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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색 속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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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4-10, 2017 02:08에 작성됨.

 

늘어져라 하품을 하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후 9시.

하나 둘씩 담당하고 있는 아이돌이 늘어날수록 내 업무량도 점점 늘어나는 기분이다. 물론, 사무 쪽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유능한 사무원도 있고, 유능한 상사도 있다. 문제라고 한다면, 개성이 넘치다 못해 범람하는 아이돌들의 상대를 해 주는 것이 문제일까.

오늘은 그 중에서 한 사람, 수많은 아이돌들 중에서도, 그 시작부터 나와 함께했던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

 

 

전직 모델 출신.

가창력, 외모, 성격, 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정상급 아이돌.

곧게 뻗은 팔다리로 펼치는 가무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그에게로 시선을 돌리게 만들고, 단체곡 가운데에서도 이따금씩 나오는 솔로 파트에서 돋보이는 그녀의 목소리는 ‘뭐야, 아이돌 노래야?’라고 지나쳤던 사람들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하는 마력이 있다.

그렇다, 이것은 타카가키 카에데에 대한 이야기이다.

 

담당이라 해놓고 이런 말을 하기는 그렇지만, 나는 그녀에게 약하다. 특히 그녀의 목소리……속삭임에 약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신비롭다. 허스키한 듯 하면서도, 사적인 자리에서 말할 때는 어린아이처럼 발랄함이 느껴지고, 스테이지 위에서 무게를 잡고 말할 때는 그 나이대를 짐작하기 힘들 정도의 신비함을 품고 있다.

무엇을 숨기랴. 까 놓고 말하면, 내 취향이다. 스트라이크 존 한 가운데 꽉 찬 돌직구 수준이다. 가능하다면, 매일 아침 그녀의 목소리를 녹음한 알람으로 일어나고 싶을 정도다.

그런 그녀이기에, 내 귓가를 간질이는 그녀의 목소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치사량의 독 이상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래. 단풍색의 독이다. 메이플 시럽처럼 달콤한 극약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언제나 호기심으로 나를 죽이려 든다.

 

 

그 조짐을 느낀 것은, 처음으로 가졌던 술자리에서였다.

구체적으로는 잔뜩 취한 그녀를 업고 그녀의 집으로 향하던 도중의 일로, 그 때의 그녀는 아직 데뷔조차 하지 않은, 신인조차 아니었던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기에 남녀 사이라는 마지노선을 제외하면 우리 두 사람의 관계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굳이 정의를 하자면 사무소 내에서 가장 친한 사이. 그것이 우리들의 관계였다.

 

“후우……다른 사람이랑 이렇게 오랫동안 마셔 본 건 처음이에요.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난 다음부터는 계속 혼자만 마셨으니까…….”

 

내가 한 잔을 마시는 동안 네댓 잔씩 들이마시니 이런 꼴이 나는 거지.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볼을 부풀리며, 내 팔 사이에 끼어 있는 자신의 다리를 앞뒤로 붕붕 흔들었다. 하필이면 보도블럭의 튀어나온 부분에 걸려 넘어질 뻔 했기에, 가벼운 항의의 뜻을 담아 몸을 위로 크게 들썩였다. 귀여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 것인가, 그녀는 내 어깨 위에서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즐거워요. 다른 사람이랑 대작을 한다는 건, 이렇게 즐거운 일이었군요. 기분 좋게 취한다는 건 지금까지 상상도 못 하던 일이었어요.”

 

그야 그렇겠지. 혼자서 취하면 데려다 줄 사람도 없을 테니. 그러자 그녀는 또다시 볼을 부풀렸다. 직접 내 눈으로 본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늘상 내곤 하는 소리. ‘부우~’하는 소리가 들려왔으니, 아마도 볼을 부풀렸을 것이다.

 

“정말, 낭만이 없어요. 도쿄 남자들은 다 이런가요?”

 

그야, 접대를 많이 하다 보면 이렇게 되는 것이겠지.

서류가방을 의자 삼아, 내 등에 업혀 있는 그녀의 목소리는 술기운이 돌고 있었기 때문인지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레슨은 어떻고, 트레이너는 어떻고, 함께 레슨을 받는 동료들은 어떻고. 그렇게 한참을 떠들어댄 다음에야 그녀는 지친 듯 내 등에 몸을 기대었다. 뭉클, 하는 부드러운 감촉과 체온이 느껴졌지만, 곧이어 덮쳐올 쇼크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몸을 내 등에 기대면서 그녀의 머리는 자연스럽게 내 머리쪽으로 내려오게 되었고, 그 자세에서 말을 하면, 말소리는 자연스럽게 내 귓가로 날아오게 된다.

 

“죄송해요……저만 마시고, 저만 떠들고, 결국에는 이렇게……저, 싫은 여자네요.”

 

그녀가 뭐라고 했는지 역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귀에서 시작된 전류가, 척추와 목덜미를 타고, 발끝으로, 머리끝으로, 달려갔다는 사실이었다.

 

“……프로듀서?”

 

발걸음을 멈춘 것이 의아했던 것인지 그녀는 몸을 떼고 나를 불렀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꾸하고, 나는 다시 허전해진 등의 감촉에 아쉬워하며 발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그 때만 하더라도, 나는 단순히 ‘그녀의 목소리가 그렇게 매력적이구나’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눈을 돌리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바꿔먹기 시작한 것은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가을에 들어온, 온천이 유명한 지방에 출장을 나갔을 때의 일이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온천 마을. 그것도 자신의 상징인 단풍을 배경으로 한 촬영에 들떠 있었던 것인가. 매번 맥주 대신 호쾌하게 일본주를 병 단위로 비우는 만큼 나름대로 술에 강하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촬영을 마칠 무렵에는 완전히 술기운에 절어 있었다.

함께 촬영했던 사람들 중에서 술고래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 사람한테 당한 것일까.

 

“죄송해요……운치에 취해 마시다 보니 저도 모르게 이렇게……그래도, 프로듀서가 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하고 안심해버렸습니다…….”

 

그렇게 쉽게 안심하지 말라고 나무라자, 그녀는 술기운과 온천의 열기로 새빨갛게 달아오른 눈꼬리로 눈웃음을 지으며 마치 아이처럼 에헤헷, 하고 웃었다. 고작 분위기 하나로 대체 얼마나 마신 것인지, 발걸음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그녀를 부축하면서 그녀의 숙소에 도착할 무렵이 되자 보는 눈이 없어진 것을 확인한 그녀는 곧바로 내게 몸을 기대어왔다.

 

“후후……이러니까 옛날 생각 나네요. 그땐 자주 이랬는데…….”

 

주향(酒香) 너머로 성인 여성의 달콤한 냄새가 내 이성을 뒤흔든다. 최대한 스킨십을 자제하며, 휘청거리는 그녀의 몸을 지탱하느라 속수무책인 내 귓가에 그녀의 체취 이상으로 달콤한 그녀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후우……다음에는 프로듀서도 함께 했으면 좋겠네요. 따뜻하게 데운 술…….”

 

한껏 달아오른 열기를 품은 그녀의 콧바람과 날숨이 귓속을 헤집고, 한순간 흐물해진 정신을 취기에 젖은 그녀의 촉촉한 목소리가 뒤흔들었다. 절로 척추가 뻣뻣하게 섰다. 서서히 몰려오던 피로감이 한방에 날아갔다.

그렇군. 이래서 다들 결혼 결혼 노래를 부르는 것인가. 왠지 알 것 같아.

내색은 하지 않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미리 준비해둔 잠자리에 그녀를 반쯤 던져두고 나오기는 했지만 그 날 밤, 나는 쉽사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어른거리는 그녀의 향기와 그녀의 속삭임이 끊임없이 나를 뒤흔들었다. 결국 나는 밤새도록 잠자리를 뒤척이다 어렵게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그녀는 내 꿈속에서도 튀어나와, 꿈을 꾸는 내내 그 속삭임으로 나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

 

 

타이핑을 하던 손을 멈추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돌이켜보면, 죄다 술에 취해 있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 앞으로는 술자리는 적당히 거절하자고 생각하며, 손을 뻗어 옆에 놓인 머그잔을 들어올렸다. 언제 이만큼 마신 것인가, 분명 넘치기 직전까지 담아두었을 터인 커피가 이제는 한 모금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나중에 채워야지. 라고 생각하며 다시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냐고? 천만에.

 

 

*****

 

 

그 다음에 말할 것은, 발렌타인 특집 촬영이 있던 날, 스테이지의 뒤쪽에서 있었던 일이다.

촬영 스케줄에 관한 최종회의를 마치고, 장비 설치가 한창인 스테이지 뒤쪽을 터덜터덜 걷고 있을 때였다.

 

“……프로듀서? ……이쪽이에요, 이쪽.”

 

나를 부르는 감미로운 목소리에 우선 의식을 빼앗기고 뒤늦게 목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면, 살랑살랑, 고양이의 꼬리처럼 흔드는 손짓이 나를 유혹한다. 꽃에 이끌린 나비처럼 휘적휘적 그녀를 향해 다가가면, 바위 위에 고고하게 핀 꽃처럼 설비를 담아두는 박스 위에 앉아있는 그녀는 정말로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갑자기 불러서 놀라셨죠? 저와 어울려 주시는 건 모처럼이라, 오늘은 조금 놀래켜드릴까……생각했어요. 죄송해요.”

 

그녀는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색이 다른 두 눈동자를 촉촉하게 물들인다. 그 눈에서 쏘아내는 눈빛을 견뎌내지 못하고 나는 그녀의 앞에서 눈을 피하고야 말았다. 내 실수였다.

포식자의 앞에서 등을 보인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그렇죠……화나셨겠죠……하지만, 프로듀서는 무척 바쁜 사람이니까요……기회라고 할 만한 것은 지금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니.”

 

말을 하다 말고, 상자에서 일어난 그녀는 내 목으로 손을 뻗었다. 눈길을 피하느라 반응이 늦었다. 뒤늦게나마 그녀의 손길에 저항을 해 보지만, 그녀는 뿌리칠 겨를도 없이 내 목에 단단히 손을 걸고 자신의 체중을 기대어 왔다. 그녀의 체중 정도는 얼마든지 지탱할 수 있지만, 그녀의 입에 물려 있는 것을 본 순간, 나는 평정심을 잃고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야 말았다.

 

“괜찮아요. 여기는 인적도 없는 곳이니까요. 그러니까, 자아.”

 

그녀의 자그마한 입술에 물려 있는 것은, 엄지손톱보다 약간 큰 사이즈의 초콜릿.

저건 또 언제 꺼낸 것인가. 뭐라 반응할 틈도 없이 그녀는 눈을 내리깔며 입술을 내게로 들이밀었다. 퀴퀴한 스테이지 뒤편의 냄새를 뚫고 풍겨오는 성인 여성의 독특한 향취와, 메이크업이라는 무장을 마친 미녀의 자태에 매료되어 머뭇거린 사이, 그녀와 내 입술은 초콜릿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꺼낸 지 꽤나 시간이 지난 것인지, 내 입술에 닿은 초콜릿은 끈적하게 녹기 시작하고 있었다.

외통수였다. 쓸데없이 움직였다가 화장에 초콜릿이 묻기라도 한다면 문제가 생길 터.

곁눈질로 시계를 확인했다. 역시나, 촉박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굳게 다문 입술의 힘을 풀자, 기다렸다는 듯 달콤쌉싸름한 것이 입 안으로 들어온다.

내가 백기를 내걸고, 초콜릿을 입 안으로 집어넣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그제서야 방긋 웃으면서 얼굴을 뗀다. 입술에 묻은 초콜릿을 혀 끝으로 핥는 그녀의 모습에 크게 심장이 뛰었다. 그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아이처럼 웃는 얼굴에는 발갛게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작전 성공이네요. 해냈습니다.”

 

아몬드가 들어간 초콜렛을 씹어 삼키면서, 나는 아직 그녀의 손이 내 목을 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교라도 해야겠다 싶어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허리를 숙인 순간, 그녀가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처음이에요. 이런 어른의 이벤트……그렇지만, 무척 즐겁네요. 그렇지 않나요?”

 

초콜릿의 단 맛 따위는 단번에 날려버리는 달콤한 속삭임이 뒷덜미의 솜털을 쓰다듬는다. 뒷목이 쭈뼛쭈뼛 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내 눈 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그녀 자신의 얼굴은 이미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물론 내 얼굴 또한 사정없이 화끈거리는 것에 미루어보면 나 역시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으리라.

이래서야 설교를 할 자격이 없지 않는가. 결국 ‘다음부터는 하지 마라’는 말을 힘없이 흘릴 뿐이었다.

소녀처럼 방긋방긋 웃고 있는 그녀가 그것을 알아 들었는지는 둘째로 치고.

 

 

*****

 

 

오늘 할당된 분량을 끝내고, 드디어 고대하던 퇴근의 때가 온 것을 몹시 순수하게 기뻐하며 나는 퇴근 준비를 시작했다. 시계는 이미 밤 10시를 넘긴 시각. 붕붕거리며 돌고 있는 전기난로를 끄기 위해 소파로 향한 순간, 나는 한 사람이 소파 위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카에데였다.

그녀의 가느다란 몸은 성인 여성이 소파 위에 웅크려 누워도 소파가 그다지 좁아 보이지 않는 신기한 착시를 종종 일으킨다. 볼 때마다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나는 소파에서 잠들어있는 그녀를 흔들어 깨우기 위해 그녀의 어깨에 손을 뻗었다. 톡, 하고 손끝이 닿았다고 생각한 순간, 마치 고양이가 장난감을 덮치듯 그녀의 두 손이 뻗어나와 내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화들짝 놀라 그녀를 향해 엎어질 뻔한 것을, 두 손으로 소파를 짚어 필사적으로 버텨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는 직감했다. 또다시 그녀의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잔업은 끝나셨나요?”

 

깨어있었던 것이냐고 물어보면, 그녀는 후훗, 하고 예의 그 웃음을 지으며 내 목을 감싸안은 두 팔에 힘을 준다. 단단히 버티고 있으면, 내가 끌려가는 대신 소파에 누워 있던 그녀의 상반신이 스르륵 올라왔다. 아차, 작용 반작용이라는 녀석인가.

서로 다른 색으로 반짝이는 눈동자가 내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프로듀서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당신은 저의 소중한……프로듀서니까요.”

 

무얼, 보나마나 술이나 먹자는 소리겠지.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것인지, 그녀는 “므읏”하고 두 뺨을 약간 불룩하게 부풀리며 두 팔에 조금 더 힘을 넣었다. 그러고 보면, 뺨을 부풀릴 때 나는 효과음이 바뀌었구나. 이것도 성장의 결과일까.

체중이 많이 나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충분히 버틸 만 했지만, 문제는 내가 버티든, 그녀가 올라오든, 우리 두 사람의 거리가 계속해서 가까워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기다렸냐고는 묻지 않으시나요?”

 

젖은 눈망울로 불만스럽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크게 뛰었다.

속지 마라, 저건 하품 때문에 자연스레 나온 눈물일 것이다. 머리는 그렇게 말을 하고 있지만, 몸은 그렇지 않았다. 애당초 그녀 정도나 되는 사람이 저런 표정을 지으면, 이 세상의 어떤 남자가 설레지 않을까.

마음을 다잡으며 뭐 하러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냐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촉촉한 물기를 머금은, 보기 좋게 뻗은 그녀의 손발만큼이나 아름다운 속눈썹을 내리깔며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속삭이는 것이다.

 

“그냥, 기다리고 싶었어요……안 되나요?”

 

보통은 안 된다고 대꾸하고, 얼른 그녀를 돌려보내기 위해 자세를 일으키려고 하면, 그녀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 눈망울에 습기를 더해간다.

속아 줄 생각은 없다. 아이돌 활동으로 다져진 연기력이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녀의 손을 풀고 몸을 바로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그녀도 내 뒤를 따라 소파에서 일어났다. 퇴근준비를 마저 마치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 내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는 그녀의 손길에 나는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저, 오늘 굉장히 열심히 했어요. 칭찬도 많이 들었고요. 그러니까……포상을 주었으면 하는걸요.”

 

대체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

모르는 척, 눈을 꿈벅거리고 있으면, 그녀는 내 와이셔츠의 옷깃을 가볍게 움켜쥐며 사뿐히 까치발을 세운다. 일어서서 바라본, 사무실의 형광등을 반사시키는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정말로 모르시겠나요? 정말로?”

 

연기가 아닌가? 설마 진짜 지뢰를 밟은 건가? 라고 생각한 나머지, 반응이 한 박자 늦고 말았다.

귓가로 들려오는 후훗, 하는 웃음소리. 아뿔싸, 라고 생각한 순간, 그녀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것은 사냥감을 막다른 길로 몰아넣은 맹수의 표정이었다. 옷깃을 움켜쥔 손에 힘을 넣으며 약간 발돋움을 한 그녀는 내 몸을 잡아 당겼다. 휘청거리면서 끌려가기가 무섭게, 옷깃을 쥐고 있던 손은 내 목덜미로 뻗어가 단단하게 나를 구속했다. 그리고 무방비로 노출된 내 귓가에, 그녀의 촉촉한 입술이 가까이 다가온다.

 

“한 잔, 같이 하고 싶다는 말이라구요. 프로듀서와 단 둘.이.서.”

 

지근거리에서 외이(外耳)를 간질이는 감미로운 목소리가 의식을 뒤흔들고 이성을 깎아낸다. 그야말로 단풍색 독. 단풍색 속삭임이다.

할짝, 하고 귓불을 핥는 것은 실수인가, 아니면 고의인가.

척추를 타고 짜릿한 무언가가 흘러내려가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그만 온 몸을 뻣뻣하게 굳히고야 말았다. 이래서야 패배를 인정한 꼴이 아닌가.

꼴사납지만, 이 꼴이 되어서야 나는 다시금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에는 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러니 나는.

 

“아자, 고마워요. 자, 그럼 얼른 출발하죠!”

 

오늘도 승리를 확신하는 그녀의 환한 미소를 앞에 두고, 조용히 백기를 들어올린다.

 

 

***** 

 

 

”겨울이니까, 결이 센 오징어 구이가 당기는군요.”

“내려가 있어. 준비해서 내려갈 테니까. 변장 잊지 말고.”

“준비라고 하니까, 준 브라이드 이벤트가 생각나네요. 후훗, 다음번에는 누가 가려나…….”

“뭐라는 거야? 빨리 내려 가.”

“……훌쩍.”

 


 

 

요망한 25세를 그리고 싶었는데....이거 잘 그려졌을까 모르겠네요.

최고다! 25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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