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퍼스널리티P 시리즈] (Re)Write─덮어 쓰는, 혹은 다시 쓰는. (7-完)

댓글: 12 / 조회: 1333 / 추천: 9


관련링크


본문 - 04-21, 2017 03:55에 작성됨.

 

<(Re)Write─덮어 쓰는, 혹은 다시 쓰는. (6)>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동경 표준시 12월 30일.

 

LA국제공항의 출국 게이트 앞에서, 카에데는 캐서린과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프로듀서는 티켓을 끊으러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조심해서 가요. 즐거웠어요.”

“정말……폐만 끼치다 간 것 같네요. 고마워요.”

“뭘요, 우리 사이에 이 정도는 해 줘야지. 대신, 다음에 내가 일본 가면 그때는 부탁할게요?”

“후훗, 맡겨만 주세요.”

“인사는 다 나눴습니까?”

 

그 때,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캐서린과 카에데는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프로듀서의 손에는, 항공사의 로고가 인쇄되어 있는 봉투가 들려 있었다.

 

“자리 있었어?”

“물론.”

 

프로듀서는 훗, 하고 웃으면서 품 속에서 카드를 하나 꺼내어 보였다. 금속처럼 새까만 광택이 번뜩이는 카드. 흔히들 ‘블랙 카드’라고도 하는 물건이었다.

 

“퍼스트 클래스는 늘 남기 마련이지.”

“……카에데는 좋겠네요. 누구 씨 덕분에 퍼스트 클래스도 타 보고……난 비즈니스도 간신히 탔는데…….”

 

프로듀서는 보란 듯이 카에데를 향해 한숨을 쉬는 캐서린의 어깨에 툭, 하고 손을 얹으며 씨익 웃었다.

 

“다음에 놀러 와. 갈 때 정도는 퍼스트 태워 줄게.”

“정말? 약속이다?”

“그래.”

 

프로듀서는 출국 게이트 위에 걸려 있는 스케줄 보드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탑승수속을 시작한다는 글귀가 떠올라 있었다.

 

“……그럼, 슬슬 가 볼게.”

“그래, 몸 조심하고. 도착하면 연락하고.”

“이번엔 너한테 신세만 지다가 가는구나. 정말 고맙다.”

“별 말씀을. 너한테 진 빚 갚으려면 한참 남았어.”

 

캐서린과 가볍게 말아 쥔 주먹을 톡, 하고 부딪힌 뒤, 그는 카에데의 옆에 세워둔 여행가방의 손잡이를 잡았다. 여행가방의 바퀴가 내는 덜그럭, 하는 소리가 마치 이별의 때를 선고하듯, 공항의 화강암 바닥을 쩌렁쩌렁 울렸다.

 

“…….”

“……왜, 왜 그렇게 쳐다봐?”

한동안 자신의 오랜 친구를 바라보던 프로듀서는 가방의 손잡이를 놓고, 그녀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지켜보던 카에데가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하고 생각한 순간, 그는 두 팔을 뻗어 그녀를 가볍게 끌어 안았다.

 

“어머?! 얘, 얘가 왜 이런대……?”

“……고맙다. 내 옆에 있어 줘서.”

 

뜬금없는 포옹에 당황한 것인지, 그의 등 뒤로 삐져나온 캐서린의 두 팔이 크게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평정심을 되찾은 그녀는 곧바로 그의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조심해서 가, 이 바보야. 이제야 제대로 작별인사를 하네.”

“……그러게.”

 

포옹을 풀고,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한번 더 악수를 나누었다. 프로듀서는 다시 가방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여행가방의 손잡이를 잡았다. 드륵, 드륵, 하는 바퀴소리와 함께 프로듀서와 카에데의 모습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캐서린은 가방 속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어 어딘가로 메일을 보냈다.

잠시 후, 다시 휴대전화를 집어 넣은 그녀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Re)Write─덮어 쓰는, 혹은 다시 쓰는. (7-完)>

 

 

 

 

 

LA에서 출발한 비행기를 타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 나리타 공항이 아닌, 오사카에 있는 간사이 공항이었습니다.

어쩐지 직항으로 한 번에 가던 뉴욕행 비행기와는 달리 하와이를 한 번 경유해서 간다 싶더라니, 도착지가 달랐군요.

 

“왠지 속은 기분이에요.”

“왜요?”

“도쿄로 가는 줄 알고 잔뜩 고민했단 말이에요. 시간대가 어중간하면 어쩌지……기차는 있을까…….”

 

공항으로 연결된 보딩 브릿지를 지나가면서 저는 반 걸음 앞을 걷고 있는 그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찔렀습니다. 옆구리를 배배 꼬며 비틀거리던 그는 자세를 추스르고 저를 돌아보았습니다.

 

“제가 그런 것도 생각해두지 않았을까봐요?”

“그, 그건 그렇지만…….”

 

나리타 공항, 그러니까 도쿄에서 와카야마까지는 기차를 탄다 하더라도 약 5시간 정도가 걸립니다. 실제로는 환승을 해야 하기에 5시간보다 더 걸리는 것이 보통이죠. 하지만 여기라면, 저희 집까지는 지금까지 이동한 거리에 비하면 그야말로 엎어지면 코가 닿을 정도의 거리밖에 안 됩니다. 전철을 이용한다 치면 한 시간 정도, 택시나 자가용을 이용하면 그보다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습니다.

출국할 때와 마찬가지로, 입국 역시 전용 게이트를 통해서 할 수 있었습니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공항의 로비로 나왔을 때는 이미 밤 9시를 넘긴 시각이었습니다. 로비로 나오기 전, 화장실에서 변장용 안경과 모자를 눌러 쓴 뒤, 저는 로비로 나가 프로듀서를 찾았습니다. 한 발 먼저 로비로 나와서, 여행가방의 손잡이를 쥐고 셔틀버스의 시간표를 확인하고 있던 그는 고개를 돌려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배는 안 고프세요?”

“그게……비행기 안에서 너무 잘 먹었나봐요. 멀쩡하네요.”

“다행이네요. 그럼 바로 출발할까요?”

“네.”

“셔틀버스는 조금 전에 떠난 모양이니, 전철로 이동합시다.”

 

고개를 끄덕이고, 프로듀서는 여행가방을 끌며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뒤를 따라 퍼스트 클래스 전용 공간과 일반 승객용 공간을 구분하는 게이트를 지나가자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로비가 나타났습니다.

모자를 눌러쓰면서, 혹여 그에게서 떨어질세라 저는 곧바로 그의 뒤에 따라 붙었습니다.

 

“사람이 무척 많네요.”

“30일이잖습니까? 연휴의 시작이니, 한창 다들 출국을 떠날 시기죠.”

“그렇군요……프로듀서는 괜찮으세요?”

“뭐가요?”

“조금 더 계셔도 될 텐데…….”

 

프로듀서의 휴가는 일본 날짜로 1월 1일까지로 되어 있었습니다. 자신의 휴가가 2일이나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저에게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을 주고 싶다며 일부러 출국일을 앞당긴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있어봤자 딱히 할 것도 없습니다.”

 

그는 앞을 보고 걸으면서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올해는 타카가키 씨께 휴가다운 휴가도 못 챙겨드렸으니, 최소한 연말이라도 가족분들과 함께 보내셔야죠.”

“그런가요…….”

 

저는 발걸음을 조금 더 빠르게 했습니다. 반 걸음이 안 되게 벌어져 있던 거리가 좁혀져, 그의 손과 제 손이 조금씩 스치는 거리가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늘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저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고, 프로듀서는 누가 알아본다 하더라도 큰 문제가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안 됩니다. 저를 알아보는 눈이 많고, 혹시나 만의 하나, 귀찮은 사람이 들러붙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복에 비하면 불편한 정장에 코트까지 갖춰 입고, 일부러 잘 보이는 주머니에 사원증을 꽂아둔 프로듀서의 옷차림도 그 대책 중 하나일 테지요.

생각해보면 말이 통하는 일본에 돌아왔으니 더 이상 이렇게 딱 붙어 다닐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떨어지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그렇게 멋대로 납득하며 저는 프로듀서의 뒤를 따라 공항과 연결된 전철역으로 향했습니다.

 

 

*****

 

 

전차와 버스를 갈아타며 저희 집 근처의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크게 기지개를 폈습니다. 프로듀서의 손에는 제 여행 가방이, 그리고 제 손에는 할리우드의 로고가 그려져 있는 쇼핑백이 들려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실은 렌터카라도 준비하려고 했는데, 근처 업체가 전부 휴일이라서…….”

“괜찮아요. 가끔은 이렇게 천천히 오는 것도 좋은걸요.”

 

시간이 시간인지, 주택들이 모여있는 골목길에는 적막감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따금씩 TV소리로 추정되는 소리와, 길고양이가 우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런 고요한 침묵을 깨고 우리 두 사람의 발소리가 뚜벅뚜벅, 저벅저벅, 담벼락 사이로 울려 퍼졌습니다.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된 가로등의 불빛을 벗어나면 우리 두 사람의 모습은 다시 어둠 속에 잠겨듭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프로듀서가 살던 LA의 하늘만큼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봐 줄만한 별세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 별세계를 만끽하기도 전에, 다음 가로등의 불빛이 다가와 시야를 덮기 시작합니다. 말없이 가로등 아래를 지나가던 도중, 프로듀서가 작게 헛기침을 했습니다.

 

“……타카가키 씨.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네, 얼마든지요.”

“저를 따라오려고 하신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그건 전에 말씀 드렸던…….”

“그게 아니잖아요?”

 

말허리를 자르며 들어오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가로등 아래를 막 지나갈 때, 저의 뒤를 따라오던 그의 발걸음이 멈추었습니다. 뒤를 따라오던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기에, 저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습니다. 내리쬐는 가로등의 불빛 아래에서 그는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가로등의 밝은 빛이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그의 얼굴을 덮고 있었기에,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말해주세요. 화 안 낼 테니까.”

 

가로등의 빛과 그림자의 경계에 서 있던 저는 그에게는 보이지 않도록 아랫입술을 깨물었습니다.

사실, 어느 정도 각오는 해 두었습니다. 프로듀서만큼 눈치가 빠른 사람 앞에서 완벽하게 숨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프로듀서는 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한 점의 거짓말도 없이. 그렇다면, 저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겠지요.

 

“……실은, 두려웠어요.”

 

저는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가로등의 불빛으로 들어가, 그의 앞에 서서, 그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여전히 짙게 드리운 그림자가 그의 얼굴을 덮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저를 버리고, 우리들을 떠날까봐요.”

“그럴 리가요.”

“하지만, 프로듀서는,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저를 봐 주지 않았잖아요.”

 

캐서린을 처음으로 만났던 그 때, 제가 미숙한 대응을 해 버린 탓에, 정신적으로 극한의 상황에 몰렸던 프로듀서는 처음으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직후에 한 번, 함께 로케이션 촬영을 간 적은 있었지만, 일정이 워낙 촉박했던 탓에 저는 프로듀서와 그다지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본인 앞에서 이런 소리를 했다가는 아이돌이 무슨 소리를 하는거냐며 한 소리를 듣겠지만요.

 

“그건 일이 많아서…….”

“알아요. 알고 있어요. 이건 그냥……생떼를 부리는 것뿐이에요.”

“떼라뇨…….”

 

저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요. 얼굴에 피가 몰리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가로등의 불빛이 할로겐 램프의 주황빛이라서 다행입니다. 도쿄처럼 새하얀 전등을 썼다간 새빨개진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을 겁니다.

 

“그 다음에도, 새로운 아이들이 들어오면서 당신은 계속 연습생들만 챙겼지요. 사무실에 오면, 언제나 저를 반겨주던 프로듀서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어요. 늘 연습생, 연습생……프로덕션 매치 때도 그랬어요. 하루 종일 카렌과 붙어 다녔죠? 그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던 저는……어떤 마음이 들었을 것 같나요?”

“……그건.”

“하나 더 있어요.”

 

저는 손을 뻗어 그의 입을 막았습니다. 그는 잠자코 입을 다물고 제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습니다.

 

“……애니버서리 파티, 연회장에서 했던 말씀이었죠.”

“파티……때요?”

”언젠가……당신이 없더라도 이 행사가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었죠.”

 

그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처음에는, 막연히 그냥 나온 이야기일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당신의 과거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점점 더 불안해졌어요. 정말로 어디론가 가 버리는 건 아닐까, 하고요. 실제로도 프로듀서는 제게 말씀하셨죠. 선수 생활에 미련이 남아 있다고.”

“……그랬었죠.”

 

그 때의 저는, 이제는 제2연습실이 되어버린 예전의 제1연습실을 계속해서 마음 속에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환경이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뒤로 밀려나버린 그 모습에 어쩐지 나 자신의 모습이 겹쳐져 보였던 것입니다.

 

“이대로 당신에게 잊혀져서……아니, 잊혀져 버리는 건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래서 당신을 따라가기로 했죠. 네. 사실, ‘욕심’이라는 건 거짓말이었어요. 그저……당신과 좀 더 같이 있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러……”

“타카가키 씨!”

 

프로듀서가 강한 어조로 제 말허리를 잘랐습니다.

제가 말을 멈추자,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싸늘한 밤공기에 그가 내쉰 한숨이 새하얗게 부서져갔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건 여러분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제가 없더라도 스스로 날갯짓을 할 수 있다고 판단했으니까. 하지만, 연습생들은 그렇지 않아요. 그렇기에 저는 그 아이들을 눈에서 떼어놓지 않는 겁니다. 아니, 떼어놓지 못하는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자세를 낮추어 제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당신들은 이미 훌륭하게 하늘을 날고 있는 새입니다. 날고 있는 새를 올려다 봤자 목만 아플 뿐이죠. 그런 당신들을, 제가 방치하고 잊어버린다고요? 천만에, 말도 안 되는…….”

“알아요.”

 

저는 선물가방을 쥐고 있던 손을 놓고,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습니다.

 

“제가 말씀 드렸던 건, 모두 당신을 따라가기로 마음 먹기 전에 생각했던 것들이에요. 제가 뭘 봤다고 생각하세요? 당신께 어떤 이야기를 들었다고 생각하세요?”

“…….”

“이제는 괜찮아요. 당신이 저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당신이 어째서 저를 선택했는지, 이제는 전부 다 알게 됐으니까요. 아시겠죠?”

“……네.”

 

저는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인 뒤, 그의 얼굴에서 손을 놓았습니다.

 

“바람이 차네요. 얼른 가죠.”

 

*****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저희 집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집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저는 몸을 돌려 프로듀서를 바라보았습니다.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서 제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안 들어가세요?”

“아, 저 그게, 차…….”

“카에데 왔니?”

 

‘차라도 한 잔 하고 가지 않겠어요?’라고 말하려던 찰나, 등 뒤에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뒤를 돌아보면, 외투를 걸치고 막 현관을 나오는 어머니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맞구나. 목소리가 들려서 혹시나 했단다. 어머, 안녕하세요?”

 

뒤늦게 그를 발견한 어머니께서 그에게 인사를 건네자, 프로듀서는 어머니께 깊게 허리를 숙였습니다.

 

“그간 격조하셨습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후훗, 덕분에요. 우리 딸아이가 폐를 끼치고 있지는 않나요?”

“천만에요. 타카가키 씨에게는 오히려 제가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현관문 앞에 세워둔 여행가방을 현관 안으로 집어넣으려던 어머니는 ‘아 참’이라며 프로듀서를 돌아보았습니다.

 

“차라도 한 잔 하시겠어요? 여기까지 힘들게 오셨을 텐데.”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 해 주시네요.

하지만, 어머니의 제안에도 그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깊게 머리를 숙였습니다.

 

“제안은 감사합니다만……내일까지 급히 도쿄에 올라가야 하는 일이 있어서요.”

“어머, 그런가요……? 그럼 별 수 없죠. 미안해요. 괜한 소릴 해서.”

“아뇨, 아닙니다.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허리를 숙이고, 프로듀서는 자신이 서 있던 위치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사모님께서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네, P씨도, 새해 복 많이 받아요……뭐 하니? 인사 드리지 않고.”

“네? 아, 아아, 네.”

 

어머니의 재촉에 저는 허둥지둥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저, 그러니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조심해서 들어가시구요!”

“네. 타카가키 씨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인사를 나누고, 프로듀서는 몸을 돌려 대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저는 그가 대문을 나서려는 순간, 재빨리 그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다행히도 늦지 않았던 것인지, 대문을 나서려는 그의 소맷자락을 움켜쥘 수 있었습니다.

 

“……타카가키 씨?”

“저, 그게, 차 한 잔……정말 안 되나요?”

 

잠시동안 저를 바라보던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프로듀서?”

“……죄송합니다. 시간도 늦었고요. 주무실 시간이잖아요?”

“그, 그건 그렇지만…….”

“……죄송합니다.”

 

명백한 거절의 뜻이었습니다. 쥐고 있던 그의 소맷자락이 손아귀에서 스르륵 빠져 나갔습니다.

몇 번이나 인사를 하는 것인지, 빙그레 웃으며 다시 한번 저에게 고개를 숙이고 프로듀서는 대문을 나가 골목길을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습니다. 담장 위로 보이는 그의 머리가 점차 멀어지다가, 결국에는 골목길 저편으로 사라졌습니다.

 

“자, 들어가자꾸나.”

“네…….”

 

한동안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저는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미소가, 어쩐지 계속해서 눈에 밟혔습니다.

 

 

 


 

 

 

택시를 타고 기차역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남아 있는 심야 열차의 티켓을 구한 나는 근처의 편의점에서 우유 하나를 사 들고 곧바로 승강장으로 향했다. 겨울의 칼바람이 몰아치는 승강장에는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가족이라…….”

 

적당히 비어 있는 벤치에 앉아, 깊게 한숨을 내쉬면서 나는 주먹을 말아 쥔 오른손으로 가볍게 가슴팍을 두드렸다. 무언가가 단단히 뭉친 듯 가슴이 답답했기 때문이다.

프로듀서라는 직업의 특징상 나는 주기적으로 회사에 소속된 아이돌들의 가족과 연락을 주고 받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 때는 그들의 모습을 보더라도 별 다른 느낌을 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족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그것이 프로로써 나에게 주어진 나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핑계로, 나는 내 마음을 억누를 수 있었다.

 

-그럼, 지금은?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승강장의 형광등 사이로 보이는 밤하늘은 별빛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새까만 색으로, 주위의 빛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처음 그녀의 집에 연락을 했을 때부터 각오는 하고 있었다. 그녀의 집이라면 이전의 개선 라이브를 포함하여 몇 번인가 찾아간 적이 있었고, 그녀의 부모님과도 몇 번인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래서,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가슴 속에 잔뜩 맺혀 있는 것을 토해 내기 위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끈끈이처럼 폐부 깊숙한 곳에 찐득찐득하게 달라붙어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승강장에 가만히 서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제각각 쌍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하아…….”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새하얗게 부서지는 한숨 너머로 보이는, 승강장 여기저기에 설치된 전광판에 곧 탑승을 개시한다는 문구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슴 속에서 뭉게뭉게 퍼져 나가는 시커멓고 씁쓸한 것을 억지로 삼키며 나는 승강장으로 들어오는 열차를 바라보았다.

열차를 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는 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어 저장되어 있는 번호 중 하나로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대답을 들었으니, 이 끈적한 것은 잠시 내려놓고, 이제는 ‘그’의 대답을 들을 때가 되었다.

 

 

 


 

 

 

“휴우…….”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무척이나 상쾌했습니다.

제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부모님께서는 목욕물까지 미리 준비해두고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거의 1년만에 와 보는, 무척이나 그리운 욕실의 욕조에 들어가서 저는 잔뜩 열기를 품은 한숨을 토해냈습니다.

샤워도 좋지만, 역시 이렇게 욕조에 몸을 담그는 게 가장 좋네요.

따끈한 물 속으로 조금 더 깊이 잠겨 들어가며, 머릿속으로 저는 프로듀서의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헤어지기 직전에 보여 준 얼굴.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가 지었던 미소가 머릿속에서 잊혀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때, 욕실의 문이 스르륵 열리면서 어머니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습니다.

 

“카에데, 우리 먼저 자도 되겠니?”

“네, 먼저 주무세요. 저도 곧 나갈게요.”

“그래, 천천히 있다 나오거라.”

“네, 안녕히 주무세요.”

 

어머니가 다시 욕실을 나간 뒤, 저는 다시 탕 속으로 잠기면서 날숨을 토해냈습니다. 보글보글, 거품이 올라왔습니다. 그는 분명히 웃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지금까지 일본에서 보여주던 ‘프로듀서’의 미소가 아니었습니다. 늘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는 듯, 무언가를 참고 있는 듯 하던 ‘윌리’의 미소였습니다.

그 미소 뒤에 그는 무엇을 억누르고 있던 것일까요?

 

“모르겠어…….”

 

제 직감은 무언가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무척이나 갑갑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온 몸에서 느껴지는 개운함과는 별개로 가슴 속을 가득 채운 답답함에 저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며 욕조를 나왔습니다.

 

 

 

욕실을 나왔을 때는 이미 거실을 제외한 집 안의 불이 모두 꺼져 있었습니다. 발소리를 죽여 제 방으로 돌아온 저는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별빛이 비치는 창 밖을 바라보았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무척이나 반가웠던 모양인지, 비행기 안에서 실컷 잤다고 생각했는데도 또다시 잠기운이 슬슬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크게 하품을 하면서 머리맡에 놓여있는 휴대전화를 집어 사진 앨범을 열었습니다. 휴대전화의 앨범 속에는 뉴욕에서, 그리고 LA에서, 이리저리 구경을 다니면서 그와 함께 찍어준 사진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후훗…….”

 

소리를 죽여 웃음소리를 흘렸습니다. 지난 일주일간의 경험은 모델 시절은 물론, 아이돌이 된 이후에도 겪어보지 못했던 색다르면서도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그 기억들을 떠올리며 사진들을 하나씩 돌려보던 저는 눈꺼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휴대전화의 화면을 끄고는 그것을 다시 머리맡으로 되돌렸습니다.

 

“‘잘 자요, 프로듀서’라는 말은 필요 없겠네요…….”

 

옆으로 돌아 누워서, 저는 이불을 고쳐 덮고 눈을 감았습니다.

 

 

 


 

 

 

다음 날, 12월 31일.

 

기차역에서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새벽 여섯 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각이었다. 비행기에서도 실컷 잤고, 기차 안에서도 계속 곯아떨어져 있었기에 딱히 피로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어 시간을 확인했다. 12월 31일. 올해의 마지막 날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의 끝에 있는 문으로 향했다.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을 열자, 두꺼운 철제 문 너머로 한기가 확 뿜어져 나왔다.

1주일 새 미국의 환경에 적응이라도 해 버린 것인가, 낯설게 느껴지는 집의 모습에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나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다녀왔습니다’는……필요 없겠지.”

 

여권을 서랍 속으로, 그리고 반지는 다시 쇼케이스 안으로 집어 넣고, 나는 곧바로 온수가 나오는지를 확인했다. 기차의 난방이 생각보다 강해서 자면서도 땀을 줄줄 흘렸기 때문이다. 온수가 제대로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땀투성이가 된 정장을 벗어 세탁기 안으로 던져 넣고는 곧바로 욕실로 향했다.

샤워기의 뜨거운 물을 머리로 받아내며 나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 있는 남자는 무척이나 한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신 차려! ‘윌리’는 거기에 두고 왔잖아!!”

 

거울 속의 그는 두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팡팡 두드렸다. 살가죽이 부딪히는 높은 소리가 몇 번이나 울려 퍼졌다. 통증에 얼굴을 찌푸리면서 그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선생님, 제가 잘 하고 있는 거겠죠……?”

 

 

 


 

 

 

 

다음 날, 평소보다 약간 늦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저는 다시 방으로 올라왔습니다. 부모님께서는 근처 상가에 볼일이 있다며 집을 비우셨기에, 혼자서 시간을 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여행가방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노트를 끄집어 냈습니다. 모퉁이가 작게 접혀 있는 페이지를 펼치자, 가느다란 실선으로 나누어져 있는 페이지가 나타났습니다. 왼쪽에는 ‘나’, 오른쪽에는 ‘P’라는 단어가 적혀 있고, 그 아래에는 이런 저런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었습니다.

노트를 들고 책상에 앉아서, 저는 펜을 들어 오른쪽의 ‘P’라고 적혀 있는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P]

 

- P?? William. P. Johnson??

-29

-도쿄??

-9월 24일

-A형??

-천칭자리

-독서, 게임 야구

-왼손잡이? 오른손잡이??

-맥주??와인??칵테일???

-면으로 된 것은 전부 다??

-??

-???

-????

 

크게 심호흡을 하고, 저는 펜을 놀리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그에 대해서 알고 있던 것들을 덮어 쓰고, 오해하고 있던 것들을 고쳐 쓰고, 그리고 새로이 알게 된 것들을 새로이 적어 넣었습니다.

어쩐지, 지금까지는 어렴풋이 알고만 있었던 그 사람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건방진 생각이라고 자각은 하고 있었지만요.

 

 

 

“으음……이 정도면 되려나?”

 

저는 고개를 들어 노트를 살펴보았습니다. 노트에는 조금 전에 비하면 무척이나 많은 내용이 추가되어 있었습니다.

 

 

- P = William Johnson.

-29

-LA, 일본에 오기 전까지는 뉴욕.

-9월 24일

-A

-천칭자리

-독서, 야구

-양손잡이

-마신다면 맥주. 사실은 잘 안 마시는 타입.

-면을 좋아함.

-부모님을 일찍 여의다.

-시계를 무척 소중히 여기고 있음.

-정말로, 굉장히, 엄청나게, 대단한 선수였다.

-고아원을 후원하고 있었음. 지금은 아님.

-블랙 카드? 라고 하는 걸 가지고 있음.

-강아지를 키우고 싶었지만 매번 기회가 없었다고 함.

-…….

-나를 선택한 이유 : 첫 눈에 반했으니까.

 

……사실은, 그 앞에 생략된 단어가 있습니다. 저는 기억을 되짚었습니다.

 

 

“……제가 첫 눈에 반한 사람이니까요.”

 

쑥스러운 듯, 시선을 피하면서 그렇게 말한 그는 두 손을 내저으며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 그러니까! 그런 뜻이 아니고……타카가키 씨는, 스타일도 좋고, 목소리도 좋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돌로서의 잠재력이라고 해야 하나…….”

 

그답지 않게 횡설수설하는 모습이 무척 신선했습니다. 물론,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요. 정말로 제가 원하던 대답이었다면, 이렇게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

 

그 때, 머릿속에 또 한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저는 재빨리 펜을 들었습니다.

 

-자기애(自己愛)가 굉장히 약하다. 야구선수의 자신에게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 이외에는 그렇지 않다.

 

문득, 언젠가 프로듀서가 저에게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단합대회 직후, 그 사람이 살던 기숙사에 다짜고짜 쳐들어 갔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때 그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은 다시 일어선 것이 아니라, 그저 쓰러지는 것이 두려워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을 뿐이다’고.

그 때는 영문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제는 어쩐지 그 말이 이해가 될 것 같았습니다.

들고 있던 노트를 내려놓고 크게 기지개를 폈습니다. 그러던 중, 충전기에 꽂혀 있는 휴대전화가 눈에 띄었습니다. 저는 손을 뻗어 얌전히 서랍장 위에 누워있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습니다.

 

“……어쩐지,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 했네요.”

 

어쩐지 연말인데도 휴대전화가 조용하다 싶더라니, 비행기에서 설정해 두었던 에어플레인 모드를 아직까지 안 풀고 있었네요. 나이를 먹는다는 걸 이런 곳에서 알게 되는군요. 저는 쓴웃음을 지으며 휴대전화의 에어플레인 모드를 해제했습니다. 밀물처럼 몰려오는 신년 축하 메일과 메시지들 가운데, 유난히 눈에 띄는 주소가 표시된 메일이 있었습니다.

국제발신 코드를 달고 있는 그 메일의 주소는, 다름아닌 캐서린의 주소였습니다.

 

 

그 날 오후, 저는 곧바로 부모님께 급한 일이 생겨서 다시 도쿄로 올라가봐야겠다는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언짢아하실 것이라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부모님께서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일 때문이라면 별 수 없지. 이제는 네 몸은 너 하나만의 것이 아니니까.”

 “……미안해요. 엄마, 아빠.”

“괜찮대도. 너랑은 벌써 20번도 넘게 가 본 새해맞이야. 두세 번 정도 양보한다고 해서 아까운 것도 아니고. 안 그래요, 여보?”

“……그렇지.”

 

현관에서 어머니와 함께 저를 바라보고 있던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딸아.”

“……네.”

“……너는 프로다. 세상이 너를 찾는다면, 거기가 어디라도 기꺼이 갈 수 있어야 해. 언제까지고 우리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너는 이미 네 길을 걷고 있고, 네게는 이미 훌륭한 이정표가 있으니까.”

“……네, 명심할게요. 고마워요.”

“……그래. 그럼 조심해서 올라가거라. 무슨 일 생기면 전화하고.”

“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거실로 다시 들어가셨습니다.

제 뒤로 다가온 어머니께서는 들고 있던 외투를 제게 입혀주시면서 제 귓가에 작게 속삭였습니다.

 

”그 사람에게 전해주렴. 다음 번에는 꼭 차라도 한 잔 같이 하자고.”

“네……?”

 

마치 속마음이 읽힌 것만 같았기에 저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어머니께선 빙그레 웃으면서 제 어깨를 두드려 주셨습니다.

 

“가능하면 내년에는 함께 봤으면 하는구나. 새해맞이.”

“……노, 노력해 볼게요…….”

 

그 인자한 미소에 괜스레 제 얼굴이 뜨거워졌습니다. 부모님께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현관문에 세워둔 여행가방과 함께 저는 집을 나섰습니다. 집 앞에는 미리 불러둔 택시가 있었습니다.

 

“기차역이요. 가능한 빨리 부탁드립니다.”

“네입.”

 

부드러운 가속도를 느끼면서 저는 차창 밖을 바라보았습니다. 겨울치고는 약간 포근하게 내리쬐는 햇빛을 받으며 휙휙 넘어가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저는 캐서린의 메일에 적혀 있던 내용을 떠올렸습니다.

 

-이기적인 부탁이란 건 알겠지만……P를 잘 부탁해요. 이 곳을 떠나면, 그에게는 이제 당신밖에 남아있지 않으니까.

 

그 메일을 읽고 나서야 저는 어젯밤, 그가 미소 뒤에 무엇을 감추고 있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미국에서 그가 저에게 몇 번이나 보여주었던 그의 상처였고, 지금도 그 사람을 옭아매고 있는 덫이었습니다.

그것은 외로움이었습니다. 고독이라고 하는, 사람의 마음에 작용하는 맹독이었습니다.

저는 휴대전화의 화면을 다시 바라보았습니다.

오늘은 12월 31일. 아직 연말은 하루가 남아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건……정말로 힘든 거네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저는 휴대전화의 연락처를 열어 가장 위에 있는 번호 몇 개를 선택해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세 분 모두 별 다른 일정이 없다고는 들었지만……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네요. 잘 풀렸으면 좋으련만.

 

 


 

 

 

CG프로덕션 근처의 지하 상가에 위치한 작은 바.

 

 

나는 ‘Booked’라고 적힌 팻말이 걸려 있는 문을 가볍게 당겼다. 손때가 잔뜩 묻어 있는 것과는 달리, 문은 너무도 쉽게 스르륵 열렸다. 딸랑거리는 도어벨의 소리를 뒤로 하며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주렁주렁 매달린 백열전구의 은은한 빛과 90년대에 유행했을 법한 재즈 음악이 흐르는 가게 내부에는 직선형 바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곧장, 가게를 가로질러 주렁주렁 거꾸로 매달린 글래스가 보이는 가운데 자리에 털썩 앉자, 카운터에서 글래스를 닦고 있던 콧수염을 기른 중년 남성이 곁눈질로 이쪽을 흘깃 바라보았다. 드세게 좌우로 뻗은 콧수염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다른 종업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가 이 곳의 마스터일 것이다.

그를 향해 꾸벅, 목례를 건네자 마찬가지로 가볍게 목례를 한 그는 들고 있던 수건과 글래스를 내려놓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입구에서 보셨다시피 지금은 예약이 잡혀 있습니다만, 혹시 예약이 되어 있습니까?”

“네, CG프로덕션의…….”

 

사장의 이름을 말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왼팔에 차고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밤 아홉 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그렇군요. 주문은 먼저 하시겠습니까?”

“……아뇨, 일행을 기다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꾸벅, 가볍게 허리를 숙이고, 그는 다시 카운터로 돌아가 컵을 닦는 일을 재개했다.

그렇게 몇 분인가 지났을까, 쿵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가게의 문이 벌컥 열렸다. 강하게 열어 젖힌 듯, 요란하게 딸랑거리는 도어벨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그 곳에는 청바지 위에 두툼한 패딩점퍼를 걸치고, 그 위에는 야구모자를 눌러 쓰고 있는 중년의 남성이 있었다.

 

“이거 미안하네. 차가 막혀서. 오래 기다렸나?”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내 옆자리에 앉은 남성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은은한 백열등 아래로 드러난 그의 얼굴은 평소에는 거의 볼 일이 없는 얼굴이었지만, 나에게는 무척 낯익은 얼굴이었다.

 

“아뇨, 저도 조금 전에 온 참입니다. 사장님.”

“……그래, 모양새를 보아하니 사무실에 있다가 온 모양이군.”

“뭐, 그렇죠.”

 

 


 

 

 

열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면서 도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하늘이 시커멓게 물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네, 다 왔습니다.”

“고마워요.”

 

택시에서 내린 저는 곧바로 맨션의 입구로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무척 낯이 익은 세 사람이 현관의 유리문 앞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었습니다.

 

“아, 저기 오네. 카에데! 여기야!”

“죄송해요, 열차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괜찮아, 괜찮아! 우리도 시장 보고 오느라 방금 도착했거든. 자, 들어갈까? 비밀번호 알고 있어?”

“아, 그건 제가 알고 있어요. 제가 열게요.”

 

 


 

 

 

투명한 액체가 담긴 글래스가 각자의 앞에 놓였다. 흰색 와이셔츠와 검은색 바지로 된 유니폼 위에 검은색 앞치마를 두른 마스터는 탁, 소리가 나게 셰이커를 내려놓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글래스의 물기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든 내겐 안 들린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생각보다 일찍 귀국했군.”

“네. 어떤 분께서 휴가를 2일이나 당겨주셔서요.”

 

훗, 웃으면서 사장은 글래스에 담긴 칵테일을 한 모금 마셨다. 그의 잔에 든 것은, 노란 빛이 감도는 백열전등 아래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새빨간 것이었다.

 

“데킬라 선라이즈. 달작지근해서 시작으론 좋아하는 녀석이야.”

“그렇군요. 저는 이쪽엔 영 문외한이라서.”

“그럴 줄 알았다. 대뜸 마티니. 그것도 흔드는 걸 시키는 녀석은 대개 그런 녀석들이지.”

 

사장의 말에 그는 시선을 내려 손 안의 글래스를 바라보았다. 한 점의 티끌도 없는 투명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마티니, 젓지 않고 흔들어서’.제임스 본드의 18번 대사가 생각났기에 그냥 말해 본 것인데, 정말로 나올 줄이야.

 

“그래……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건가?”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어디까지 개입하셨습니까?”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시치미를 뗄 셈인가.

프로듀서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고 있던 것을 입 밖으로 내놓는 데는, 비록 아주 조금이라 하더라도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타카가키 씨를 부추기셨죠?”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있나?”

 

사장은 자신의 잔에 담긴 액체를 한 모금 마시고 그를 바라보았다.

 

“반신반의했었죠. 처음에는 단순히 일이 잘 풀린다고만 생각했었습니다. 뉴욕에 도착한 그 날 까지는.”

“무엇 때문이지?”

“그녀의 앞에서 ‘메리엇’을 만난다고 이야기 했을 때, 그녀는 그게 누구인지 아는 눈치였어요.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제게서 누군가의 이름을 들었다 하면 그게 누구인지 제게 물어보던 사람이었는데 말입니다.”

“……계속해보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까 수상한 것이 하나 둘씩 보이더군요. 첫째는 1박 2일짜리 일정 치고는 그녀의 짐이 과도하게 많았던 것. 둘째는 어째서 내가 올린 휴가는 모조리 반송되고, 자로 잰 듯 일정이 끝난 것과 동시에 휴가가 떨어졌냐는 것. 그리고 셋째는……그녀가 ‘얇은 옷’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사장의 눈썹이 움찔했다.

 

“뉴욕과 LA는 기후가 완전히 다릅니다. 초겨울과 초여름 정도의 격차가 있죠. 그런데, 그녀는 그걸 알고 있다는 것처럼 얇은 옷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 말은 즉……제가 LA로 갈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죠.”

“그렇게 되겠지.”

“저는 그녀에게 LA로 간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녀가 그걸 알고 있었다는 건……누군가 제 3자가 그녀에게 개입을 했다는 뜻이겠죠. 그리고 그 사람은, 제 일정을 알고 있으며, 그녀와 함께 ‘메리엇’을 목격한 사람입니다.”

 

거기까지 말하고 프로듀서는 자신의 잔에 든 것을 한 모금 마셨다.

 

“다른 근거가 더 필요하십니까?”

“아니, 그 정도면 됐네. 이거……이미 다 들켰었군.”

 

사장은 씁쓸하게 혀를 차며 자신의 글래스를 비웠다. 톡톡, 빈 잔으로 바를 두드리자 글래스를 닦고 있던 마스터가 조용히 다가왔다.

 

“같은 걸로 한 잔 더 주겠나? 시럽은 반만 넣어서.”

“네.”

 

곧바로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하는 마스터의 모습을 바라보던 사장은 고개를 돌려 프로듀서를 바라보았다.

 

“……그래, 내가 부추겼다. 그녀 역시 너를 무척이나 알고 싶어하는 눈치였어. 조금만 등을 떠밀어주면 곧바로 움직일거라 생각했지.”

“……그렇습니까. 그녀가 생각대로 움직여 주던가요?”

”생각대로였어. 굉장히 의욕적으로 행동해 주더군. 내 기대 이상으로.”

“……왜 그런 짓을 하신 겁니까?”

“……욕심이다. 너를 놓치고 싶지 않은.”

“어째섭니까? 저보다 뛰어난 인재들도 널리고 널렸을텐데요. 가령…….”

“이유? 그런 건 없어.”

 

훗, 하고 코웃음을 치며, 그의 말허리를 끊고 들어온 사장은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넌 욕심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나?”

“…….”

“욕심에는 이유가 없어. 그냥 내가 가지고 싶으니까 욕심을 품는 것이지.”

“저는 그런 평가를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건 네 생각이고. 나는 아니거든. 난 그냥, 너라는 사람 그 자체가 탐이 났을 뿐이야.”

“그렇습니까…….”

 

탁, 하는 소리를 내며 사장의 앞에 새 글래스가 놓였다. 그것을 들고 한 모금을 크게 들이마시는 사장의 옆에서 프로듀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불쾌했다면 사과하겠네. 아니, 불쾌했겠지. 당사자에게 일언반구 말도 없이 멋대로 일을 저질렀으니. 미안하네.”

“……아닙니다.”

“야, 표정 관리는 하고 그런 소리 해라. 열 받았다는 게 표정에서 다 나오거든?

“아무튼, 아닙니다.”

”……그래, 사과의 의미에서 오늘은 내가 사도록 하지.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마음껏 먹게.”

 

사장의 기대와는 달리, 프로듀서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면 뭐, 일 얘기라도 할까?”

“그거 좋죠. 그렇지 않아도 만나면 드리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곧바로 반색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사장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 아직도 멀었군’이라고 생각하면서.

 

 


 

 

앞으로의 플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시간은 밤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새해맞이는 가족과 함께 하기로 했다며 서둘러 귀가한 사장을 배웅한 뒤, 나는 술 기운도 깰 겸, 집으로 향하는 길을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길을 누비는 사람들의 머릿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자동차조차 지나다니지 않는 골목길을 걷고 있자니, 왼팔에서 짤깍, 하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시계를 귓가에 가져갔다.

 

땡, 땡, 땡, 땡, 땡, 땡, 땡, 땡, 땡, 땡, 땡, 땡.

 

열두 번의 종소리. 새해가 온 것이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Happy new year.”

 

새하얗게 내뱉은 한 마디는 산산이 부서져, 흔적도 없이 하늘 속으로 사라졌다.

 

 

 


 

 

 

 

안녕하세요, 이번에도 새벽업로드를 하는 못난이 작가입니다.

 

.......드디어 끝났다!!

이 에피소드의 첫 이야기가 2월 23일에 올라왔으니, 이 에피소드 하나에만 거의 두 달이 걸렸습니다.

세상에, 이 저주받은 속도를 어떻게 좀........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를 조금만 하자면.

이번 에피소드는 전체적으로 '프로듀서'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리메이크를 거치면서 인물상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잡혔기에, 그 수정된 인물상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시작했습니다만.....

무지 길어졌네요. 차라리 그냥 설정집 하나 쓰고 말걸, 하는 생각이 무럭무럭 샘솟았습니다.

 

이번 이야기에서 프로듀서라는 인물이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모순이 보이실 겁니다.

앞으로도 P는 아이돌들 앞에서는 완벽한 어른으로 있을 것이지만, 그것이 한계에 달한다면 누군가의 앞에서는, 혹은 혼자만 있는 곳에서는 약점을 끌어안고 혼자서 울 겁니다. 이랬다저랬다, 보고 있으면 참 답답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이 시리즈가 끝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P라는 인물에게 있어서는 2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단단히 뿌리내린 트라우마니까요. 고작 2~3년가지고 회복될 것 같았으면 성격장애가 아니죠. 이야기의 엔딩과 직결되는 요소이기도 하고요.

 

한 가지, 이 시리즈를 쓰면서 제가 처음부터 계속해서 넣은 장치가 있습니다. 바로 시계죠.

작중에서는 '아버지'와 P를 연결시켜주는 유일한 연결고리인데, P는 작중에서 단 한번도 이 시계를 떼어놓은 적이 없습니다.

자신의 유일한 가족이 남긴 유일한 유품을 보면서, 지금은 없는 가족을 기억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나타내......려고 했습니다만, 잘 안 된 것 같네요. 역시 좀 더 노골적으로 써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번 이야기에서 밝혀진 것들.

시계의 제작을 의뢰한 사업가나 이치노세 시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P의 시한부에 관한 이야기.

이 사실들은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뒷이야기에서 밝혀집니다. 나름대로 중요한 떡밥이니 절대로 안 까먹을겁니다.

 

이러나 저러나, 단일 에피소드로는 (아마도)가장 긴 이야기가 되었던 에피소드가 끝났습니다.

설정집을 쓸 바에야 폼나게 이야기로 만들자! 라는 생각으로 설정집에 살을 붙인 형태이기에 구성이나 전개 등등이 매끄럽지 않는 구석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아마 있을거에요. 그런 부분이 보이신다면 가차없이 지적을 해 주시면 글쓴이의 성장에 무척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럼, 저는 다음 이야기에서 뵙겠습니다.

 

 

 

 


 

 

 

 

 

 

터덜터덜, 힘없는 발걸음으로 집에 도착한 프로듀서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현관의 자물쇠가 열려 있었던 것이다.

 

“내가 문을 안 잠궜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을 열자, 평소에는 전혀 느낄 수 없는 후끈한 공기가 훅 새어 나왔다. 위화감에 의아해하면서 귀를 기울이자, 거실 쪽에서 시끌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프로듀서가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현관문이 닫혔다. 철컥, 하는 소리를 들은 것인지,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거실에서 네 명의 사람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저마다 술이라도 한 잔씩 걸친 것인가, 얼굴에 발갛게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아앗! P군! 이제 오면 어떡해! 자정 벌써 지났잖아?!” 

카와시마 미즈키와. 

“프로듀서 씨!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센카와 치히로와. 

“아, 저, 그게, 그러니까……새, 새해 복 많이……받으세요…….” 

미후네 미유와. 

“새해 복 많이 받아요, 프로듀서.” 

타카가키 카에데.

이 자리에 있을 리가 없는 네 사람이 그의 눈 앞에 있었던 것이다. 입을 멍하게 벌린 채 프로듀서는 눈 앞의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여, 여러분들이 왜 여기에……?”

“신년 파티를 하고 싶은데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말이야! 여기라면 P군이 얼마든지 써도 된다고 했으니까. 써도 되지?”

“그, 그렇긴 합니다만…….”

“자, 자! 여기에 서 있지 말고 얼른 들어오세요! 요리도 잔뜩 있고, 오늘은 특별히 귀여운 여동생들이 실컷 어울려 드릴게요!”

 

어느 새 자신에게 달라붙은 치히로와 미즈키의 손에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가던 그는 조심스레 두 사람의 손을 떼어냈다.

 

“이, 일단 옷부터 갈아입고 나오겠습니다. 그러니까 먼저 가 계세요.”

 

"그래!"라며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인 미즈키는 미유와 치히로의 손을 잡고 거실로 돌아갔다. 현관에는 카에데와 프로듀서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프로듀서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여성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타카가키 씨, 어째서……?”

“가르쳐주고 싶었어요.”

“가르쳐주다뇨……?”

“프로듀서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요.”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느껴졌다. 그는 차마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정곡을 찔린 것도 있지만, 술 기운 덕분에 여지껏 억눌러오던 것들이 넘실거리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가, 거실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힐끗, 눈을 돌려 거실 쪽을 바라보던 카에데는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가, 멍하니 서 있는 그를 끌어 안았다.

 

“다른 건 괜찮아요. 하지만, 이것만큼은 잊지 말아주세요. ‘윌리’는 혼자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 곳에서의 당신은, ‘프로듀서’인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동료잖아요? 함께 걷는 길이잖아요? 그렇죠?”

“……네……맞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프로듀서는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그녀의 어깨로 얼굴을 파묻었다. 그의 어깨가 가늘게 미동했다. 그녀는 그를 끌어안은 채, 가늘게 떨리는 그의 커다란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주었다.

 

“……어서 와요. 프로듀서. 일주일간 정말 고생하셨어요.”

 

 

<(Re)Write─덮어 쓰는, 혹은 다시 쓰는.> 끝.

9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