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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무희(武姬) 이야기 - 上. 수라불(修羅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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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5-05, 2017 08:04에 작성됨.

※ 전국 시대 시대물 설정입니다.

※ 다소 잔인할 수 있는 장면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上. 修羅佛.

 

그럴 가치도 없는 이 세상

도처에 벚꽃이

피었네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벚꽃 아래

이렇게 내가 살아있음이

 

- 小林一茶

 




 을씨년스럽다. 지독한 푸름. 한 점의 얼룩도 없다. 한 겹의 장막도 없다. 땅에서 솟아난 것들을 빼면, 온 세상이 푸름으로 텅 비고 그 온 빔이 투명한 빛의 채움이라 저 하늘에는 명암이라고는 없다. 명암만이 아니라 하늘은 굴곡도 끊김도 흩어짐도 없다.

 고개를 올리고 있으면 끝없이 빨려 올라가는, 결국은 닿지 못하는, 시선이 부딪쳐 돌아올 수도 없는, 까마득한 빔. 사람과 가장 격조한 하늘. 창공(蒼空).

 

 하늘이 나를 익사시킨다. 나는 시선을 내렸다.

 우즈키가 나풀나풀 사내의 주위를 맴돌며 살을 도려냈다. 생피가 공중으로 튀어올랐다가 인상적인 자국을 남기며 땅에 스민다. 팔을 베인 피가 스미는 사이 옆구리에서 새 피가 튄다. 비명. 사뿐한 걸음으로 두 자루의 소태도(小太刀)를 휘두른다. 날갯짓으로 돌개바람을 일으키는 나비가 있다면 꼭 우즈키와 같으리.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아름답다. 비명을 덮는다.

 

 소매 흔들며 자아

 우리의 정원으로 가자

 꾀꼬리 가지 옮길 때마다

 떨구는 매화를 보자꾸나

 

 나는 답가를 속으로 왼다.

 

 산그늘 속에서 자란다는

 바위솔을 머리에 쓰고

 그에 더불어 매화마저

 즐기며 노닐고자 하는가

 

 꽃놀이. 우즈키는 살육을 꽃놀이라고 부른다. 나와 미오는 꽃놀이패의 일원이다.

 

 “린. 미오. 오늘 꽃놀이도 재미있었죠?”

 “응. 그렇네.”

 

 미오의 대답.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입을 열지 못한다. 뺨에 묻은 피를 소매로 문질러 닦는 모습이 어여쁘다.

 

 “아쉽지만, 이젠 더 꽃이 안 피네요. 어서 가요.”

 “린, 나 좀 봐.”

 

 미오가 내 소매를 잡아 끌었다. 나는 먼저 걸음을 뗀 우즈키를 잠시 쳐다보다, 미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귀에 대고 속삭였다.

 

 “우즈키의 칼부림이 점점 심해져.”

 

 싸워야 해서 싸운 거잖아. 나는 대꾸한다.

 

 “한 사람을 스물여섯 번이나 벴어. 바로 죽을 상처는 교묘히 피하면서 일부러 천천히.”

 “그걸 셌구나. 어제 오늘 일이야?”

 

 우즈키의 방식. 결코 사람을 한번에 베지 않는다. 도망치지 못하게 종아리를 벤 뒤, 주저앉거나 엎드린 상대의 주위를 춤추듯이 돌면서 잔상처를 새긴다. 그저 충분히 피가 뿜어질 만큼만. 여기저기서 뿜어지던 핏줄기가 완전히 가라앉으면 꽃놀이가 끝난다.

 우즈키는 자신이 고안한 꽃놀이를 즐긴다. 하지만 자신이 만든 주검은 싫어한다. 칼집이 마구 나 있는 고깃덩이는 완상(玩賞)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그미의 고견이다. 그 견해에는 동의하지만, 그렇다면 꽃놀이 방식 자체에도 재고가 필요하지 않은가 하고, 미오는 말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차피 죽여야 하는 사람이다. 우즈키는 죽음을 노래로 춤으로 만든다. 너의 미소는 전장을 한봄의 꽃산으로 만드는 작은 기적이다. 너의 웃음이 아름답다.

 

 “린, 수라불(修羅佛)이라는 말 알아?”

 “몰라.”

 

 거짓말은 사람을 베는 일에 비하면 쉽다.

 

 “사방에 풍문이 도는 모양이야. 꼭 부처님처럼 온화한 미소를 지으면서 사람을 난도질해 흉물스럽게 죽이는 살인객이 있다고. 피바다에 잠긴 사람을 앞에 두고, 옥구름 같은 미성으로 대자대비를 게송하는 대신 유락(愉樂)의 노래를 부르는 인두겁을 쓴 수라라나 봐. 누군지 알지?”

 “그래서? 앞으로는 부처 말고 야차 같은 표정으로 죽여달라고?”

 “함박웃음의 살인귀보다는 오만상인 쪽이 낫지.”

 “그러면 떠나. 우즈키도 널 죽이진 않을 테니.”

 

 아마도. 일부러 생략한 그 말을 미오도 이미 아는지 쓰게 웃었다.

 

 “그럴 순 없지. 알잖아. 우리 세 송이, 한 시절에 함께 피었어. 지는 것도 함께 지는 거야.”

 

 미오가 웃었다. 우즈키의 웃음만큼 밝지는 않았다. 우즈키의 웃음만큼 선드러지지도 않았다. 슬픈 웃음이었다.

 

 수라불. 잘 맞춤한 이름이다. 하나의 생명을 베어 꽃으로 만들며 너는 웃는다. 그것은 또 하나의 염화미소(拈花微笑)다. 만일 네가 부처라면 수라 세계의 부처일 테다. 부처에게는 신장(神將)이 있어야 한다.

 미오, 우리가 우즈키의 신장이 되자. 너는 목련을 따고 나는 도라지꽃을 꺾어서, 저 아이의 좌우로 우뚝하니 지키고 섰으면 해.

 미안해. 미안하지만, 그래 주겠지.

 

 “그러니까 같이 있을 거야.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언제까지고.”

 

 나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웃었다. 내 곁에 있어줘서 기뻐. 우즈키도, 너도.

 

 “다들 안 오세요?”

 

 저만치 멀리 걷다 우리가 뒤처진 걸 깨달은 듯하다. 우즈키의 부름에 우리는 서둘러 걸었다. 우즈키가 따스하게 말했다.

 

 “노을이네요.”

 

 세상이 단순해진다. 동백꽃은 동백꽃빛 산수유는 산수유빛 살구꽃은 살구꽃빛 밝히던 백일하의 세상이 삼국(三國)으로 응축된다. 붉은 세상. 푸른 세상. 검은 세상. 이 단순한 세상, 엄중한 편가르기. 사람도 예외는 없다. 내가 적을 둔 세상을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우즈키의 세상은 안다. 다른 두 세상을 그러안고 앙다물 세상. 잔인하고 순결한 빛깔.

 

 “다 저물기 전에 서둘러야죠. 다음은 어디라고 하셨죠?”

 

 미오가 품에서 종이를 꺼내 폈다. 읽어주자 우즈키가 부드럽게 웃었다. 붉고 푸른 세상에 너의 웃음은 검디 검다.

 

 “오늘 밤에는 우담바라 꽃을 보겠네요.”

 



 사내는 젊은 비구였다. 미간부터 새긴 팔자주름이 깊어 늙숙해 보였다. 비구는 금강령을 손에 쥐고 굳었다.

 

 고을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외우고 있을 만한 크기의 고을이었고, 고을의 크기에 비추어 과하지도 조촐하지도 않은 가람이었다. 금강문을 지키는 불목하니 둘의 목젖에, 공양주 행색을 하고 온 미오가 표창을 던졌다. 안으로 들어와 쥐걸음으로 둘러보아도 병고(兵庫)는 보이지 않았다. 일은 쉬웠다.

 미오가 불목하니들이 기숙하는 좌측 요사채를, 나는 승방인 우측을 맡았다. 우즈키는 마당 복판에서 도망하는 사람을 베기로 했다. 미오의 부탁이었다. 나는 칼집에서 칼을 뽑은 채 승방의 문을 박찼다.

 

 승려들은 순하게 죽었다. 나는 향불을 끄는 듯이 그들을 죽였다. 칼을 뽑아 몸을 가를 때도 소음이 나지 않았다. 승려들의 몸은 살과 근육이 없고 뼈는 약했다. 그들은 목전에 선 죽음을 묵묵히 감당한 것처럼 몸을 횡으로 통과하는 죽음의 실질에도 결을 내주었고 저항하지 않았다. 베고 나자 그 베기 편함에 어찔했다. 결벽한 무저항이 창공을 느끼게 했다.

 도망자는 없었다. 왼쪽 요사채에서는 익숙한 소리가 났다. 물건 소리와 사람 목소리. 그리고 사람 몸소리. 곧 잠잠해지자 나는 마당으로 갔다. 기다리고 있을 우즈키가 없었다. 뒤이어 온 미오도 눈으로 내게 물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뎅, 높고 약하고 맑은 종소리가 잔물결처럼 귓전에 부딪쳐 스러졌다. 눈과 발이 법당으로 향했다.

 그곳에, 커다란 궤짝 같은 허허한 법당에, 우즈키와 비구가 있었다. 비구는 부처와 마주 앉아 있었고, 우즈키는 그런 비구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우즈키가 법당에 들어온 나와 미오를 보았다.

 

 “잘 노셨나요?”

 

 고개를 끄덕였다. 눈짓으로 사내를 물었다.

 

 “심심해서요. 부처님이라도 뵐까 싶어 들어왔는데, 이 스님 혼자서 배를 올리고 계시더라고요.”

 “왜 안 죽였어?”

 “다른 데 가실 것 같지도 않으니까, 두 분 오시면 같이 놀려고.”

 

 기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금강령 소리가 다시 들렸다. 법구를 손에 쥔 비구가 우즈키를 보았다. 법당의 어둠이 다섯 보 밖의 그를 가리고 있었다. 나와 미오는 문지방에 그대로 머물러 그 어둠을 바라보았다. 불쾌한 침묵의 울타리가 그들과 우리 사이에 있음을 느꼈다.

 동굴같은 법당의 저편에서 주고받는 소리를 들었다.

 

 “스님, 이렇게 맞뵈니 인물이시네요. 사문보다는 무골이 어울리는 풍채시지만.”

 

 대꾸가 들리지 않았다.

 

 “스님, 이제 스님과 같이 꽃놀이를 하려고 해요. 그렇게 무정히 계시지 말고 웃어주셔요.”

 “보살께서는 어찌 소승더러 웃으라 하십니까.”

 “꽃놀이인데 우거지상을 하고 계시면 제가 놀 흥이 나지 않는답니다. 스님께서는 곧 곱디고운 우담바라로 피어오르실 테니까, 곱디 곱게 웃으셔야지요.”

 “소승은 이미 웃고 있습니다. 보살께서도 웃으시지요.”

 “저야말로 지금 웃고 있는데요. 퉁명한 표정으로 절 마주하고 계신 분은 스님이세요. 스님만 웃으시면 돼요.”

 

 다시 대꾸가 없다. 밤의 가람의 당연한 적요가 갈수록 불쾌해졌다. 처음엔 향연(香煙) 같았던 침묵이 이제는 걸죽한 진구렁처럼 달라붙어 굳었다. 멈춘 채인 우즈키가 답답했다. 백마비마(白馬非馬)의 변설로 죽음을 모면하려는 요승의 썩은 선문일 뿐. 말이 아니라 칼로 베면 그뿐이다.

 

 “내생(來生)에는 보살님과 소승이 웃으며 인연 맺을 때가 있을 겁니다.”

 “만만불가죠. 스님께서는 고매한 불제자시니 아마도 도솔천으로 가실 것이고, 이 계집은 켜켜이 쌓인 살겁으로 천겁을 아비지옥에서 보내게 될 처지인데, 아무리 부처님 자비라도 어찌 저와 스님이 다시 만나겠어요?”

 “사람은 한 생을 사는 중에도 일각만에 천겁의 틈이 파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업(業)의 천겁과 일각은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외계의 꽃도 한 번 피어남을 위해 천겁의 인연을 마십니다. 마음의 꽃을 피우는데도 응당 그러할 것입니다. 마음의 꽃을 피운 이에게 도솔천과 아비지옥이 다르지 않습니다.”

 

 법당의 침묵이 수렁에서 소용돌이로 바뀌었다. 실재와 그림자가 뒤섞인 형체가 들썩였다. 떨고 있는 것은 우즈키로 보였다.

 

 “말씀을 잘 모르겠어요 스님. 절 보세요. 이런 얼굴을 웃는다고 하지 않나요? 그런데 스님은 저더러 웃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계시네요. 그리고 스님은 그렇게 인왕(仁王)님처럼 무거운 표정을 짓고 계시면서 당신 스스로는 ‘이미 웃고 있다'라고 하시고요. 무슨 뜻이죠?”

 “소승은 소승의 일각과 소승의 천겁을 모두 품에 안아, 일각의 소승도 아끼고 천겁의 소승도 아낍니다. 그러나 보살께서는 당신의 일각과 당신의 천겁을 모두 안고서 괴로워 차마 아끼지 못하십니다. 그러니 소승은 웃지만 보살은 웃지 않는 것입니다.”

 

 저 망할 놈의 중을 베야 해. 내가 베야 해.

 그렇게 생각하자 무언가에 묶여 있던 다리가 순식간에 몸을 앞으로 밀었다. 그 때, 그림자가 바윗돌에 부딪힌 급류처럼 거칠게 출렁이더니 소리를 내었다. 투둑 끊기고 부서지고 훅훅 튀는 소리. 데데데엥, 금강령 울음.

 우즈키가 칼로, 비구의 목 아래부터 명치까지를 직선으로 그었다.

 

 미오가 초를 밝혔다. 비구는 앉은 자세 그대로 절명해 있었다. 숨이 너무 빨리 끊겨 몸부림칠 시간도 없었던 것이다. 손에 잡은 금강령을 놓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검을 꽉 쥔 채 죽은 무사들이, 때로 손이 돌처럼 굳어서 죽은 후에도 힘이 빠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우즈키가 고개를 숙인 채 숨을 몰아쉬었다. 연마되지 않은 감정의 휘몰아침이 느껴졌다. 단칼에 죽이는 것은 우즈키의 방식이 아니었다.

 

 “우즈키.”

 

 고개를 숙였다 드는 그 찰나에 우즈키의 얼굴을 보았다.

 

 “린, 잠시 비켜줘요.”

 “우즈키.”

 “아직 놀지 못했어요.”

 

 자신이 비구의 몸에 남긴 단정한 죽음을 우즈키는 칼로 천천히 덧그었다.

 어깨를 베었다. 옆구리를 베었다. 종소리가 울린다. 허벅지를 베었다.

 죽은 몸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핏줄기는 매가리가 없어서 진물처럼 보였다. 베고 다시 베었다. 쇠붙이가 때리고 지나갈 때마다 송장이 팔을 떨었다. 법당 안에 금강령 소리가 메아리쳤다. 우즈키는 칼부림으로 송장을 연주했다. 웃고 있지 않았다.

 

 야화(夜花)가 시들어 피면서 지고, 부수듯이 부시듯이 금강령 소리.




 가람에서 묵기로 했다. 아직은 밤이 추웠다. 승방의 시체를 치우기 곤란했으므로 우리는 불당에 머물렀다. 우즈키는 곧장 누웠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아 우즈키의 검을 닦고 지마해주기로 했다.

 하늘과 땅이 흘레붙어 또 새 날을 잉태하는 밤.

 짚신에 닿는 마당의 촉감이 푹신했다. 허리를 구부려 흙을 한 줌 움켜쥔 뒤에 손을 비벼 문질러 보았다. 봄 흙이었다. 흙은 바스라지지도 흐르지도 않았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물기가 풀리면서 들뜬 흙은 부드럽게 엉기었다. 그러나 물기 자체는 그대로 남아 축축하였으며 들뜬 틈으로 볕이 깃들어 온후하였다. 씨앗을 품기에 낙낙하리라. 아기를 먹여 양육하는 어머니의 젖무덤 같은 흙이었다.

 

 ‘적어도 꽃들에게는 이 가람이 정토겠지.’

 

 눈을 감았다.

 상상의 씨를 가람 곳곳에 뿌린다.

 

 못에 정갈하고 수줍은 수련. 흙담의 네 귀퉁이에 향기 청량한 매화. 담벼락 아래를 총총 따라서 속삭이는 제비꽃. 정인 만난 처녀처럼 발그레한 복사꽃. 형상 아닌 온기에 때깔 입힌 산수유. 꽃대궁 낭창하고 자품 선연한 창포꽃. 조신히 견디게 하소서 기도하는 귤꽃. 바글거리면서도 소란하지 않는 수국. 까르르 터지는 어린것들의 웃음 같은 유채꽃. 겨울에도 색이 있음을 알려주는 동백꽃. 돌틈에 비척이면서도 투정 않는 패랭이꽃. 비단 치마 곱게 싼 아씨 같은 해당화. 나그네가 고향 길을 잊게 하는 나리꽃. 보무 당당하고 기세 등등한 모란. 봄이 기른 한겨울의 아이 살구꽃. 물안개에 나래 젖은 독나비 같은 투구꽃. 기지개 틀며 요염한 눈길 던지는 얼레지. 허심탄회한 봄볕의 등잔 목련. 수다 떨기를 싫어하나 말없이 신후한 도라지꽃.

 그리고 그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꽃. 노래처럼 번지다가 춤으로 지는 꽃.

 

 손 안에서 흙은 계속 비벼졌다. 불전의 흙은 살수의 손보다 고왔다.

 꽃이 좋았다. 그래서 흙으로 비로 해로 살고 싶었다. 집 앞에 나의 꽃밭을 마련하는 꿈을 꾸는 소녀였던 적이 있다. 소녀는 향기로 배 채우고 꽃잎으로 옷 지을 오활한 각오를 한다.

 

  - 린, 그 꽃 향기만은 내게 파세요. 그걸로 밥 지어서 셋이 먹어요.

 

 감은 눈을 떴다. 검날을 타고 내려온 핏방울이 떨어져 흙 속에 스몄다.

 나는 비구가 말한 윤회를 생각했다. 저 피가 꽃씨가 되어, 핏방울이 스민 자리에 봄이 와서 꽃이 핀다면, 그것이 윤회련가. 그 꽃이 그인가.

 

 나는 떠올린다. 피는 흙 속에 스미고, 피는 사토 안에서 단단하게 맺힌다. 흙이 주는 풍요로운 양분을 먹어 피는 이윽고 스스로 맥동한다. 그렇게 피 안에서 원기가 생육하고 피는 하나의 생명이 되고, 여물 만큼 여문 생명은 맥동으로 흙을 밀어올린다. 그렇게 싹 트고 잎 돋고 봉오리 벙글어져 소담한 꽃은 곧 그고 그의 피고 그의 내세련가. 장차 저 자리에 피어오른 그는 다시 금강령 소리를 낼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무엇으로 필 것인가…….

 

 사람은 사람마다 다르니 죽어서 피는 꽃도 다르겠지. 꽃으로 다시 난다면 이 생에 어울릴 꽃은, 나를 알던 이들이 보고 다가와 나를 떠올리며 탄식할 꽃은, 진정 그이답게 피어 그이답게 지었다 할 만한 꽃은….

 

 검을 휘둘러 핏방울을 털어냈다. 털어낸 검에도 피는 여전하다. 전부 헛말이다. 피는 꽃씨가 되지 못한다.

 굳기 전에 기름 먹인 천으로 피를 닦아내야 했다.




 노랫소리가 들렸다.

 

 그 달도 아닌가

 봄도 옛날의 봄 아닌가

 이내 몸 하나만이

 옛 몸 그대로구나

 

 나무를 타고 법당 지붕에 올랐다. 미오는 대롱을 입에 물고 있었다. 담박괴(淡泊塊)다. 여러 해 전부터 미오가 즐긴 취미다.

 

 “지붕 위에서 그러고 있으니 정말 작은 굴뚝인걸.”

 

 미오가 연통을 입에서 뗐다. 매화 봉오리 같은 입술이 불안개를 뿜었다.

 

 “난 남초가 정말 영험한지 잘 모르겠어. 그렇게 태우다 목구멍에 그을음이라도 지면 어떡해?”

 

 미오는 키득거렸다. 머금은 맵고 뜨거운 기운과 달리 웃음소리는 청량했다. 불안개 먹으면서 뭘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달맞이. 한데 구름이 가렸어.”

 “달? 오늘 보름날도 아닌데 무슨 달맞이.”

 “노는 입에 염불.”

 “입은 안 심심하잖아.”

 

 달은 차오르고 있으나 반을 채우지 못했다. 너울처럼 큰 구름이 달을 가려 달빛은 구름만을 적실 뿐이었다. 희번한 구름은 거대한 달무리 같고 달은 구름 껍질에 숨은 알맹이 같았다. 천지의 구분도 사라진 세계에 오로지 구름에만 명암이 있었다. 구름은 동에서 서로 뻗었다. 동은 들짐승 무리처럼 거세고 빽빽하더니 서로 갈수록 성근 밭이랑 같았다가 곶에 부딪혀 산개하는 파도 같았다가 이윽고 잉걸에서 튀어오르는 불씨로 아련해졌다. 달은 들짐승 떼와 밭이랑과 파도와 불씨의 장벽 너머에 묻혀 있었다.

 미오는 막막히 하늘을 보았다. 달이 구름을 벗어나기를 기다린다고 하였다. 나는 청정한 달빛의 바다를 생각했다.

 

 “보름이 되면.” 미오가 담박괴 연기를 마셨다 뱉었다. “다음 그믐때 전까지 꽃들이 피겠지.”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다음에 할 말을 고르고 있을 터였다.

 

 “고향에 꽃이 한창일 거야. 그 때 맞춰서 내려가자.”

 “지난번에도, 지지난번에도 그랬지. 내려가자고.”

 

 미오는 미간을 찡그렸다. 꽃놀이도 천렵도 단풍도 설경도 발걸음을 고향으로 돌리게 하진 못했다. 그미에게 연민이 들었다. 훌훌 버리지도 못하고 기어코 견디지도 못할 그미.

 

 “이 노릇, 이젠 정말 끝이어야 해, 린. 조금 전에 봤지. 우즈키 말이야, 평소 같지 않았어.”

 “달랐지. 하지만 넌 우즈키의 평소 방식은 싫어했잖아.”

 “단칼에 죽여서 이상하다는 게 아니야. 우즈키가 전혀 웃지 않았어. 뭔가에 화가 났던 것 같아.”  

 

 화가 났다고?

 미오, 청맹과니로구나.

 어쩔 수 없어. 너는 붉은 세상 사람이니까.

 

 “왜 그렇게 칼질에 분이 실렸는지는 모르겠어.”

 

 그리고 아마 물을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즈키의 심경에 변화가 있다면 설득해볼 수 있어. 다시 우리 마을로 가자고. 이번엔 다를지도 몰라. 도와줘. 중춘(仲春)이 되기 전에 벚꽃 맞을 준비를 해 두자.”

 “우리 셋을 위해, 가장 쉽고 좋은 방도가 있어.”

 

 미오는 연통을 뒤집어 털었다. 그 작업을 하면서 눈길을 내게 붙이고 있었다. 뭘 생각하고 있느냐는 물음이 얹혔다. 나는 대답했다.

 

 “지금 우즈키를 죽이자.”

 

 미오의 표정을 보았다. 말을 이었다.

 

 “이름은 이름일 뿐 사람은 아니야. 잠든 우즈키를 베면 아침에 남는 건 꽃띠 처녀의 주검뿐. 돈독한 불심으로 새벽 일찍 공양을 드리러 가람에 들렀다가 변에 휘말린, 자신이 피비린내 나는 운명의 한가운데에 발 딛으리라곤 생각도 해본 적 없는 마을 처녀만 남는 거지. 인두겁을 쓴 살인귀 수라불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던 거고. 처음부터 둘이었던 너와 나는 고향으로 내려가면 돼.”

 

 물론 고을 사람들이 얼굴을 확인하면 지인이 아니라는 것은 금세 들통이 날 것이다. 그러나 누가 그 구름 같은 머리칼과 꽃 같은 얼굴을 보고 칼부림하는 수라를 떠올릴까. 처음 보는 처녀 시신의 출처에 대해 떠오르고 가라앉을 부산한 말(言)먼지 중에, 웃으며 사람을 난도질하는 칼잡이 여자에 대한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

 죽는다는 사실도 모르고 죽는 우즈키의 얼굴은 평온하리라. 고통도 슬픔도 없이 떠나, 그 누구도 너의 어둠을 찾지 못하고, 너는 살인귀라는 비난 대신 매옥(埋玉)의 안타까움을 위로하는 목소리 속에서 잠들 수 있다. 그런 죽음은 네게 나쁠까.

 

 “마음에도 없는 농담 하지 마. 그리고 농으로 쓸 거리가 따로 있어.”

 “가장 쉽고 나은 방도를 말한 거야.”

 

 다음 말까지 미오의 침묵은 길었다. 구름은 아직도 넉넉하게 달을 품었다. 그 물비늘 같은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는데 미오가 말했다. 안색과 밤을 구별하기 쉽지 않았다.

 

 “너는 그 때로 우리가 돌아갈 수 있다고 믿지 않는구나.”

 “믿음의 문제가 아냐. 나는 알고 있는 거야.”

 

 미오의 이목구비가 제각기 따로 놀았다. 눈은 슬퍼했고 코는 침착했으며 입은 각오를 다졌고 귀는 분노했다. 그 기묘한 표정. 목소리는 먼지를 불어내지 못한 피리 소리였다. 연민과 경멸을 동시에 느꼈다.

 

 “겨우 석 해 전이야. 멀리 돌아가는 것도 아니잖아.”

 

 아니야. 그건 전생의 일이나 마찬가지야. 사흘 전이었어도 돌아가지 못해.

 

 대화를 맺고 싶었다. 적당한 말주변이 떠오르지 않았다. 말리지 않겠노라고 대답하려는데 처마 아래서 기척을 느꼈다. “두 분 다, 새벽닭 대신 울어주려고 지붕에서 그러고 계신 거예요?” 우즈키였다.

 

 “깨웠어?”

 “방금 일어났어요. 두 사람은 안 잔 거예요?”

 “잘 거야. 칼은 갈아서 향대 아래에 뒀어.”

 “두 자루 다?”

 “두 자루 다.”

 

 고마워하는 우즈키에게 멋쩍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미오의 눈짓을 받고 지붕을 내려왔다. 우즈키가 내려온 나와 미오의 손을 잡고 끌었다.




 미륵 석가 지장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우즈키는 웃는 얼굴이라고 했다. 웃는 얼굴이라 생각하니 웃는 듯도 보였다. 기왕 셋 다 일어났으니 같이 부처님께 기도 올리고 자자고 얘기한 것은 우즈키였다. 미오와 나와 우즈키가 일렬로 섰다.

 

 우즈키는 우바니다. 스스럼없이 파계를 하지만 우즈키는 부처를 존경한다. 길을 가다가 지장상을 만나면 매양 합장하고 허리를 숙이는 그미다. 우즈키는 불법을 믿는다. 다시 말해 우즈키는 지옥을 믿는다. 죽은 후 자신의 넋은 가죽이 벗겨지고 달군 쇠창에 꿰이고 불타는 수레에 묶이고 쇠매에 눈이 파먹힐 것임을 믿는다. 그런데도 우즈키는 가람에 오면 늘 불상을 앞에 두고 눈을 감는다. 우즈키가 부처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나는 불법도 극락도 지옥도 믿지 않는다. 무엇보다 나는 윤회를 믿지 않는다. 실눈으로 옆을 쳐다보았다. 우즈키가 합장한 채 미소짓고 있었다. 마치 어린 보살 같았다. 자신의 살겁을 참회하는 것인가. 구세를 바라는 것인가. 그러나 눈을 감은 우즈키는 오히려 어떤 희열을 웃음으로 싸고 달싹이고 있었다.

 

 네 피의 붉음은 묽고 짠맛은 진하기를.

 

 수라에게도 눈물은 있다. 너는 맥박으로 울고 눈물로 너의 심장을 절인다. 눈물은 핏물에 섞여 너의 안에 갇혀 휘돈다. 그렇게 수십 수백 차례의 울음이 덧싸이고 덧싸인다. 네 피의 붉음은 묽고 짠맛은 진하기를. 바라건대 네 피와 눈물이 다르지 않았더라면. 맥박과 울음이 한가지였더라면. 피의 눈물을 흘리고 눈물의 피가 흐르는 그런 괴물이 차라리 되었더라면.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은 이 밤이 지날 때까지 구름 안에 갇혀 있을 모양이었다. 어디선가 금강령 소리가 울렸다. 아아, 창공을 허우적대다 익사하느니 평온하게 가라앉았으면. 저 달빛의 바다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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