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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제] 도묘지 카린 "낡은 신앙과 새로운 소라나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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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4-30, 2017 23:46에 작성됨.

쓸데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바글거리던 벚꽃 축제도 끝났다. 예의없고 몰상식한 방문객들이 남기고 간 쓰레기들은 도묘지 카린의 손에 의해 쓰레기봉투에 담기고 모여서 거대한 산을 이루었다. 더워지기 시작한 날씨 탓일까, 봉투 안에 대충 우겨넣은 음식물 쓰레기들은 밀폐된 쓰레기봉투 안에서 상종하지 못할 끔찍한 무언가로 변하기 시작했다. 쓰레기 산이 악취를 뿜어대는 괴물 비슷한 무언가가 되기 전에 청소부가 와주면 좋겠다고 카린은 생각했다.

카린에게는 조금 안타까운 일이지만, 환경미화원은 어엿한 공무원이고 주말에는 일하지 않고 오늘은 토요일이다. 도심지의 환경미화원은 토요일에도 일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지만, 그녀가 사는 시골에선 기대하기 힘든 일이었다. 결국 금요일 밤에 쌓인 이 쓰레기의 산은, 토요일과 일요일 동한 충분한 시간과 적절한 온도 속에 푹 썩어갈 게 분명했다. 그녀가 이 작은 신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이 쓰레기들의 산을 보이지 않는 구석진 곳으로 밀어넣는 일 뿐이었다. 환경성의 묵인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아..... 우윽."

 

주사광란의 결과인 토사물이 카린의 옷자락에 묻었다. 카린은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리며, 아직 조금 남은 쓰레기 봉투를 미리 쌓아둔 산을 향해 던져버렸다. 감정이 실린 투척은 멋진 궤도를 그리며, 허공 한복판을 돌며 내용물을 약간 뱉어낸 다음에 쓰레기 더미 한복판에 안착하는 데 성공했다. 두꺼운 목장갑에 묻은 토사물의 끈적거림을 날려버리기엔 조금 부족한 상쾌함이었다. 신사 경내엔 아직 여러 곳에 쓰레기들이 남아있었다. 이 참상이 그나마 지역 자치회에서 도와준 결과 상당히 개선된 거라는 게, 그녀의 마음을 한층 더 울적하게 만들었다.

 

"이런 날엔 아르바이트를 좀 쓰던가, 청소용역을 좀 쓰면 좋을텐데."

 

하지만 쇠퇴해가는 촌구석 구석에 박혀있는 작은 신사에 그 정도의 돈이 있을리가 없었다. 도묘지 카린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이 신사를 담당하는 칸누시의 딸이기에, 모를 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더워지는 날씨.

땀이 비 오듯 흘러 눈을 찌르지만, 쓰레기가 묻은 옷으로 얼굴을 닦아내고 싶진 않았다.

 

 

---

 

 

그녀가 살고 있는 나라 현은, 유명 관광지라는 명성 덕분인지 상당히 넓다. 사람들은 나라라고 하면 대체로 도다이지 같은 명승유적과, 사슴이 맹수처럼 변해 거니는 사슴공원을 떠올린다. 자랑할 거리가 많은 관광지이기에 나라 현에서도 나라 시의 명물들을 중심으로 홍보를 하고 있으며, 관광업에 목숨을 건 지방정부의 정책과 영업 덕분인지 나라 현은 일본 관사이권의 유명 관광지로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치고 있다.

물론 매 년마다 사람이 수십, 수백 단위로 사라져가는 시골마을이 관광업의 혜택을 제대로 볼 리가 없었다. 당장 이 신사 칸누시의 딸인 그녀만 해도 관광객들보다 인류학자나 문화학자, 민속학자들의 얼굴을 더 자주 봤을 정도였다. 가끔, 길을 잃어도 엉뚱한 곳에서 잃어버린 관광객이 신사에 들어와 나라의 사슴공원 이야기를 해도, 그녀는 웃으며 얼버무릴 수 밖에 없었다. 신사 바깥에선 매일같이 넘어지며 실수를 저지르는 그녀에게, 자주 보지도 않는 나라 공원의 사슴들은 유명 RPG게임에 나오는 필드보스 몬스터보다 두려운 존재에 불과했다. 애초에 그녀가 사는 마을은 나라 시 보단 와카야마 현에 더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수고했다, 카린. 씻고 좀 쉬어라."

 

TV로 뉴스를 들으며 어제로 끝난 축제의 수익금을 정리하던 그녀의 아버지가 말했다. 테이블 위에는 유명한 위인들의 얼굴이 인쇄된 익숙한 종이들이 다발로 묶여 있었다. 몇몇 봉투에는 지역 유지들과 보수 정치인들, 그들과 친한 학자와 교수들의 이름이 멋들여진 글씨체로 적혀있었다.

그녀는 그 중 유난히 홀쭉한 봉투에 눈이 갔다. 그 위에 써 있는 이름을 보고, 대답도 안 하고 씻으러 들어가려던 생각을 바꿨다.

 

"네. 후우....."

 

카린은 신사에 딸린 집에 돌아오자마자 갈아입을 옷을 챙긴 다음 샤워실로 직행해, 작업복을 벗어 빨래통 안에 넣었다. 땀에 젖기 시작한 T셔츠가 몸에 살짝 달라붙어 있어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옷을 위로 당겨올릴 때 마다, 천이 늘어나는 느낌과 함께 가슴이 걸리적거려 괜히 불쾌했다. T셔츠는 다른 빨래통에 넣은 다음, 재빨리 물을 틀어 온 몸에 묻은 은은한 악취와 땀을 씻어내렸다.

 

"오늘은 좀 쉬자..... 어라?"

 

인터넷을 통해 비싼 배송비를 감당하고서 주문한 샴푸와 바디워셔가 거의 떨어졌다는 걸 확인한 그녀는, 플라스틱 통의 뚜껑을 따고 그 안에 물을 반쯤 집어넣어 흔들었다. 몇 번 흔들자 거품이 일어나며 통을 가득 채웠다. 이걸로 몇 주는 더 쓸수 있다. 그녀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샤워를 재개했다.

샴푸를 사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건 아니다. 성적과는 별개로, 정부 지원이나 민간 장학금을 받으면 대학에 갈 수 있을 정도의 재정적 여유는 있다. 하지만 주문을 하면 1주 정도는 기다려야 하는 촌마을의 특성상 뭐든지 떨어지기 전에 아낄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상품은 이 마을에는 없었다. 그녀가 도시로 소풍을 가서 가장 놀랐던 게 24시간 동안 운영하는 편의점이었을 정도다. 마을의 가게는 해가 지면 문을 닫아버렸다. 촌동네 특유의 불편함은 올해로 17세를 맞이하는 소녀에겐 조금 가혹한 환경이었다. 그녀가 이러한 고급스런(?) 미용 도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게 최근이라는 점도 그 가혹함에 한몫하고 있었다.

 

"어때요?"

 

다 씻고 나온 카렌은, 아직 물기가 묻은 머리를 수건으로 문지르며 대충 말리곤 아버지에게 물었다. 질문의 의도는 둘에게 있어 너무나 명백했다.

 

"올해도 좀 줄었구나. 토리이가 낡아서 교체해야 하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안타까운 듯, 그러나 별 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성금 모금액과 자치회의 보조금이 8년 연속으로 최저치를 갱신하는 건 이제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당연히 축제에 참가하는 사람의 수도 매년 최저치를 갱신하고 있었다. 그에 반비례해서 가끔씩 쓰러져가는 마을이니 고령화니 어쩌구 하면서 찾아오는 무례한 방송국 관계자들과 저명한 대학 교수들의 방문은 조금씩 늘고 있었다. 친하게 지내던 혈연들은 월급쟁이가 되어 떠나가고, 대신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쇠퇴한 임종을 맞이할 마을의 장례식에 미리 참석하여 자랑스러운 듯 애도를 늘어놓는 듯 했다. 도묘지 카린은 그런 것들이 전부 다 싫었다. 지금까지 살던 신사가 쇠락하는 것도, 진절머리나는 촌구석도, 잘난 듯 거들먹거리는 방문객들도.

가족을 빼고 좋아하는 게 있다면 단 한 명 뿐이었다.

 

"지난번에 온 그 누구냐, 자민당 중진인가 하는 그 사람이랑 형위해 기원... 아, 또 씹었다."

 

"허허, 조심하렴. 혀 다치면 큰일이니까. 그리고 올해는 선거니까 싫어도 줄 수 밖에 없을 거다. 이번에 마다라메 씨 후임으로 온 코토이누 씨가 잘 해 줄 거야."

 

"마다라메 씨가 후생노동성이나 국토교통성으로 갔으면 좀 더 편했을 텐데 말이야~"

 

본전 청소와 오미쿠지 판매대 점검을 마치고 온 그녀의 어머니가, 얼굴을 아는 보수 정치인의 출세가 조금 아쉬운 듯 샐쭉하게 말했다.

 

"뭐, 총무성으로 간 거니 출세했다고 봐야지. 아, 그래도 이토 의원님이 카린 졸업하자마자 저기 동사무소에 자리 하나 내준다고 하니까 걱정은 없어. 하하하."

 

한 바탕 시원하게 웃은 카린의 아버지는 다시 잔금 계산 일로 돌아갔다. TV에선 총무성 고위 관료들의 비리 스캔이 보도되고 있었고 이번에 잘릴 사람들의 후임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었다. 카린의 아버지는 뉴스를 한쪽 귀로 들으며 가끔씩 혀를 찰 뿐, 그 이상의 감상은 내놓지 않았다. 일단 신사의 칸누시이기도 한 그는 지역의 유지 중 한 사람으로서, 지역 선거의 캐스팅보드를 쥐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정치 이야기에 과격하고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게 그가 지금까지 여기서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입지를 보전할 수 있던 비법이기도 했다. 작은 마을이라 소문은 금세 퍼지니, 언제 어디서나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그 사람, 카린 보고서 이상한 생각 하는 건 아니지?"

 

"괜찮아. 그 사람 게이야."

 

"당신, 그 사람 만나지 마." 

 

".....그 말 나도 했는데, 정색하면서 거울 보고 오라고 하더라고."

 

쿠와바라, 쿠와바라. 재앙을 피하고 싶을 때 외우는 유명한 주문이다. 분위기를 띄우는 측면에서의 실용성은 충분히 입증된 효험 하나 없는 주문이지만, 그녀는 마음 속에서 마음을 담아 그 주술을 외웠다.

'쿠와바라 쿠와바라. 부디 동네 동사무소로 가는 일은 없길.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이시어, 저희가 모시는 신은 아니지만 부디 동종업계 종사자 하수인에게 학문의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그렇다고 신토학과로 보내진 마시옵소서.'

 

전화가 울렸다. 아버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네. 교수님. 안녕하세요? 아아... 예. 그러고보니까 따님 신혼여행이 괌이었죠? 어휴 부럽습니다. 저도 집사람도 일본을 떠나 본 적이 없어서요. 교수님은 해외로 자주 다니시죠? 이번엔 스페인이요? 허허, 지난 번에 TV에서 보니까 거기 돼지고기가 맛있다던데. 예, 어유, 저희 딸은 해외여행 한 번 가 봐야죠. 아, 3년 후에 대학 주최 해외연수가 있어요? 이거 딸이 들어갈 수 있을지..... 어유 힘써주신다니 그런 말씀을"

 

카린은 아버지가 전화로 뭐라 말하던 신경을 끊고, 자기 방에 들어가 수학문제집을 폈다. 시골 촌동네를 기준으로 해도 그닥 좋지 않은 성적으로 괜찮은 대학을 갈 수 있을지 걱정하는 건 부모가 아니라 그녀였다. 물론 이대로 이곳에 눌러앉는다면 지역 유지로서 소박한 권력을 행사하며 정치인들에게 뜯어낸 돈과 예산을 남용해서 도쿄에 부동산을 몇 채 거느린 부자가 될 수 있다. 그녀의 부모도 카린에게 그 쪽을 추천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린은 17세였고, 아직 젊었다. 젊은 학생에겐 재미도 감동도 없는 이 거리를, 자기 힘으로 벗어나고 싶어했다. 그래서 스스로도 높이 평가하지 않는 두뇌를 열심히 혹사시켜 공부를 하는 것이다.

 

".....예? 오늘이요? 허허.... 어제 축제가 있어서 경내가 많이 더러운데. 아, 청소 도와주신다고요? 어휴 그럼 언제나 환영이죠. 예. 예. 의원님이랑 총장님한테는 꼭 잘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예. 이번 여름에도 갯장어랑 준비해 놓을 테니 기대해주시고요. 예. 아, 그래도 그건 이르지 않나요? 카린한테 벌써 칸누시 자격 시험 준비를 시키는 건. 사실 저로선 대학을 편하고 여유롭게 다니다가, 졸업한 후엔 편하게 일 하면서 자격시험을 준비하는 쪽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데. 아유. 그렇죠. 요즘 도시가 얼마나 험한 곳인데. 고쿠가쿠인이나 고각콴처럼 먼 곳은 불안하죠."

 

비록 그녀 스스로도 이 길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아버지와 그 지인들이 추천하는 길이 훨씬 더 편하다는 건 사실이다. 사실 농협 직원쯤 되면 일류기업 못지않은 자리다. 지역한정 직원이 되면 전근도 없어서 일도 편하고 수입도 괜찮다. 옛부터 지연이니 혈연이니 하는 게 강세인 덕분에 신사의 외동딸이라고 하면 이곳에선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 농협과 신사, 그리고 보수 정치.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쇠락해가는 마을의 풍경이다. 공무원 채용은 공정하게 이루어지는 게 이상한 것이며 선거법이란 오래 전에 사문화해버렸다. 어차피 들키지도 않고 들켜도 슬쩍 넘어갈 수 있다. 대형 마트가 들어서기까지는 아직 오랜 시간이 남았을 게 분명하다. 외국인노동자는 지역 통계에 거의 잡히지 않는 데다가 외국인 자체가 진귀한 존재다.

카린은 공부하다 말고 한숨을 쉬고 기지개를 폈다. 풀리지 않는 문제 앞에서, 뒷장의 정답지를 들추어보았다가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결국 카린은 아버지가 통화하는 내용에서 신경을 끊지 못한 셈이었다. 벗어나기 힘든 이 기분을, 아버지에게 공부 방해하지 말라고 불평하는 걸로 풀어버릴 생각이었다.

 

"예. 예. 오늘이죠. 예. 그럼 이따 뵙죠. 예~"

 

카린이 방문을 나왔다. 시골이라서 쓸데없이 땅은 넘쳐, 도쿄의 단독주택처럼 2층집이 아니라 한 층 안에 모든 시설을 밀어넣은 전통 일본식 저택의 문이 삐그덕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저기, 아빱....."

 

삐그덕거리던 미닫이문이 어딘가에 걸려, 반 정도밖에 열리지 않았다. 혀가 꼬여버린다.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는 불평불만이 절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 경내에선 기적적으로 넘어지지는 않지만, 신사 바깥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내딛는 순간 경이로울 정도로 넘어지고 다닌다. 도시가 위험하다고 그녀의 부모가 말하는 이유는, 다름아닌 그녀 안에 있었다. 이곳에서 학교까지 등교할 때 몇 번이나 넘어지는가. 자전거를 쓰면 그런대로 빨리 갈 수 있는 길을 일부러 띄엄띄엄 있는 버스를 타고 다닐 정도다.

 

"공부" "아, 카린. 마침 잘 왔다. 미안하지만 지금 야마모토 교수님 오신다고 하는데 잠깐 응대 좀 해 줄수 있니?"

 

"저기....."

 

카린은 어떻게든 입을 열려 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열수 있을거야. 카린은 그렇게 말하며 입을 필사적으로 열려고 했다. 아버지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카린의 상태도 눈치채지 못했다.

 

"야마모토 교수님이랑 카미나리 군도 온다고 하니까 잘 부탁한다. 아빠랑 엄마는 잠깐 자치회에 가 봐야 할 것 같아서...."

 

"네! 맡겨주세요!!"

 

그녀의 뒤에서 어머니가 싱긋 웃었다.

카린이 머뭇거리던 이유를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

 

 

저 옛날의 무녀복은 쥬니히토에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복잡한 옷이었다고 한다. 부정을 막는 의미를 지녔다고, 내가 어릴 때 아빠가 알려주셨다. 그렇다면 현대의 무녀복은, 부정을 막는 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뜻일까. 나름 계속 고민하고 있던 문제이지만, 그 누구도 명쾌한 해답을 주지 않을 것을 알기에 별 군말 없이 무녀복을 입었다.

하얀 장삼을 거치고, 붉은 바지를 그 위에 씌워 끈으로 묶는다. 현대의 자본주의가 바라 마지않는 무녀상의 완성이다. 신 앞에서 부정타는 일이 없도록 몸가짐을 한번 더 단정히 고친다. 직접 한땀한땀 뜬 귀여운 부적을 허리에 차고, 그제서야 화장을 시작한다. 과거에는 신 앞에선 맨얼굴을 보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지만, 돈 맛을 본 뒤로 그런 사람들은 전부 다 사라졌다고 한다. 우리 집에서 이어오는 신앙이란 돈과 권력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현대의 한 단면이었다. 어쩌면 나중엔 겨드랑이 없이 붉은색과 살색이 늘어난 무녀복을 입게 될 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조리를 신고 불제봉을 챙긴 다음에, 한 번 더 몸단장을 가지런히 하고 손님을 맞으러 간다.

 

"오오, 카린. 기다렸단다. 여전히 무녀복이 잘 어울리는구나. 요즘은 이런 자료를 얻는 것도 힘들어. 여기가 남아있어서 참 다행이야."

 

딱히, 이 사람을 위한 몸단장은 아니지만. 이런 구닥다리를 보고서 기뻐하는 건 여기가 망해가는 신사라는 걸 돌려 표현한 걸까. 와비사비라는 건 우민정책의 일환이 아닐까 하고,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든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신 앞에 나서는데 몸단장을 가지런히 해야죠. 카미나리 씨도 안녕하세요?"

 

종교는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는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은 신을 위한 것은 아니다. 신앙 같은 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잊어버린 신사에서, 신앙이란 결국 사람의 이기심을 채우는 수단에 불과했다. 일단 이 신사의 정식 무녀 취급을 받는 나도 신앙이니 하는 걸 멋대로 이용하는 입장에서, 그러한 현대의 단면을 비판할 자격은 없는 걸 지도 모른다.

교수님에게는 처음으로 우린 차를. 그리고 교수님을 수행하고 있는 대학원생 카미나리 씨에겐 더 맛있는 두번째 우려낸 차를. 나름 지역 명사들과도 교류가 있다보니 차와 관련한 지식은 나름 갖추고 있다고 자부한다.

 

"하하, 고마워. 잘 마실게."

 

그는 잔 윗부분을 가볍게 잡고, 바닥을 손바닥으로 받힌 채 컵을 올려 기울이곤 차를 천천히 목 뒤로 넘겼다. 꿀꺽, 꿀꺽. 시원하게 식힌 차가 그의 목을 타고 넘어간다. 목젖이 움직일 때 마다, 어째서인가 나도 긴장해선 침을 삼켜버린다.

 

"뭘요... 에헤헤..."

 

칭찬에 고개가 붉어지며 몸이 수그러든다. 이번에는 제발 혀를 깨물지 않길. 쿠와바라 쿠와바라. 이쪽에서 섬겨주고 있으니까 좀 부탁드립니다 이름도 잘 기억 안나는 본존님.

이 멋진 남자가 제게 실망하는 일이 없기를. 좋아하게 되버렸지만 한 때의 흔들림으로 끝나지 않기를.

 

"아, 양갱도 가져올께요."

 

"허허, 이 나이 되면 살찌는데....."

 

"괜찮아요. 어차피 빠르든 늦든 찌게 되어있으니까요."

 

"카미나리 군, 다음 논문이 걱정되지 않는가 보구만."

 

야마모토 교수님은 근처 대학 민속학부에서 일하고 있다. 강의의 질은 잘 모르지만, 가끔씩 TV에 등장해서 보수 정치인들의 주장에 힘을 더해주곤 하는 그런 흔한 어용학자 중 한 사람이다. 나와서 주로 하는 말은 국제관계니, 고대 일본의 진출이니 문명이니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가끔씩 시민단체 사람들을 향해 이 나라 사람같지가 않다는 말을 종종 하는, 그야말로 지방대학에 어울리는 교수라 할 만하다. 국가신토는 오래 전에 폐업했다는 말을 한다면 믿지 않겠지. 카미나리 씨는 이런 사람 밑에 있기엔 너무 아까운 인재가 아닐까. 도쿄까지 가지 않아도, 오사카나 교토 근처만 해도 괜찮은 대학들이 즐비한데 말이다.

 

"자자, 그런 말 마시고. 여기 양갱이욥. 아..."

 

"정말이지, 이번 교수회 평가만 아니었어도 자네 논문 같은 건......"

 

야마모토 교수는 내 말실수를 눈치채지 못한 듯 카미나리 씨를 양갱과 함께 씹는 데 바쁘다. 아버지의 지인이 아니었다면, 이런 무례한 교수는 제대로 응대도 안해줬다. 신사를 유지하고,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예산을 위해선 이러한 어용학자들이 정치인이나 관료들에게 열심히 바람을 넣어주어야 한다. 지방의 소박한 권력이란, 이러한 끈끈한 부정부패의 고리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 옆 마을에서 대규모 비리 사건이 터졌을 때, 지금 우리 상황과 너무 닮아있어서 무심코 웃어버린 적이 있을 정도다.

 

"아하하....."

 

카미나리 씨가 내 말실수를 눈치챈 듯, 내게 곁눈질을 보낸다. 부끄러워져서 빨개진 얼굴을 숙여버렸다. 차라리 평상복이었으면 부끄럽지 않았을 것을, 현대화니 비즈니스니 뭐니를 외치며 대외적으로 전통이니 뭐니를 내세운 아버지 덕분에 무녀로서의 일을 할 땐 이 무녀복을 입어야 한다. 이렇게 한 후, 들어오는 예산이 실제로 더 올라버렸다는 현실 앞에선 정말 울고 싶었다. 차라리 아이돌을 하나 고용하는 게 어떨까. 아니, 방송국이랑 제휴해서 아이돌을 한 명 불러오거나 애니메이션이라도 한 편 찍으면 성지순례니 뭐니 하면서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뭐... 차도 마셧겠다, 모시고 있는 위패 좀 보러 가세."

 

"네. 혹시라도 가운데 길을 걷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낡은 나무판 위에, 원숭이도 알아볼 수 있는 식으로 그린 그림은 이미 오래 전에 색이 바래고 페인트가 벗겨져있었다. 예산을 받았다면, 이런 곳에 쓰는 게 어떨까. 부정회계와 예산부정취득이 들키기 전에.

 

 

--

 

 

길 가장자리를 걸어, 큰 길 오른편에 있는 손 씻는 곳으로 안내한다. 예전엔 왼쪽에서 흘러나온 지하수를 끌어올려서 손을 씻고 입을 헹굴 수 있었지만, 음용수부적합 판정을 받은 후 그냥 물을 끊고 수도를 쓴다. 약간 약한 수압과 조금 많은 수도세를 감내할 수 밖에 없었다. 순서대로 왼손과 오른손을 씻고, 왼손으로 국자에 물을 떠 입을 헹구고, 마지막으로 국자까지 씻은 다음 본전 앞으로 데려갔다. 시골이라 평수는 크지만, 참배용으로 쓰는 배전은 없는 작은 신사다답다고 해야 할까.

 

.....방울을 울리고, 인사 2회 박수 2회 인사 1회. 끝나고 5엔짜리 2개가 세전함에 떨어졌다. 원래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해야 할 본전을 교수가 오른다. 신발 정도는 벗어서 정리해놓는 예절은 갖추고 있어서 다행이다. 카미나리 씨는 몇 번을 봐도 신기한 듯 본전 내의 모습을 둘러보고, 교수는 신체를 '집어들고'이리저리 돌려가며 쳐다보다 흥미없다는 듯 대충 내려놓았다. 이 신사에 신 따윈 있지도 않다. 저 신체라는 것도 적당히 잘 만든 여성의 조각에 불과하다. 도시에 있던 다이소라는 곳에서 저것보다 더 좋아보이는 걸 세금 포함 216엔에 팔고 있었다.

 

"흠, 서적 보관 상태는 그닥이구만. 혹시 대학에 맡길 생각은 없나?"

 

카미나리가 아니었다면 신체로 머리를 찍어버렸을 텐데.

 

 

--

 

 

"......."

 

저녁.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치회에서의 이야기가 잘 안 풀린 듯, 심각한 얼굴로 방에 들어가서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축제 규모가 너무 작아 다음 해부터 보조금 지급이 어려워질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선거법은 오래 전에 사문화되고 지방 유지들은 권력 유착형 비리를 범죄라고도 생각하지 않지만 어째서인지 중앙 감사만큼은 어떻게든 피하려 했다.

자기 전,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잠옷 차림으로 바깥에 나와버렸다. 문명의 불빛이라곤 제대로 켜지지도 않는 가로등 정도라 별과 달이 수놓은 하늘이 보인다. 도시의 밤하늘은 이보다 밝지만 어두웠던 것 같다. 신앙이니 문화니 하는 건, 오래 전에 사라진 그런 풍경. 이곳을 지키자니 뭐니 이야기는 끊이지 않고 있지만 현실은 이 꼴이다. 돈이 나오지 않으면 지킬 것도 없다. 외국의 유일신교를 섬기는 동종업계 종사자가 말하길, 종교는 너무 세속화되고 상업화되었다고 했다. 그 사람은 이교도의 사원으로 팔리는 성당의 현실을 개탄했다. 일본에 와서 종교업계의 경영법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역에 이권 사업을 끌어들이고,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서 예산을 얻어내는 능력은 부단한 노력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이딴 거, 필요없는데."

 

잠깐 경내를 나와서 마을을 걸었다. 한밤중, 인적보다 짐승의 흔적이 더 많은 길을 지나 불 꺼진 상점가로 향한다. 도시의 화려한 밤놀이 같은 건 기대할 수도 없고, 24시간동안 운영하는 식당이나 편의점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는다. 오후 10시 정도까지 운영하는 낡은 술집만이 조금 이른 라스트 오더를 내리고 점포를 정리하고 있었다. 얼굴을 아는 사람이라, 이쪽을 보지 않는 사이에 재빠르게 지나갔다.

상점가 구석을 향하는 익숙한 길을 걸어, 이윽고 작은 사당을 발견했다. 평소에는 상점가 사람들이 알아서 청소해 주지만, 오늘은 왠일인지 청소가 되어있지 않았다. 다들 숙취에 절어서 머리를 감싸쥐는 걸까. 사당에 토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일지 모른다. 작은 토리이를 통과해, 살이 다 나가버려 잘 쓸리지 않는 빗자루로 근처를 쓸었다. 그러고보니, 우리 신사에서 모시고 있던 신 이름이 뭐였더라. 일단 돈의 신은 아니었고 학문의 신도 연애의 신도 아니었다. 일단 본존은 가고시마 쪽에 있다고는 들었다. 가본 적은 없지만.

 

"어디 보자...."

 

문득 궁금해져서 사당 안쪽에 걸어놓은 위패를 꺼냈다. 칠이 바래고 떨어져서 읽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갱신된 지 족히 10년은 넘은 체크리스트가 싯누래져선 안쪽에 들러붙어 있었다. 한숨을 쉬며 발 아래를 보니, 깨끗한 술이 바쳐져 있어야 할 자리엔 곰팡이 뜬 물이 담긴 컵이 있었다. 처음엔 술이었지만 알코올은 증발하고, 결국 이상한 균이 번식해버린 것 같다. 컵을 조심스레 들어 근처 하수구에 물을 버리고, 아무런 의미도 없이 컵을 품에 안고 신사를 향했다. 먼지 쌓인 사당 지붕을 손가락으로 한 번 훑었다. 깨끗해진 부분이 상처처럼 눈에 띄었다.

 

"꺄앗!!"

 

가다가 넘어졌다. 익숙한 생채기다. 하지만 컵만은 깨트리지 않고 어떻게든 지켜내었다. 컵이 깨지면 유리파편에 찔릴 수 있어서 위험하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몇번 더 넘어진 후에야 신사에 돌아왔다. 혹시나 해서 챙겨온 폰엔 부재중 전화 같은 건 찍혀있지 않았고 집 안방에는 아직도 불이 환하게 켜져있었다.

신이 다니는 중앙길을 가로질러, 손 씻는 곳에서 컵을 씻었다. 발 아래 보이지 않는 곳에 둔 수세미를 꺼내서 박박 씻었다. 컵을 씻지 말라는 안내문은 아직 떨어지지 않아서 읽을 수 있었다. 그곳의 불을 끄자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아."

 

컵을 본전 안에 가지고 갔다. 내일쯤 되면, 누가 갖다놓은 공물이라고 생각한 부모님이 멋대로 처리하실 게 분명하다. 원래 하얀색이었을 물잔은 빛이 바래서 황색에 가깝게 변해버렸다. 그러고보니까 본존이 있는 가고시마의 시로사츠마는 시간이 지날수록 황색으로 변한다고 했나.

 

"그냥 때가 탄 거라서, 안 팔리는 거겠지."

 

일본의 도자기를 다루는 다큐멘터리에서 하얀 도자기를 굽던 장인이 한탄하듯 말한 적이 있다. 요즘 이런 건 안 팔린다고. 하지만 누군가 하지 않으면 명맥이 끊어지기에 할 뿐이라고. 그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대목에서 그 장인은 정부의 재정 지원을 간곡히 요구하고 있었다. 우리보단 양심적으로 먹고사는 사람이었나 보다.

 

"안 그래요? 이름도 모를 신님."

 

신을 모시는 무녀라는 게, 자기가 모시는 신 이름도 모른다. 예식이나 예법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만 빼면 아르바이트로 일한다는 무녀와 별반 다를 것도 없다. 신체를 험하게 다루는 사람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숙이고 있었다. 무녀 실격이다. 기왕 하는 거, 좀 더 실격이나 해 보자. 동네 양조장에서 바친 독한 술을 방금 씻은 컵에 따랐다. 신에게 바쳐진 거지만 신관이 마셔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아빠가 좀 마시고 있었으니, 나름 신관인 나도 마셔도 된다. 시골 마을에서 법이란 쉽게 무시당하기 일쑤니 청소년의 음주도 별 문제는 아니다.

 

"하아, 이런 마을 싫어. 도시의 꽃미남이 날 좀 업어가주지 않으려나. 아니지, 내가 공부해야 하나. 스기와라노 미치자네시여 저 무녀 관둘 거니까 협조 좀 해 줘요. 동종업계 경쟁자가 하나 줄어드는 건 댁한테도 좋은 일이잖아요."

 

술이 들어가서. 입이 험해졌다.

쓰다. 속이 탄다. 입에서 불이 나온다. 말이 타오른다.

 

"우리 신님은 자기가 돈벌이 수단이 되었다는 건 알기나 할까? 아니면 카고시마에 있는 본존도 같은 신세이려나? 국가신토 때 작살났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신앙은 덧없는 인간을 위하여. 위대한 신덕이니 뭐니, 인간의 선악이니 뭐니, 생활에 밀접하게 붙어있느니 뭐니 하는 이야기는 결국 사람 없인 성립되지 않는 이야기다. 그리고 당장 이 쇠퇴해가는 마을도, 신관의 딸이자 무녀인 나도 이 신에게서 마음이 멀어지고 있다. 차라리 신벌이라도 하나 내렸으면 한다. 그렇다면 효엄있는 신사라고 소문은 날 테니까.

 

"음.... 신뉨~ 나 어떼여? 이쁘죠? 우헤헤~"

 

아, 세상이 돈다. 이거 본존에서 쓰러질지도 모른다. 경내에서 넘어진 적은 없다는 대기록이 드디어 깨진다. 이런 걸 보고 금기가 깨진다고 하던가?

 

"차라리~ 내가 무녀 아이돌이 되서~ 신사 광고하고 다니면 돈도 벌고 썩은 짓 안해도 되고 나도 대도시로 나가고 좋지 않아요?"

 

물어도 대답은 없다. 신이란 아무 짓도 안 하고 그냥 가만히 앉아서 위엄 쩌는 모습만 보여주니까 신이다. 어쩌면 그래서 일본의 8백만잡신이 모여도 지저스 크라이스트 하나를 못 이기는 걸 지도 모른다. 일본의 신앙과 신토는 실생활과 여러 방향에서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대답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싸구려 여인상은 아무 말 없이 날 내려보고 있었다. 불 꺼진 본전에 누워, 거미가 기어다닐 것 같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지구온난화가 시작되면 검은과부거미 같은 것도 신사에 들어오게 될까? 옛 신에게 양놈들 거미를 보여주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신성 모독이다!"

 

음, 한 번 외치니까 시원하다. 아니, 바람이 불어서 시원하다. 바람 때문에 본전의 문이 닫혀버렸다. 쾅, 소리와 함께. 밤하늘의 빛도 사라져, 한 줄기 빛도 없이 어두운 전당이었다.

 

"....에?"

 

그런데, 신체만이 뚜렷이 보인다. 바람이 불고, 본전이 흔들린다. 아니, 

 

"지진?!"

 

몸을 일으켜 세우려 하지만, 땅이 떨려서 제대로 균형을 잡을 수가 없다. 술기운도 있어서 도저히 설 수가 없다. 세상이 흔들리고,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춤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사방팔방에서 이야기를 걸어온다. 도깨비불이, 날 비웃듯이 일렁인다. 날 향해서 여린 손이 뻗어온다. 고급스런 황색 옷을 입혀놓은 일본인형이 소라나팔을 불자 거대한 바다가 날 발부터 삼킨다.

 

"사, 살려....."

 

기어서 문을 향한다. 하지만 서둘수록 뒤에서 신체가 쫓아오고 문은 멀어져간다. 칠이 벗겨진 위패의 글자가 빛나며 점점 제 형상을 되찾아간다. 어느 새 자그마한 신체가 일어나, 자기 몸만한 위패를 들고 내게 다가온다. 저리 가라고 소리쳐야 하는데, 목에 무언가가 들어가서 성대를 막아버렸다. 소리가 나지 않는다.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다. 어두운 곳 속에서 버둥거리다 몸만 깊은 곳으로 빠진다.

신이, 뒤에서 다가온다.

 

깊은 바다 속으로 떨어지자, 밤하늘이 있었다. 소라나팔을 불던 인형이 내게 위패를 주었다. 자기 이름이라고 말해주었다. 네 이름은.

 

 

--

 

 

다음 날 이른 아침, 도묘지 카린은 본당에서 눈을 떳다. 옷 입고 거사라도 치룬 듯, 지진 맞은 폐가처럼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중, 자신이 왜 여기 있는가에 대해서 떠올려버렸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뚜껑 열린 술병과 술이 남아있는 술잔이었다. 직후, 그녀는 어제 갑작스레 들이닥친 지진과 태풍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숙취를 지진과 태풍에 비유하던 아버지의 심정도.

 

"우에에......"

 

그렇게 머리를 쥐고 본전 바닥을 구르길 몇 차례. 그녀는 겨우 정신을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증거 인멸이 우선이었다. 술병 뚜껑을 닫아서 원래 자리에 두고 잔을 비웠다. 멍한 머리 속 그녀의 뇌가 해장술의 개념을 새로이 부여받았다. 뒤집어지는 속이 또 뒤집어지는 동안, 그녀는 어찌어찌 일어나서 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부모님 두 분이 진작에 일어나있을 시간이었다.

 

".....기야아악!!"

 

사색이 되어 경내로 뛰쳐나왔다.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안도감에 힘이 풀린 나머지, 경내에서 넘어져버렸다. 혹시나 잘못 봤나 해서 다시 한 번 폰을 확인하던 그녀는 한 건의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카미나리로부터 온 전화였다.

도묘지 카린은 뭔가에 씌인 듯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카린?"

 

"예. 안녕하세요. 제 폰에 전화가 와 있어서 이른 아침에...... 깨워서 죄송해요"

 

"아, 괜찮아. 나도 방금 일어난 참이야."

 

다행이다, 라고 그녀는 말하며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서, 무슨 일로 전화하신 거에요?"

 

"아..... 교수님이 어제 입원하셨거든. 급성 췌장염으로. 그래서 이번 논문 심사랑 교수회 출석이 어려워져서."

 

"......그랬군요."

 

급성 췌장염이 어떤 병인지 그녀는 모른다. 하지만 남 몰래 속으로 주먹을 꽉 쥐고 쳐올린 건 비난받을 짓은 아니리라.

 

"뭐, 그 덕에 이번에 교수님이 쓰기로 한 신토 특집 칼럼이 날아가서 보고차 전화하려 한 건데, 집에 아무도 안 받더라고. 그래서 카린한테까지 전화한 거고."

 

'아 그렇군요, 그건 잘됐... 안타깝습니다' 그녀는 적당히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의 그 체험이, 술 한 잔 마시고 신내림이라도 받았던 건가 싶었다. 어쩌면 신이 그녀의 기도를 듣고 분함을 풀어준 걸 지도 모른다.

 

"그리고 말이야 혹시 해서 확인하는 건데...... 야마모토 교수님이 그쪽에 또 다른 거 해 주기로 했어?"

 

"음.... 다음달 현 의회 문화위원회에 이토 의원님이랑 같이 출석해야 사업예산을 받아올 수 있다고......."

 

"음, 망했네."

 

"무슨 일 있어요?"

 

"아, 이번에는 내가 논문 안 쓰고 날라버릴 예정이거든. 이전에 미시로 프로덕션에 면접보러 갔는데 그게 붙어버렸지 뭐야. 그래서 마지막까지 숨기고 있다가 그새끼 엿쳐먹으라고 딱 이 타이밍에 날라가는 거지. 그리고 내가 논문을 안 내면 그 양반 실적 부족으로 정교수 임용도 날아가고 교수직 연임도 날아가게 되거든. 즉 다음 달 현의회인지 뭔지는 날아가는 거지."

 

그리고, 신벌도 같이 내리신 걸 지도 모른다. 신사를 지탱해야 할 예산이 날아가버린 것이다.

하룻밤 새, 잠깐 술에 취해서 곯아떨어진 사이 순식간에 발생한 엄청난 사태 앞에, 도묘지 카린은 입을 떡 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기가 서 있는 곳이 가운데 길이라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그녀는 망연히 본전을 바라보고, 본전 안의 신체를 보고, 손 씻는 곳을 보고, 하늘을 보고, 집을 보고, 토리이를 보고, 신사까지 올라오는 돌계단을 보았다. 그리고 오늘도 열심히 붙어먹고 사는 마을을 보았다.

신사 벽에 붙은 선거홍보용 포스터가 바람에 휩쓸려 날아가버렸다. 신사를 지탱해오던 보조금처럼.

 

"저기, 여보세요?"

 

"....주세요."

 

"응? 뭐라고?"

 

"책임져주세요!! 그 미시로인지 아이도루 프로덕션인지, 책임지고 나도 데려가라고요!! 처음부터 스카웃 실적 하나 얻었어요 축하드려요!!"

 

도묘지 카린의 선택은 단순했다.

지금까지 섬겨온 신이 이제 하산하라고, 연애질 좀 하라고 명하며 멍석 깔아주고 등 떠밀어 준 이상 무녀는 그것을 따라야 했다. 반 자포자기의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에?!"

 

"지금 어디에요?! 거기 가만히 있어요!! 내가 갈 테니까!!"

 

"그, 그게..... 가고시마에서도 요리타 요시노라는 아이를 데려오기로...."

 

"됐어요!! 이야기는 거기 가서 하죠!! 그러니 책임져주혜효!!"

 

그녀는 경내를 달려서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몇 걸음 못 가서 넘어져버렸다. 바로 일어나 다시 달렸다.

본전 안에서, 흥겨운 듯 한 소라나팔 소리가 들려온다. 흑선이 바다를 넘어오던 걸 지켜보던 신이 부르는 나팔이다.

 

 

 

 

 

 

 

 

 

 

 

 

 

 

 

 

 

그런데, 오늘 만나기로 한 그 인간이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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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이이이잎

이거 쓰느라 데레스테 이벤도 걸렀다..... 오늘 25주얼 날아감.

 

'신' 이라는 주제이길래 흔히 쓰이는 킹왕짱 지저스 크라이스트니 사탄이니 여신전생이니 하는 게 아닌, 무녀인 카린과 신님인 요시노를 배경으로 삼았습니다. 일본의 신토라던지, 조금 신선한 느낌일려나. 그러고보니 카린이 메인으로 나온 소설이 국내에 몇 없었던 것 같은데? 있긴 하나? 아싸 레어함 겟

전반적인 이야기는 모두들 잘 아실 법한 꼰나 마치 이야야에서 따왔습니다. 사실 고증 등을 더 착실히 하고 묘사를 세밀하게 하고 싶었지만 시간부족. 물론 메테오를 쳐 박는 대신 망할 꼰대에게 급성 췌장염을 선물해주었습니다. 췌장암 걸려 잡스처럼 죽으라지.

 

그럼 이만 줄입니다. 빨리 이벤 돌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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