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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하게 느긋하게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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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4-09, 2017 22:21에 작성됨.

 

---22

IA의 끝과 함께 새해가 밝자, 한 대기업에서 아이돌 업계를 들썩이는 이벤트를 개최하였다. 일종의 온라인 오디션으로 진행되는 ‘아이돌 대격전! 노려라 발렌타인 데이’였다.

대기업이 초청한 유명 프로마다 아이돌 1명씩을 내보내, 발렌타인 데이에 걸맞은 노래를 발표하여 온라인 투표로 1위를 선정하는 방식이었다. 1위에 오른 아이돌은 대기업이 주최하는 발렌타인 데이에 개최될 단독 미니 콘서트 기회뿐만 아니라 광고 등 발렌타인 데이 콜라보레이션이라는 파격적인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오디션에서 우승한다면 막대한 혜택은 물론, 톱 아이돌이란 명성도 얻을 수 있었다.

당연히 아이돌 업계의 큰손으로 떠오르는 765 프로도 초청을 받았다. 그리고 대형 프로덕션인 346 프로도 이번 오디션에 가세했다. 여러 연예 사업에 굴지의 명성을 쌓은 346 프로가 이번 오디션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아이돌 업계로 진출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346 프로의 아이돌 업계 진출의 선봉장은 지난번에 프로듀서를 꾸짖은 죠가사키 미카, 최근 데뷔했지만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다카가키 카에데였다. 이번 온라인 오디션에도 둘 중 한 명이 나올 거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오디션에 출전할 아이돌을 선정하는 회의에서 프로듀서는 346 프로의 대표로 카에데를 예측했다.

 

“제 생각엔 다카가키 카에데 양이 나올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물론 먼저 데뷔한 죠가사키 미카 양의 인지도가 훨씬 높죠. 하지만 죠가사키 양이 내세우는 갸루 컨셉보단 우아함을 내세우는 다카가키 양이 ‘발렌타인 데이’라는 주제에 더욱 걸맞죠. 그리고 이 오디션이 아직 부족한 다카가키 양의 인지도를 단숨에 끌어올리기 적합한 기회이기도 하고요. 이런 이벤트에선 아직 데뷔 안 한 아이돌보단, 막 날아오르는 아이돌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 나으니깐요.”

 

“과연 프로듀서 씨다운 예측이네요. 그럼 우리는 누굴 내보내야 할지가 문제네요.”

 

프로듀서와 리츠코는 테이블에 펼쳐놓은 아이돌들의 프로필을 보고 고민에 잠겼다. 단순한 매력뿐만 아니라 가창력으로도 앞서야 했다. 리츠코는 고심하다 아이돌 한 명을 가리키려 했다.

 

“제가 봤을 땐 아무래도...”

 

“프로듀서, 리츠코.”

 

두 사람을 부른 것은 다름 아닌 어느샌가 다가온 치하야였다.

 

“치하야? 무슨 일이야?”

 

“그 오디션, 내게 나갈 기회를 줘.”

 

“아직 네 노래 실력도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잖아? 그리고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규모가 큰 만큼 우리 프로에도 중요한 기회야.”

 

“나도 알아. 그래도 리츠코, 부탁할게.”

 

“치하야, 냉정히 생각해야 해.”

 

“난 지금 냉정히 생각하고 말하는 거야. 어리광부리는 게 아니야. 물론 이런 상황에서 다시 노래하겠다는 게 위험할지도 몰라. 하지만 날 용서하고 받아준 모두의 노력을 헛되지 않게 다시 노래하고 싶어. 아니, 반드시 노래할 거야. 다시 부탁할게, 리츠코.”

 

치하야는 무표정이었지만 눈빛만은 또렷했다. 프로듀서도, 리츠코도 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분명 아직 노래 실력이 돌아오지 않은 치하야가 도전하기엔 위험 부담이 큰 오디션이었다. 하지만 프로듀서는 치하야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했다.

 

“리츠코 씨, 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프로듀서 씨까지?”

 

“치하야 양은 아직 힘들지 몰라요. 하지만 분명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이 왔습니다.”

 

물론 리츠코도 치하야의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걱정이 앞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프로듀서 씨, 이번 기회는 정말 중요한 기회에요. 자세한 이유라도 말씀해주세요.”

 

“치하야 양에게 실례될지 몰라도, 조금 냉정히 생각해보죠. 이런 온라인 오디션은 대중의 관심을 얼마나 끌 수 있느냐가 중요해요. 발렌타인 데이라는 컨셉이 다소 어려워 보여도, 정반대 이미지인 치하야 양이라면 도리어 많은 관심이 쏠릴 거예요. 전 치하야 양도 밝은 분위기의 노래는 유닛 활동을 통해 충분히 부를 수 있단 가능성을 봤고요. 그래서 이번 온라인 오디션이 치하야 양이 무대에 다시 서기 좋은 기회라고 생각됩니다.”

 

“뭐 그건 저도 동의해요. 다만...”

 

프로듀서는 가끔 이런 자신이 싫긴 했지만,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은 하나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치하야 양이라면 잘해낼 거란 느낌이 왔습니다.”

 

“참, 이런 걸 보면 프로듀서 씨도 사장님을 닮아가시는 것 같다니까요.”

 

하지만 리츠코는 지금까지 틀린 적 없는 프로듀서의 느낌과 어느 때보다 굳센 치하야의 눈빛을 믿기로 했다.

 

“좋아요. 이번 오디션은 치하야가 나가는 걸로 정하죠.”

 

“고마워, 리츠코.”

 

“널 다시 믿어보는 거야.”

 

처음 얘기를 들은 타카기 사장 역시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직접 찾아와 부탁하는 치하야의 눈빛을 보고 ‘그래! 그때 이 눈빛을 보고 느낌이 팟 하고 왔었지.’라는 말과 함께 흔쾌히 승낙했다.

프로듀서는 그 자리에서 바로 작사, 작곡을 섭외하기 위해 발품을 팔았다. 하지만 섭외는 쉽지 않았다. 다들 치하야의 노래 실력은 인정했지만, 일전의 일과 치하야가 발렌타인 데이 컨셉이랑 맞지 않는다는 이유를 대며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작곡가 친구에게 간절히 부탁하여 섭외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친구 역시 의구심을 표했다.

 

- 네 부탁이니까 어쩔 수 없이 승낙하긴 했다만, 키사라기 양이 그런 노래를 소화할 수 있다곤 생각하진...

 

“치하야 양은 다시 노래할 수 있으니까 넌 입 다물고 곡이나 만들어.”

 

곡이 나오기 전까지 우선은 치하야의 노래 실력이 다시 돌아오는 데 집중하리고 했다. 레슨 트레이너는 물론 프로듀서, 하루카, 야요이에 아즈사, 타카네까지 시간을 내어 치하야를 도왔지만, 치하야의 노래 실력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느긋한 성격의 아즈사와 차분한 타카네도 그런 치하야를 보고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괜한 무리를 한 건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노력하는 치하야의 눈빛을 보고 마음을 다잡았다. 프로듀서인 만큼 지금은 치하야를 믿는 것이 우선이었다.

치하야의 온라인 오디션 참가 소식에 많은 이들의 귀추가 쏠렸다. 무너진 ‘푸른 가희’가 온라인 오디션으로 재기할 수 있을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만약 우승한다면 다시금 아이돌로 일어설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영영 복귀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무엇보다 유력한 경쟁자가 346 프로의 막대한 지원을 받는 타카가키 카에데라는 점도 있었다.

많은 관심이 쏠리는 만큼 프로듀서도 욕심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무너진 아이돌을 성공적으로 다시 무대에 오르게 한다면 프로듀서로서 막대한 명예를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작사 작곡 섭외를 하면서도 그런 얘기를 들은 터였다.

한 대학 동기와 연락할 때도 직접 질문을 받기도 했다.

 

- 무너진 아이돌을 재기시켜서 명예 좀 얻겠다고 무리하는 거 아냐? 듣자 하니 실적 좀 쌓아서 이직할 거라고 선배가 그러던데.

 

“아니,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치하야 양이 진정 행복하게 노래하는 게 우선이야.”

 

- 크, 너라면 그럴 줄 알았다.

 

대답 따라 프로듀서는 지금 이 순간만은 진심이었다. 치하야를 포함한 아이돌들과 지내면서 프로듀서는 성과를 내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을 접은 지 오래였다. 그저 아이돌들과 함께 하는 지금 이 순간이 행복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치하야가 다시 행복하게 노래하게 도와주고 싶었다.

언젠가 타카기 사장이 했던 말이 있었다.

 

‘모든 아이돌은 데뷔할 때 1명의 팬을 갖고 시작한다네. 그 1명이 바로 프로듀서지.’

 

그 말의 뜻을 이제 알 것 같았다. 프로듀서는 아이돌 프로듀서로서, 아픔에 공감하는 보컬의 입장으로서, 그리고 동료이자 진정한 팬으로서 치하야를 응원하고 있었다.

치하야가 연습에 몰두해있는 어느 날 밤, 치하야를 도와줄 선물이 드디어 완성되었다.

 

“자, 드디어 완성.”

 

프로듀서는 하루카, 야요이의 도움으로 치하야에게 줄 선물을 완성했다. 프로듀서의 손엔 반창고가 군데군데 붙어 있었고, 나머지 둘의 손에도 반창고 여럿이 붙어 있었다.

 

“아이돌들에게 이런 궂은일을 시켜서 미안해요.”

 

“다 치하야 씨를 위한 일이잖아요! 조금이라도 더 도와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야요이는 선물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게 정말 치하야 씨에게 도움이 될까요?”

 

“치하야 양에겐 아직 동생의 죽음에 대한 슬픔, 부모님의 이혼에 대한 죄책감이 남아 있어요. 하지만 그건 모두 치하야 양의 탓이 아니에요.”

 

“다 치하야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죠...”

 

하루카가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냉정히 돌이켜 보면 어린 치하야가 유우의 사고를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미 틀어진 부모님 사이를 메우기엔 치하야는 어리고 연약했다. 두 사건이 만든 슬픔과 죄책감은 필요 이상으로 치하야를 묶고 있었다. 프로듀서는 그것이 치하야가 노래하는 행복을 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아픈 기억을 안고 살아요. 거기에 슬퍼하고, 아파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에요. 하지만 계속 살아가기 위해선 그걸 극복해야만 해요.”

 

프로듀서는 한때 거센 소용돌이에 휩쓸렸던 자신을 떠올렸다. 그걸 극복했기에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치하야도 분명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음 뭔가 되게 어렵지만, 프로듀서 되게 멋있어 보여요.”

 

야요이의 칭찬에 프로듀서는 부끄러워했다.

 

“쉽게 말하려 해도 잘 안 되네요.”

 

하루카는 야요이에게서 선물을 건네받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럼 이 선물이 치하야의 슬픔과 죄책감을 덜어줄 수 있을까요?”

 

“마음속 상처는 결국 스스로가 치유해야 하는 법이에요. 이 선물은 치하야 양이 자기 자신과 대화할 수 있도록 도와줄 거예요.”

 

저녁 레슨이 끝나고 집으로 바래다주는 길이었다. 연습을 도와준 타카네에게서 아직도 노래 실력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치하야에게는 따로 얘기하지 않았다. 이 순간 누구보다 가장 힘들고 초조한 것은 치하야였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스쳐 가는 창밖의 밤거리를 바라보던 치하야의 시선에 문득 프로듀서가 닿았다. 몇 달 전만 해도 티격태격했던 사이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 사람은 대체 왜 자신을 이렇게 믿어주는 것일까?

치하야는 그 이유로 프로듀서가 얘기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생각해봐도 까마득하고 막막한 슬픔에서 헤어나온 이 사람이 존경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단지 그 과거를 이유로 자신을 믿어주는 프로듀서가 고맙기도 했다. 문득 치하야의 눈에 반창고로 도배된 프로듀서의 손이 들어왔다.

 

“저기 치하야 양, 미안한데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치하야가 사는 아파트에 다다르자 프로듀서는 잠깐 대화를 요청했다.

 

“오디션 곡 나온 건 들어봤어요?”

 

“예. 정말 발렌타인 데이에 맞는 노래에요. 아직 목소리가 돌아오지 않았지만...”

 

시무룩해진 치하야에게 프로듀서가 뒷좌석에 두었던 쇼핑백을 건넸다.

 

“자, 치하야 양 힘내라는 선물이에요.”

 

쇼핑백을 받은 치하야는 안에 든 것을 꺼냈다. 척 보기에도 푹신해 보이는 인형이었다.

 

“이건?”

 

“보다시피 인형이에요.”

 

“귀여워...”

 

다소 서투르게 박음질 된 인형을 보고 치하야는 프로듀서의 손에 도배된 반창고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프로듀서의 손이?”

 

“오랜만에 바느질을 하려다 보니 영 서툴러서 말이죠. 재봉틀 사기도 빠듯했거든요. 이런 제가 영 못 미더웠는지 아마미 양과 타카츠키 양도 많이 도와줬어요. 다른 아이돌들도 응원해줬고요.”

 

“다들...”

 

치하야는 인형을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오디션에 나가겠다고 고집을 피운 자신을 응원해주는 동료들의 마음에 고마움과 미안함을 같이 느꼈다.

 

“하지만 이 인형을 왜 제게?”

 

“치하야 양을 본뜬 분신 같은 인형이에요. 이름은 아마미 양이 치하야 양의 이름을 따서 ‘치햐’라고 붙였어요.”

 

“치햐...”

 

그러고 보니 긴 머리와 차분해 보이는 눈동자 등이 자신과 비슷해 보였다.

 

“정말 고맙습니다. 내일 하루카하고 타카츠키 양한테도, 모두에게도 꼭 고맙다고 할게요.”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요?”

 

“많이 닮진 않았어도 치하야 양의 분신이니까 최근의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치햐와 대화해보는 것. 이거 하나예요.”

 

프로듀서는 대학 교양 심리학 시간에 인형과의 대화로 우울증 등을 치료하는 치료법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집에서 홀로 지내다시피 한 이오리가 우사짱을 친한 친구로 여기는 것을 보면서 인형은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자기에게 가족 문제를 자꾸 짊어지려는 치하야에게 필요한 방법이라 생각하여 치햐를 만든 것이었다..

 

“그런 걸 어떻게 해요?”

 

“정말로 솔직하게 터놓고 싶은 말을 다 해봐요.”

 

치하야는 계속 프로듀서와 치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치하야는 부끄럽다는 눈빛을 보였고, 프로듀서는 뒤늦게야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날씨도 추우니까 집에 들어가서 치햐랑 얘기 나눠봐요.”

 

아파트로 들어가는 치하야의 품엔 치햐가 꼭 안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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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햐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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