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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하게 느긋하게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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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4-10, 2017 21:43에 작성됨.

 

---23

집에 들어오고 나서도 치하야는 한참 동안 치햐를 만지작거렸다. 이 인형에게 무언가를 털어놓으면 그걸로 다 되는 것일까? 그렇지만 무수히 바늘에 찔렸을 프로듀서의 손이 잊히지 않았다. 아마 하루카랑 야요이도 손을 많이 찔렸을 것이었다. 그 마음을 생각하니 치햐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치하야는 다시금 치햐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엔 다정함과 슬픔이 서려 있었다.

 

“흠, 있지. 치햐.”

 

천을 덧대어 만든 치햐의 눈을 마주했다.

 

“요즘 많이 힘들었지? 유우 생각도 많이 나고, 아이돌이 되고 연락 한 번 없던 어머니는 갑자기 이혼한다고 하고... 아버지는 오늘도 연락하지 않고 있어.”

 

때로 치하야는 한 행복한 광경을 상상하곤 했다. 무대에서 노래하는 자기를 부모님과 자란 유우가 웃으며 바라보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미 이루어질 리가 없어 허망함만이 남곤 했다.

 

“아이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어. 노래만 부를 수 있으면 아무래도 상관없었어. 하지만 아이돌을 계속하면서 다른 행복도 깨달았어.”

 

아이돌이 되고 나서 생긴 따스한 추억이 천천히 떠올랐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어딜 가도 항상 혼자였던 거 너도 기억나지? 하지만 이런 날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생겼어.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과 노래하는 것도 즐겁단 걸 깨달았어. 내 노래로 다른 사람들을 미소 짓게 하는 게 행복하다는 것도 알게 됐어.”

 

서로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으며 지탱하는 765 프로의 모두들, 하루카와 야요이와 같이 you-i로 활동한 나날들, 자신을 응원해주는 ‘푸른 기사단’과 수많은 관객들. 그리고 자기를 끝까지 믿어주고 있는 프로듀서. 모두 자기가 무너졌을 때 손을 뻗어준 사람들이었다.

 

“많은 사람들 덕분에 노래하는 행복을 더 많이 깨달았어. 난 그 고마운 사람들 앞에서 다시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하지만 다시금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유우의 죽음 이후 치하야에게 한 번도 웃어준 적이 없는, 오직 차가움만을 안겨 주었던 기억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떠오른 따스한 추억들이 이내 푸른 차가움에 얼어붙었다.

 

“내가 이젠 어엿한 아이돌이 됐으니, 한 사람의 몫을 할 수 있으니 두 분이 이혼하겠대. 나 때문에 쭉 힘들었으니까 그냥 받아들이래.”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던 치하야는 다시금 거세진 소용돌이와 마주했다.

 

“내 노래 때문에, 내가 아이돌이 돼서 부모님이 이혼한 거야.”

 

눈물이 치햐에게 하나둘씩 떨어졌다. 지금도 이혼 얘기를 들었던 그 날만 떠올리면 가슴이 시려 왔다.

이젠 올스타 라이브 때 환영으로 나타나 자신에게 행복하냐고 묻던 유우가 떠올랐다.

 

“두 분이 내 노래를 좋아한 적이 있긴 할까?”

 

예전 같았으면 소용돌이가 거세지며 그대로 휩쓸렸을 것이었다. 그러나 어디선가 나타난 빛이 비쳐오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마음속 소용돌이가 멎기 시작했다. 치하야는 그 빛 속에서 붉은색, 주황색 등 여러 색깔이 담겨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동안 소용돌이에 가려졌던 기억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것은 온전히 치하야의 선택이었다.

 

‘꼭 봐야겠어.’

 

굳센 다짐과 함께 치하야는 과거와 마주하기로 했다.

치하야가 처음으로 마주한

그동안 짙은 불행에 가려져 있던 기억의 조각이었다. 그리고 되찾은 기억의 조각은 새로운 조각을 꺼냈다.

지금은 액자로 남은 어린 날의 축젯날이었다. 전통 의상을 입고 장난감을 들고 노는 유우가 보였다. 즐겁게 놀던 유우는 실수로 넘어지면서 장난감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장난감이 길바닥에 떨어지며 망가지는 걸 본 유우가 울기 시작했다.

 

‘유우야 울지마.’

 

치하야는 속상해서 울고 있는 유우에게 손을 뻗으려 했다. 그 순간 앞에 어린 자신이 다급히 달려와 유우를 안아주는 걸 볼 수 있었다. 어린 치하야는 우는 유우를 달래며 나지막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조용하고도 감미로운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며 유우는 울음을 그치고 배시시 웃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도 치하야의 노래를 듣고 모이기 시작했다. 노래가 끝나자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아버지와 치구사도 사람들 속에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웃고 있었다.

 

‘자, 이건 꼬마의 누나가 불러준 노래에 대한 답례야.’

 

장난감이 망가질 때부터 지켜보던 한 가게 주인이 곰 인형 하나를 유우에게 안겨주었다. 부모가 괜찮다고 거절했지만 가게 주인은 꼭 주겠다는 입장이었다.

 

‘따님 노래를 들으니 저도 행복해져서 말이죠. 그리고 남매지간도 정말 보기 좋고요. 정말 행복하시겠습니다.’

 

아버지는 가게 주인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치하야와 유우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사진을 찍어주는 아버지와 치구사는 웃고 있었다. 그 사진이 바로 치하야가 지금 보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래, 그럴 땐 웃으셨지. 잠깐, 웃으셨어?’

 

그리고 사진 속 과거를 넘어 치하야는 더 깊은 과거의 기억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기억마다 노래와 웃고 있는 유우, 부모님이 함께 있었다. 가장 오래된 기억에서도 어린 치하야는 웃고 있는 부모 앞에서 노래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 기억나? 내가 어디서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부모님은 웃고 있었어.”

 

다시 기억을 거슬러, 기억은 중학생 때 참가했던 한 노래 경연 대회 현장에 다다랐다. 치하야는 어린 자기가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관객석에서 어린 자기를 지켜보는 부모님을 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같이 치하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웃고 있었다. 여태까지 거센 소용돌이에 가려졌던 모습이었다.

 

“유우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부모님은 내 노래를 들을 때만은 웃었어.”

 

그리고 기억은 다시 이혼 얘기를 들었던 날로 바뀌었다.

 

‘못난 어머니라서 미안하구나.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네 노래를 좋아해 줘서 나도, 그 이도 너를 자랑스러워 하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이혼 얘기에 마음이 휩쓸려 제대로 듣지 못했던 말이었다. 차가운 말투에 묻혀 있었지만, 치구사도, 아버지도 치하야가 계속 노래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유우도, 부모님도 내가 행복하게 노래해서 웃었던 거였어?’

 

마침내 답과 마주하자, 마음속 소용돌이가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하나 맞춰지며 아름다운 그림을 완성했다. 그것은 행복한 표정으로 노래하는 치하야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동안 난 불행에 쫓겨 다급하게, 절박하게 노래를 불렀어. 난 그냥 노래하는 게 행복한 거였는데.’

 

단순하면서도 따스한 것이 가슴 속에서부터 천천히 퍼져 나갔다. 그러나 낯설지 않았다.

 

“유우도, 부모님까지도 내 노래를 들을 때 웃고 계셨던 것... 그래, 내가 노래할 때 가장 행복해서였어.”

 

치하야는 마음이 차분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치햐를 어루만지며 그동안 잊고 있던 간단한 사실을 되새겼다.

 

“우리에게 노래 부르는 건 행복 그 자체야. 그렇지? 그동안 잊고 있었어.”

 

치하야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슬픔과 죄책감의 소용돌이를 겨울바람에 실어 보냈다.

 

‘이 세상에 없는 유우도, 떠나버린 부모님도 옛날처럼 노래 부르며 행복한 나를 보고 싶어 할 거야.’

 

치하야는 다시 맞춘 행복이란 그림을 바라보고 나서 다시 치햐와 눈을 마주쳤다.

 

“치햐, 우리 다시 무대에 서자. 이제는 다급하게, 절박하지 않게, 그리고 차분하게, 느긋하게 노래하자. 그리고 다시 행복해지자.”

 

차디찬 겨울바람을 맞으면서도 한동안 치하야는 치햐를 꼭 껴안고 있었다. 그리고 눈빛은 밤하늘의 별보다도 빛났다.

 

다음 날, 치하야는 치햐를 안고 레슨실로 향했다. 먼저 와서 연습하고 있던 아즈사와 타카네, 하루카가 치하야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어머어머, 정말 귀여운 인형이네. 볼 때마다 치하야랑 똑같이 생겼다고 느꼈달까?”

 

“인형이란 무언가를 본뜬다는 것, 마치 키사라기 치하야가 둘인 것 같사옵니다.”

 

둘에게 웃어 보인 치하야는 하루카에게 감사를 표했다.

 

“하루카, 정말 고마워. 야요이랑 함께 만들어줬다고 프로듀서에게 들었어. 그리고 응원해주신 두 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아니야. 나보단 프로듀서 씨랑 야요이가 더 고생했는걸?”

 

멋쩍어하는 하루카의 손에도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정말로 프로듀서는 상냥한 사람이군요. 여느 사람보다 열심이었습니다. 지금의 치하야를 보면 새삼 다시 느끼옵니다.”

 

“나도, 다른 동료들도 돕겠다고 했지만 더는 신세 질 수 없다고 거절했다니깐. 알고 보면 프로듀서 씨도 참으로 따뜻한 분인걸.”

 

아즈사도, 타카네도 세 사람이 치햐를 열심히 만드는 모습을 보았다. 치하야를 위한 선물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두 사람은 웃으며 응원했다.

 

“저 다시 노래해 볼게요.”

 

“괜찮겠어?”

 

걱정하는 하루카를 보고 치하야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치하야는 치하야를 꼭 안은 채 마음을 집중했다. 반주가 흘러나오면서 치하야는 천천히 입을 떼었다.

 

「 계속 잠들어 있다면 이 슬픔을 잊을 수 있겠지.

그렇게 바라며 잠을 이룬 밤도 있어.

둘이서 보내던 먼 나날, 기억 속의 빛과 그림자

지금도 마음속의 미로를 헤매네.

그것은 덧없는 꿈.

그래, 당신과 본 물거품 같은 꿈.

설령 100년의 잠조차 언젠가는 이야기라면 끝나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

 

잠자는 공주, 눈을 뜨는 나는 지금 누구의 도움도 빌리지 않고

그저 혼자서도 내일로 걷기 위해서

아침 햇살이 빛나서 눈물이 흘러도 눈을 뜬 채로. 」

 

치하야는 그야말로 아름답게 노래하는 공주와 같았다.

 

“치하야! 드디어…”

 

“어머어머, 역시 ‘푸른 가희’다워.”

 

“오랜 잠을 자던 공주가 드디어 잠에서 깨어났사옵니다.”

 

세 사람은 다시 노래 부르는 치하야를 보며 감격했다. 치하야의 노래는 여전히 차가웠다. 하지만 단지 슬픔과 불행으로 차가운 것이 아니었다. 마치 얼음으로 만든 조각상과 같이 시리게 차갑기에 도리어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은 슬픈 노래를 들으면서도 행복이 느껴졌다.

한껏 가슴이 뭉클해진 하루카는 치하야의 노래가 얼음이 흩날리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 봤던 다큐멘터리에서 나온 눈 결정이 휘날리는 ‘다이아몬드 더스트’가 떠올랐다.

 

‘다이아몬드 더스트, 우리 말로 ‘세빙’이랬나?’

 

치하야가 노래를 끝내자마자 세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치하야를 껴안았다. 그리고 격려와 감사 인사가 한참이나 오갔다.

그때 프로듀서는 아미, 마미, 야요이, 이오리, 히비키와 함께 유아 프로그램 촬영장에 있었다. 쉬는 시간을 맞아 아이돌들에게 방송 피드백을 주던 도중 핸드폰이 울렸다.

 

“잠시만요. 예, 아마미 양.”

 

- 프로듀서 씨! 치하야가, 치하야가 다시 노래했어요. 우리가 해냈다고요!

 

하루카의 목소리엔 한껏 들뜬 기분과 감격스러운 울먹임이 섞여 있었다. 드디어 찾아온 기쁜 소식에 프로듀서는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정말입니까?”

 

- 잠깐만요. 치하야 바꿔드릴게요!

 

- 프로듀서.

 

“치하야 양, 정말 다행이에요. 그리고 고마워요.”

 

- 아닙니다. 제가 감사한 걸요. 제가 다시 노래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전해진 걸요. 그리고 치하야 양이 스스로 다시 선 거에요. 축하드려요.”

 

-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고맙습니다.

 

울음이 밀려오는 치하야의 감사 인사를 계속 듣자니 프로듀서도 눈물이 핑 돌았다. 다급히 녹화 끝나는 대로 찾아가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이돌들이 볼세라 안경을 벗고 눈을 가렸다.

그러한 프로듀서를 바라보던 아미가 궁금했는지 다가왔다.

 

“오빠!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프로듀서, 또 변태같이 사람 궁금하게 놔둘거야?”

 

“본인하고 햄조도 정말 궁금하다고. 얼른 말해봐!”

 

이오리에 히비키까지 재촉하자, 프로듀서는 울먹임을 참으며 겨우 말했다.

 

“치하야 양이 다시 노래했대요... 예전처럼...”

 

“우와! 만세!”

 

“아미도 만세!”

 

“치하야가 해냈다!

 

신이 난 아미와 마미가 여전히 눈을 가리고 있는 프로듀서에게 매달렸다. 히비키까지 프로듀서에게 달려들었다.

 

“거 봐, 난 진작부터 치하야가 해낼 줄 알았다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얘기하는 이오리의 눈에 울음을 참으려 애쓰는 야요이가 보였다.

 

“야요이, 왜 그래?”

 

“힝... 아직 녹화 안 끝났는데... 치하야 씨가 다시 노래해서 기쁜데... 지금 울면 안 되는데...”

 

“괜찮아. 내가 안아줄 테니 뚝 그쳐.”

 

울음을 애써 참으려는 야요이를 안아주는 이오리도 가슴이 짠해져 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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