고 생각했다. 목련 같은 팔팔한 웃음이 섞였다. 미오였다.

 

 “좋네, 좋아. 그러면 이렇게 하자. 우리가 어른이 된 다음에 우리 밭에다 심고 싶은 꽃들 다 심는 거야. 그리고 린 말처럼 거기서 사철 내내 꽃놀이 하면서, 뭐 꽃향기로 밥 지어 먹기도 하고, 그러면서 사는 거지.”

 “에, 미오네 밭에?”

 “응? 아니, 아니. ‘우리 밭’. 나랑, 너랑, 얘랑. 우리 셋이 같이 지낼 밭.”

 “우리 세 사람의 꽃밭…. 좋네요. 약속하는 거예요?”

 

 산 오르막을 타고 바람이 솟았다. 산벚꽃이 와르르 몸을 떨었다.

 너희들이 같이 있어 줘서 기쁜 이 꿈 속 세상.



 어느새 풀빛이 어두워진다. 우즈키가 말했다.

 

 “노을이네요.”

 

 세상이 단순해지는 때. 황홀하게 섞이는구나, 붉고 푸르고 검은 세상들! 세상과 세상이 맞물린 틈새로 천지가 들숨과 날숨을 쉰다. 낮의 달뜬 공기가 빛의 국경 속으로 빨려들어가 묻히고 밤의 점잖은 숨이 스며온다. 그 동안 나의 가슴 안에 고여있던 무엇인가도 쑥 뽑힌다. 그것이 저 너머로 빨려간다. 세상의 틈바구니로 사라진 무엇인가를 나는 아침까지 찾는다. 앙다문 암흑이 짙어질수록 무언가를 찾기 위한 몸부림도 심하다. 나는 그 몸부림의 이름을 안다.

 오늘밤에는 좋은 꿈을 꿀 수 있을까.




 눈을 뜨니 부처가 웃고 있다.

 

 고약한 꿈이었다. 꿈 속에서 꿈을 이야기하고 꿈 속에서 꿈을 기대했다. 헛것의 껍질 속으로 거듭 파고들어 문득 깨달으니 생시였다. 살수 일을 한 날이면 가끔 생시보다 또렷한 꿈을 꾼다. 부처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아침녘! 몸을 일으켰다. 불당 문틈새로 빛살이 새어왔다. 오늘은 금객(禁客)한다는 가짜 표를 일주문에 세워두었으나 잠든 동안 한 명이라도 왔다면 낭패다. 피냄새는 입에서 입을 타고 퍼진다.

 

 우즈키와 미오를 흔들어 깨웠다. 이미 대낮이라면 보는 눈 없이 가람을 빠져나오는 데도 큰 문제다. 서둘러 봇짐을 챙기게 했다.

 미오가 마당의 나무를 타고 올랐다. 아직 사람이 보이지는 않는다고 했다. 북쪽 담을 넘어서 산 속으로 질러 갈 수 있다면 몸을 숨길 수 있을 것이다.

 

 “우즈키, 어서 가자.”

 

 대답이 없었다. 주위를 살폈다. 불당 앞에 우즈키의 뒷모습이 보였다. 쪼그려 앉아서 죽은 비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젯밤 자기에 거치적거려 우리는 비구의 주검을 앞마당에 던져 놓았다.

 나는 그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뭐하는 거야. 어서. 그렇게 말하려고 걸음을 옮기는데 우즈키가 고운 손을 뻗었다. 비구의 팔을 들었다. 추깃물이 안에 차기 시작해 흉하게 부풀 기미가 보였다. 우즈키가 송장의 팔을 흔들었다. 덜렁. 덜렁. 데엥. 데엥.

 금강령 소리 맞춰서 노랫소리가 들린다.

 

 나무 그루터기마다

 꽃은 피어나건만

 어찌하여, 사랑스런 그대는

 다시 피어나지 않는구나




 돌고 돈다. 봄은 미망의 고리. 꽃놀이는 멈춤 없다.

 

 가람을 떠나고 첫날, 시골로 물러난 늙은 기생을 베었다. 어화야 어화야 질 때가 늦었구나 사과꽃 놀음.

 

 우즈키가 다시 내게 검 손질을 맡겼다. 드는 느낌이 훨씬 좋아졌다고 했다. 나는 기뻤다. 너의 검이 날카롭기를 바랐다. 천으로 닦고, 숫돌로 갈고, 칼코등이를 조였다. 보라. 반짝이고 예리하다. 피 한 방울 남지 않는다. 작지만 아름답다. 우즈키의 검이다.



 둘째 날, 객쩍은 도참을 퍼뜨리는 맹인 점바치를 죽였다. 얼쑤 어절쑤 제 꺾일 때를 몰랐던가 톱풀(蓍草) 놀음.

 

 하늘이 모든 방향에서 나를 눌러댔다. 무섭다. 답답하다. 하늘의 비어 있음이 무섭다. 어찌하여 몸 기댈 담벼락조차 없는가. 그 빔에 가득 찬 푸름이 답답하다. 어찌하여 손끝도 움직이게 못하게 차 있나. 나는 싫다. 저 하늘. 저 빔. 저 채움. 저 푸름. 푸른 세상이 나는 싫다!



 셋째 날, 사서삼경을 가르치는 시골 글선생을 죽였다. 에여 디여 칼 없는 자가 바로 잔적(殘賊)이라오 엉겅퀴 놀음.

 

 나는 생각한다. 벚꽃향으로 지은 밥은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을 테니 참 좋겠다고. 왜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들까.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는 싫다.



 넷째 날, 꽃놀이는 없었다.

 꺾일 꽃 만발한 꽃길 위 무위(無爲)의 틈새에서 지난 살육들을 생각했다.

 

 위화감이 바늘처럼 따끔거렸다.

 비구를 죽인 그 밤 이후 우즈키는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눈으로 포착한 바를 말하자면, 웃음이. 피비린내 나는 세상에서 유리되어, 어느 섬의 꽃동산을 몸 없이 나닐고 있는 평소의 웃음이 아니었다. 그 웃음은, 여전히 검디 검었지만, 달빛의 성분이 느껴지는 어둠이었다.

 마치 어린 계집아이가 가마 속에서 놀다가 재를 덕지덕지 묻히고 나오는 것처럼, 그 밤 궤짝같은 법당 안에서 우즈키는 보이지 않고 지워지지 않는 것들을 뒤집어 쓴 듯했다. 그 밤의 어둠과, 달빛과, 침묵과, 금강령 울음을. 우즈키가 미소를 지을 때면 그미는 자기 안에 스민 금강령 울음을 듣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우즈키의 지금의 미소가 무서웠다. 죽은 비구의 금강령이, 내게는 들리지 않는 그 소리가 우즈키를 안에서 허물고 있는 게 아닐까.




 가람의 일이 있은 지 다섯 번째 아침이었다. 채비를 꾸리자마자 우즈키가 말했다.

 

 “지난번 그 절에 잠시 들렀다 가죠.”

 

 사위스러운 말이었다. 이유를 물었다.

 

 “부처님을 잠시 뵙고 싶어서요.”

 

 그 가람에 부처는 없어. 있다면 제 제자들이 피 속에 잠기게 놔뒀겠어.

 

 “아니요. 부처님은 그곳에 계셨어요.”

 

 일본 지천에 널린 게 가람이야. 왜 꼭 그 절이어야 해?

 

 “왜 린은 그 절은 안 되는 거죠? 전 꼭 그 절이어야 해요.”

 

 어째서?

 

 “그 절의 부처님께 다시 드릴 말씀이 있으니까.”

 

 짜증이 불쑥 치솟았다. 소리치고 싶었다. 마음대로 해. 가서 머리깎고 승무(僧舞)를 추든지 알아서 해 봐. 그런다고 부처님이 널 받아줄까? 천만에.

 …네가 부처야. 우즈키, 네가 우리들의 부처야. 제발 석씨(釋氏)니 자씨(慈氏) 따위의 흰소리에 널 바치지 마. 너는 꽃 위에 있어. 너도 꽃 위에 있다고. 번뇌가 없는 네 웃음으로 너는 수라여도 아름다워.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나를 미오가 바라보았다.

 

 “어차피 성으로 돌아가려면 이쪽 길을 지나야 해. 나흘 뒤 아침까지만 도착하면 되니까…. 잠시 들르는 것도 괜찮지.”

 

 나는 욕을 내뱉고 싶었다. 미오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 절에, 그 법당에 가까이 가면 달라붙은 외진(煨塵) 같은 그것들이 우즈키를 태워버릴 거야. 너는 그것을 몰라. 붉은 세상 사람이니까.

 그러나 나는 그렇게도 말하지 못했다.




 가람은 거기 없었다. 가람의 유해뿐이었다.

 

 먼발치서 검고 굵은 기둥이 하늘에서 꿈틀거리고 있었으므로, 고을에 들어서기 전부터 우리는 알고 있었다. 법당만이 아니었다. 요사채도 창고도 사천왕문도 모두 헐린 채 그득이 쌓여 검은 기둥으로 바뀌고 있었다. 걸죽한 검댕이 담벼락에 두창(荳瘡)처럼 박혀 있었다.

 

 “절, 없네.”

 “없네요.”

 

 우즈키를 보았다. 아쉬운 기색은 없었다. 무상한 얼굴로 뻗쳐오르는 연기기둥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오의 남초 연기 같네요.”

 

 풋, 미오가 작게 웃었다. 농을 쉽게 던지고, 남의 농에 쉽게 웃을 수 있다는 건 부러운 천품이다.

 

 “아니, 우즈키. 아니진 않지만, 저렇게 연기를 뿜어댔다간 난 뱃속이 검댕으로 꽉 차 죽을걸.”

 “후훗, 그러게요.”

 

 나는 무엇이 우스운지 몰랐으므로 대화에 끼지 않았다. 끼어든 것은 마을의 한 늙은 여인이었다.

 

 “그런 소리 하면 못써! 안되게 세상 마치신 분들인데, 감히 농지거리로 삼아 낄낄대는 게야!”

 

 노인의 목소리는 크고 거칠었다. 주위가 모두 노인과 우리에게 눈길을 모았다.

 부스럼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미오가 나섰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저희는 방금 이 마을에 들른 참이라, 상(喪)인지 몰랐습니다. 백중맞이 닮은 이 고장의 풍습이라고 생각했네요. 저희 고향에서도 비슷한 것이 있어서….”

 “그러고보니 이 마을 사람은 아니시구먼.”

 “예. 성 안의 높으신 나리님 심부름으로 동가식서가숙 발품 파는 치들입니다.”

 “영주님 댁 사람이오?”

 “직접 뵌 적은 몇 번 없어요.”

 

 노인은 당황했다. 엉거주춤하게 무릎을 숙이는 것을 보면 소리친 것을 엎드려 사과하려는 눈치였다. 미오는 황급히 몸짓과 눈빛으로 그럴 필요 없다는 뜻을 전달했다. 괜히 이목만 더 높여놓을 뻔했다는 것을 그제 깨달은 듯했다.

 

 “아니, 하지만 잘 됐소. 그럼 주인께로 가셔서, 이 마을 이야기 좀 전해주시오. 여기 이 터, 보시면 알겠지만, 원래 제법 넉넉한 절간이라오. 원래고 뭐고 며칠 전까지도 그랬지. 한데 사흘 전에 어떤 미친 놈인지 살인마가 이 절에 들어가, 고명하신 스님들부터 열서너 밖에 안 된 불목하니까지 칼로 죄 도륙을 내곤 도망쳤단 말이오. 지옥도 그런 지옥경이 없소. 하도 여기저기 피가 안 묻은 곳이 없어서 결국 절을 통째로 헐어야 했을 정도요. 저분들은 한번도 부처님 말씀을 어기고 사신 일이 없어요. 딴 고장의 승병이니 뭐니 하는 불한당 패하고는 전혀 달랐다오. 그런 분들을 그리도 끔찍하게 죽이다니, 세상에 이토록 흉악한 놈이 또 있겠소. 게다가 그 개같은 놈이 아직도 이 근처에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러니 돌아가시거든 그 나리께 부디 잘 말씀드려서, 그놈이 천벌을 받을 수 있도록 꼭 좀 도와주시구려.”

 

 할멈, 우리 나리께서는 이미 알고 계실 게외다. 그리고 우리에게 듣고 싶어하시는 말씀도 달리 있을 테고. 허나 그 개같은 놈들은 머잖아 여길 뜰 테니 걱정 마시구려.

 

 노인은 이야기의 끝에 가서 무릎을 꿇고 울어댔다. 노인 앞에서 미오는 그대로 굳어 있었다. 뒤꿈치를 들었다 내렸다. 도망을 참는 듯이 보였다.

 나는 우즈키를 보았다. 우즈키는 계속해서 연기 기둥의 뿜어짐만 응시하고 있었다. 노인의 하소연과 울음은 처음부터 듣지 않았을 테다. 우즈키의 옆에 서서 같이 연기를 바라보았다. 연기는 나무줄기가 무럭무럭 자라는 듯, 꽃봉오리가 함박 터지려는 듯했다. 마구 꿈틀거리고 뒤척였다.

 조용히 우즈키에게 중얼거렸다.

 

 “현명한 거야. 그런 대화(大禍)가 벌어진 가람을 어떤 승려가 다시 터 잡으려 하겠어. 다비(茶毘)로 함께 보내는 편이 낫지.”

 “그렇네요.”

 “불상이나 불단도, 그 비구의 시신도 이미 다 타서 흩어졌겠네. 사흘 내내 태워댄 모양이니까.”

 

 우즈키의 안색이 변했다.

 무념하던 얼굴에 어떤 동적인 것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의 빛이 온천수처럼 그미의 속에서 들끓어 나오고 있었다. 여전히 연기를 응시하고 있는 우즈키의 눈빛이 경쾌하게 일렁거렸다. 그미가 합장한 채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닷새 전 이곳 불당에서 지은 그것과 꼭 같았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나는 지금의 미소가 사위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아아, 달빛과 어둠과 침묵과―

 

 데엥.

 

 높고 약하고 맑고 오래도록 자국 남는 소리!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내 귀에도 들렸다. 금강령 소리다! 그 비구가 망령이 되어서도 썩은 팔을 흔들고 있구나.

 

 “가자.”

 

 우즈키와 미오가 나를 바라봤다. 우즈키가 말했다.

 

 “어째서요? 밤까지는 아직 멀어요.”

 “이렇게 시선을 모아놓고 더 있겠다는 거야?”

 “그래도요.”

 “가자.”

 

 두 사람의 반응을 무시하고 앞서 걸었다. 천 보를 걷고 뒤돌아보니 검은 연기는 보이지 않았다. 시야에는 오직 창공만이 남았다.

 오직 창공뿐.

 연기 기둥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들을 생각했다.

 불살리고 허공으로 산산이 흩어져 깃들 흙조차 없는 윤회의 꽃씨여.




 다시 반복. 돌고 돈다. 봄은 미망의 고리.

 우즈키가 노래했다. 미오가 담박괴를 태웠다. 나는 꿈으로 시달렸다. 그리고 나면 새로운 사람을 죽일 아침이 왔다.

 

 어느 날 꿈에서는 내가 우즈키를 베었다. 그 아이의 시체를 보며, 나는 흡족했다. 내가 만든 칼자국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묽디 묽은 벚꽃빛이었다. 나는 기뻤다. 문득 그 피가 탐이 나서, 혹은 샘이 나서, 혹은 다른 희뿌연 충동으로 그 피를 손에 담았다. 벚꽃빛 피를 내 입 안으로 흘려보냈다. 아! 꿈에서 깼다.

 

 어느 날에는 우즈키가 나를 죽였다. 그 아이의 방식으로.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는 이미 시체였다. 우즈키가 봄볕처럼 웃으며 내 주위를 돌며 춤출 때도, 아무렇지 않았다. 우즈키가 노래를 불렀다.

 

 나 바라건대

 벚꽃 아래서 봄날 죽고파

 그 겨울잠 깨는 달(如月)

 보름 무렵에

 

 시체인 나는, 시체일 터인 나는 갑자기 슬퍼졌다. 통곡하며 눈물 쏟고 싶었다. 우즈키를 끌어안고 울어주고 싶었다. 시체인 나는 너를 안아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나를 죽인 너를 원망했다. 감각을 잃은 목구멍에서 꺼윽꺼윽 울음이 터져 나오자, 꿈에서 깼다.



 연달아 물고 물리는 꿈들의 틈새에서 우즈키가 죽었다.




 원래라면 산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을 것이다.

 하늘 사다리처럼 굵고 무성한 은죽(銀竹)이 내렸다. 무수한 은죽을 대롱 삼아 창공이 쏟아져내렸다. 천 길 구름이 깔려 창공은 눈으로 볼 수 없었지만 몸을 때리는 차고 서리하고 육중한 기세가 곧 창공이었다. 깊게 베인 상처에 물기와 한기가 서려 나는 뒤틀리고 사무쳤다.

 

 미오의 목소리가 가늘게 들렸다.

 

 “린. 우즈키. …괜찮아?”

 

 너만큼이나 괜찮지 않아.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찢어지는 신음으로 살아있다는 것만 알렸다. 우즈키의 응답을 기다렸다.

 들리지 않는다.

 불길하다. 우즈키, 우즈키? 기어가 우즈키의 손목을 붙잡았다. 옅지만 맥이 있다. 하지만 흘린 피의 양으로 보아 오래 가지 못할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뜬눈으로 숨을 쉬는 그미의 허리를 가로지른 상흔에서 더운 피가 울컥울컥 샘솟았다.

 나는 옷을 찢어 상처를 감아주려 했다. 왼팔이 나무토막이 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어깨부터의 힘줄이 아예 끊어진 건가. 미오는 부서진 오른무릎을 악바리로 끌며 걸어왔다.

 

 참담하다. 이 광경은 누구의 그림일까.

 색출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많은 인명 목록 속에서 찾아내는 것도 한세월이겠지. 어쩌면 며칠 전 가람에 들렸던 것이 좋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니 하지만, 그 며칠 사이에 촌사람들이 살수를 사서 우리를 추적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째서 제대로 죽음을 확인하지도 않고 가 버렸단 말인가. 어쩌면 그들은 처음부터 죽일 생각 없이 싸운 걸까.

 번지는 ‘어쩌면'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알아낸들 어쩌리. 꽃은 질 때가 되면 지는 것. 피연못에서 피었어도 변명하며 지지는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저승사자로 온 것은 한 쌍의 무사였다. 얼핏 봐도 두 척은 족히 차이가 나는 체구가 인상적이었다. 미오가 물었다. 뭐하는 자들인가. 작달막한 쪽이 나르께한 어투로 말했다.

 

 - 복수 대행이다. 누군가의 친지로부터.

 

 살인을 말하는 자의 표정이 아니었다. 큰 쪽은 한 장은 됨직한 언월도를 들었다. 도무지 실전에서 쓸 수 있는 크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사는 잘도 뱅글뱅글 휘두르며 날렵하게 움직였다. 파고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작은 쪽을 사로잡아 으르는 수밖에 없었다.

 검을 뽑아들고 작은 무사를 향해 달릴 때, 어깨 쪽을 가는 불벼락이 뚫고 지나갔다. 나는 칼을 떨어뜨리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사는 길죽한 나무 대롱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등에 졌을 때는 칼집이라고 생각했는데 철포(鐵砲, 조총)였다. 듣기로만 들었을 뿐 본 것은 처음이었다. 맞은 곳이 오그라들며 타들어가 괴로웠다. 언월도의 무사를 상대하던 미오가 포성에 시선을 흐트러뜨렸다. 큰 무사는 자루 쪽 끝을 내찔러 미오의 다리를 쳤다. 뼈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즈키, 포기하고 도망쳐! 그렇게 소리치려 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큰 무사의 등 뒤에서, 우즈키가 소태도 두 자루를 들고 나비처럼 날았다. 무사가 몸을 뱅글 돌림과 동시에 언월도가 묵직한 호선을 그렸다.

 

 - 안 돼!

 

 오래 전부터 만작한 시위에 먹여놓은 화살처럼 그 말이 튀어나갔다. 우즈키의 한 쌍의 소태도는 무게가 실린 휘두름을 견디지 못하고 깨졌다. 소름끼치는 소리가 골을 후볐다. 거대한 언월도가 힘차게 가로그은 한일(一)자는

 

 이상하다. 너무 붉다.




 꿈에서 깨어나 너의 마지막을 상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너의 죽음을 보면서 나는 기쁘거나 슬프거나, 개운하거나 떨거나, 뒤엉킨 감정의 탁류 속에서 가누지 못하고 침몰하리라 여겼다. 혹은 느끼는 법을 잊은 채 나무처럼 관조하리라 여겼다.

 지금 너는 너의 꽃 위에서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느껴지는 것은, 이름붙인 마음의 모든 것이 소멸하는 감각. 기쁨이나 슬픔이나 고향이나 불당이나 개울이나 금강령이나 노래나 피나 나의 전 삶의 대극이, 네가 쥔 두 자루 칼처럼, 부딪히면서 소름끼치는 굉음을 내며 깨진다. 그 소리가 너무 끔찍해서, 나는 귀머거리가 되지 못한 나의 마음을 저주한다.

 깨진 파편들이 나를 발기발기 찢는다. 나는 틈이다. 창공이, 세 개의 세상이 찢긴 내 속으로 마구 쑤시고 들어온다. 나는 텅 빔으로 차서 지워져가고 텅 빔의 압력에 으스러져간다.



 무서운 허공이 나를 채워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린. 미오.”

 

 파리한 목소리가 희박해지는 나를 붙잡았다.

 

 “우즈키!”

 “우즈키. …미안해.”

 “꽃놀이는, 오늘로 판 접었네요.”

 “아니야, 우즈키. 괜찮아. 살수 노릇은 더 못하겠지만…. 오히려 잘 된 거야. 고향으로 가자. 고향으로…. 지금쯤이면 산벚꽃이 가득 피었겠지….”

 

 린, 나는 죽을 거예요. 정말 몰라요? 우즈키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그 밤의 불상 같았다. 어째서인지 알 수 없으나,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몸을 짓누르던 허공의 압력이 사라졌다.

 어떻게 너는 이 순간에 그렇게 평온하게 웃는 걸까.

 

 “그래도 두 사람은 치료받으면 살 수 있죠? 고향으로 가세요.”

 “우즈키! 무슨 소리야. 우린 함께 지는 거야. 그러기로 했잖아.”

 

 미오가 울었다. 말은 울음의 일부로 섞여 나왔다. 나의 슬픔은 웃음으로도 울음으로도 나오지 못했다. 그것으로 다시 슬펐다. 기어코 우리 셋은 마지막까지도 서로 다른 세상에 있는가.

 

 “같은 때 핀 꽃이라고, 꼭 같이 지는 건 아니에요. 벚꽃이란 피는 순간부터 지기 시작하는 법이니까. 나는 지금 이 순서가… 마음에 들어요.”

 

 죄만 봐도 내가 먼저 가는 게 맞아요. 린이랑 미오는 고향으로 가세요. …너는 그 말이 얼마나 우리를 으깨고 있는지 몰라. 너는 검은 세상 사람이니까.

 

 우즈키의 숨이 거칠어졌다. 목구멍의 살점을 긁어내듯이 각혈했다. 그 광경에 비로소 나와 미오는 이해했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죽음의 실질을. 우즈키가 말했다.

 

 “린, 미오. 미안해요. 언제나 폐를 끼쳤죠.”

 “아니.”

 

 우리는 동시에 답했다. 답하고 나서 의심했다. 이번에도 오랫동안 시위를 당겨온 것처럼, 말이 나왔다. 나의 ‘아니'는 진심인가? 미오의 그것은? 알 수 없지만 상관 없었다. 우리는 안다. 네 탓인가 내 탓인가, 옳은가 그른가를 따질 정도로 제정신인 사이가 아니었다. 진심과 거짓조차도, 이제와서 마찬가지다. 우리는 피안(彼岸)에서 만났어야 했는데.

 

 “미오.”

 

 힘이 실린 목소리가 우리를 놀라게 했다. 우즈키는 미오를 똑바로 올려보았다.

 

 “나를 위해서는 다비할 필요 없어요.”

 

 미오의 눈동자가 커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깊이 교차했다. 내가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우즈키가 눈으로 웃었다. 미오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우즈키는 눈을 내 쪽으로 돌렸다.

 

 “린. 고마워요.”

 

 네가 내게 고마워할 건 아무것도 없어. 정말이야.

 

 “그동안 제 꽃놀이에 어울려주느라, 고마워요.”

 “아니야. 벚꽃은 다음 번에도 피니까. 그때 다시, 노래하고, 춤추고, 셋이 함께….”

 “그러네요. 다음번엔 더 좋은 세상에서.”

 


 - 산벚꽃은 세상이 꿈꾸는 중이라는 증거예요. 끝이 오면 누구나 끝이란 걸 알 수 있도록 눈부시게 지죠.

 

 잠든 너의 얼굴에서 산벚꽃 향기가 났다.




 곰배팔이와 절름발이가 가기에 고향은 너무 멀었다. 가람 터에는 재와 검댕이 수북했지만 사람은 없었다. 우즈키는 그 잿더미 속에 묻혔다. 봉분도 없는 평토장이었다. 그미가 잠들 장소는 그곳뿐이라고, 남은 둘은 이해하고 있었다.

 

‘우즈키.’

 

 너를 덮은 이 재는, 네가 죽인 비구의 잔해다. 비구는 네게 웃으라 말했지. 언젠가 다시 웃게 될 거라고 했지. 너는 그때 기쁨을 느꼈던 거지. 알고 있어. 네 표정을 봤어. 너의 기쁨을. 하지만 너는 거부했지. 금강령 소리를 들으며, 너는 베고 또 베었어. 너는 돌아가지 않기로 했어.

 

 그러니 우리는 너를 이곳에 재운 거야.

 

 그 무덤 앞에서 나는 비구가 말한 윤회를 생각했다.

 백년 후일까 천년 후일까. 이 가람터에서 네가 다시 피어난다면. 그 곳에서부터 다시 인연 맺기를. 노래 부르기를. 무희(舞姬)로 살기를.

 

 벚꽃 피지 못한 봄. 나는 노래한다. 우즈키는 이 노래를 부르며 울고는 했다.

 

 이 봄 지나면 자취 삼아서

 머리에 꽂아 꾸밀까 했건만

 벚꽃일랑 산산이 져버려

 아련히 흐르는 꽃내음 알 뿐



5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