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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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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4-07, 2017 21:23에 작성됨.

카미야 나오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먹구름들을 보니 문득 예전의 일이 떠올랐다.

 

어느 대형 쇼핑몰 오픈 기념 야외 행사에 나간 날이었다. 하필 내 차례에 지금처럼 하늘이 새카매지다니, 역시 나라는 애는 인기도 없고 운도 없는 모양이다. 행사 진행 전에 비올 기미가 보였지만 쇼핑몰 측은 그대로 강행했다. 프로듀서가 말하길 예보에 따르면 비는 얼마 오지 않을 거라고, 따라서 무대에는 별 지장이 없을 거라고 했다. 웃는 얼굴로 말이다. 나오는 그를 믿었다. 하지만 비는 가차 없이 쏟아졌다. 빗물 탓에 무대 장치들이 맛 간 상황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목소리를 계속 뽑아냈다. 이윽고 무대가 끝나고 관객이 빠져나간 객석을 향해 연신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찰박찰박 무대에서 내려와서는 프로듀서에게 다가갔다. 흥건한 얼굴엔 원망은 묻어 있지 않았다.

 

“프로듀서, 나 어땠어?”

 

“잘했어. 나오. 나오가 이렇게 데뷔 첫 무대를 잘 해낼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말이야.”

 

프로듀서는 활짝 웃었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얘기 삼매경이었다간 나오가 감기에 걸릴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오 쪽으로 우산을 조금 더 기울이면서 무대 뒤편에 있는 대기용 천막으로 향했다. 역시 프로듀서와 함께 있는 우산 아래는 마음이 안정 되었다. 비를 안 맞는다는 사실 보다도 둥근 우산이 만들어 주는 특유의 분위기가 좋았다.

 

“자.”

 

프로듀서가 대뜸 손수건을 내밀었다.

 

“이걸로 닦고 있어. 난 밖에서 통화 좀 하고 올게.”

 

“응.”

 

그래… 그때 이후로 그 녀석이 너무 바빠져서 미처 못 돌려줬지. 마주쳐도 스케줄 얘기만 겨우 하고 바로 또 뛰쳐나가곤 했으니까. 오늘은 꼭 돌려줘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카와시마 미즈키가 들어왔다.

 

“어? 그 우산은 뭐야?”

 

“아뇨, 아무 것도 아니에요.”

 

“아, 네 프로듀서, 우산 안 가져간 거구나? 후훗.”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긴, 얼굴에 딱 써 있네, 뭘.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슬슬 많이 내리는 것 같으니까.”

 

빗방울 부딪히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나오는 우산 두 개를 들썩거렸다.

 

미즈키 씨도 참.

 

“그럼 갔다 올 게요!”

 

“그래, 갔다 와.”

 

문이 닫히는 순간엔 나오는 벌써 멀어져 있었다.

 

*

 

외부 출입문을 연 나오는 우산을 펴고 수많은 빗발 속으로 뛰어 들었다.

 

지금 가고 있으니까 젖지 마, 바보야.’

 

지면을 찰 때마다 축축한 공기가 얼굴을 스친다. 우산들 사이로 역이 보인다. 사람들 틈으로 요리조리 움직이며 도착했다. 숨을 고르고 둘러보는데, 그가 안 보인다. 아. 연락을 안 하고 왔구나. 마음만 급해가지고. 지금이라도 해 보자.

 

[응, 왜?]

 

“지금 어디야?”

 

[거의 다 왔어. 바로 다음 역이야.]

 

“알았어. 도착하면 바로 다시 전화 해.”

 

[그래.]

 

통화를 마친 뒤, 한 쪽에 벽을 등지고 서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보기엔 딱 오들오들 거리고 있는 강아지였다. 산발이 됐다는 걸 이제야 깨닫고 정리하려는데 벨이 울렸다.

 

[다 왔어. 실은, 지금 너 보고 있어.]

 

“어디?”

 

[여고생들 뒤에.]

 

‘?’

 

“그렇게만 말하면 어떡해? 지금 눈앞에 보이는 여고생만 수십 명인데.”

 

[팔 흔들 게. 이제 보여?]

 

“아-.”

 

그다. 저기 온다. 그런데,

 

‘나 때문에…’

 

아침에만 해도 멋져 보였던 정장은 흐트러져 있고 단발머리는 붕 떠 있다. 그다지 길지 않은 계단인데도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저질 체력이 문제였다. 하지만 정작 가장 큰 원인은 소녀 자신에게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항상 혼자 다 끌어안는다.

 

“미안, 나오. 그런데, 나 걱정해서 나온 거야?”

 

그가 고개를 들었다. 몰골은 처참했다.

 

“거, 걱정은 무슨! 그것보다, 꼴이 이게 뭐야. 잠깐 가만있어 봐.”

 

나오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걸 쥔 왼손이 땀에 쩐 내 얼굴과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어, 잠깐…?”

 

“가만있어.”

 

프로듀서는 발간 얼굴을 멋쩍게 쳐다봤다. 정장의 매무시도 곧 바로잡혔다.

 

“고마워, 나오.”

 

“오, 오해하지 마! 그냥 지저분해 보였던 것뿐이니까. 프로듀서면 좀 말끔히 하고 다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나오가 얼굴을 더 붉히며 여분의 우산을 건넸다. 그리고,

 

“자, 이거. 네 거잖아.”

 

나오가 고개를 돌린 채 손수건을 내밀었다.

 

“나오….”

 

“뭘 그렇게 보고만 있어? 뭣하면 빨아서 줄까?”

 

“어? 아냐, 고마워. 그보다, 그냥 내 책상 위에 두면 될 걸 지금껏 갖고 있었던 거야?”

 

“그, 그냥! 이렇게 주는 편이 여러 모로 나을 것 같아서….”

 

ㅡ꼬르륵

 

난데없이 둘 사이에 배꼽시계가 울렸다. 나는 아니고, 나오인가?

 

“혹시 너한테서 난 거야? 뭐 먹고 싶어? 사줄게.”

 

민망해하는 나오에게 프로듀서가 연달아 물었다.

 

“뭐, 딱히 배고픈 건 아니야. 그래도 프로듀서 씨가 사준다니까…. 햄버거, 일까나.”

 

“하하. 나오는 역시 햄버거를 좋아하는구나.”

 

‘좋, 좋아한다고?’

 

“프로ㄷ….”

 

“음? 무슨 말했어?”

 

“아, 아니. 아무 것도 아냐.”

 

‘아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카미야 나오. 정신 차려.’

 

나오는 괜스레 걸음을 재촉했다.

 

*

 

패스트푸드점에 다다를 무렵.

 

흘깃흘깃.

 

한동안 서로 시선을 굴리던 둘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미안해.”

 

‘어…?’

 

“나오가 미안해할 필요 없어. 다 내가 부족한 탓이니까.”

 

“아니야. 나야말로, 내가 형편없어서 프로듀서가 그렇게 매일 힘든 거잖아.”

 

나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지 않아. 나오도 이렇게! 귀여운 데?”

 

프로듀서가 돌연 나오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숨결이 느껴졌다.

 

“귀, 귀엽긴! 그것보다 그렇게 가까이 하지 마! 이 바보!”

 

나오는 적잖이 당황했다.

 

‘넌 이미-’

 

내겐 톱 아이돌이야, 나오가.”

 

프로듀서가 나오의 어깨에 두 손을 올렸다.

 

“그런 듣기만 좋은 말을 누가….”

 

그때였다. 패스트푸드점 출입문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미, 미쿠는 아무 것도 못 봤다냥!”

 

둘이 돌아보니 마에카와 미쿠가 먼 산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 아니야, 미쿠, 오해하지 마! 이건 그냥 이 녀석이 멋대로 한 짓이야!”

 

“정말?”

 

미쿠의 눈엔 의심이 반쯤 남아 있었다.

 

“응, 정말이야.”

 

“그럼… 앞으로 파이팅이다냥~!”

 

미쿠가 능글맞은 표정과 함께 어느새 저만치 뛰어갔다.

 

“그게 아니라니까~! 대체 뭐가 화이팅이라는 거야~!”

 

“미쿠야 원래 저렇지 뭘, 어서 들어가자.”

 

프로듀서가 턱짓으로 나오를 재촉했다. 점내에는 이제 막 하교한 학생들이 바글바글했다.

 

“뭐 먹을래?”

 

“치즈버거하고 감자튀김.”

 

“너 그러다 살찐다? 튀김은 빼는 게 어때?”

 

“퍽이나 걱정해 주시네. 주문이나 해.”

 

주문을 마친 프로듀서가 나오와 마주 앉았다. 나오가 말을 꺼내려는데 프로듀서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사무소 번호였다.

 

“네, 네. 정말입니까? 지금 당장 가죠.”

 

“무슨 일이야?”

 

“네가 깜짝 놀랄 일.”

 

프로듀서가 생글생글 웃고는 버거 세트 두 개를 테이크 아웃해서 왼쪽 팔뚝 사이에 넣었다. 모처럼의 단 둘만의 한 때가 날아간 건 아쉬웠지만 프로듀서의 입은 귀에 걸려 있었다. 프로듀서와 나오는 우산을 펴고 나섰다. 그 날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빗발은 아까보다 약해져 있었고 가방 따위로 머리만 대충 가린 이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뭔지 얘기 안 해줄 거야?”

 

“미리 얘기해 주면 나오의 당황하는 얼굴을 볼 수가 없잖아.”

 

능글맞은 웃음이 미쿠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아-? 정말, 얼굴 괜히 닦아줬네.”

 

“하하, 좀 봐 주라. 사무소에 가면 너 진짜 기뻐서 놀라 기절할 걸?”

 

“아니기만 해 봐.”

 

말 자체는 심각했지만 표정은 정반대였다. 하긴, 그게 나오의 매력 포인트이기도 하다.

 

그렇게 티격태격 걷다보니 우산에 부딪히던 빗방울 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먹구름이 물러가고 푸른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오는 말은 그렇게 했어도 우산을 쓸 이유가 없어져 버린 것이 못내 아쉬웠다. 다음에도 우산은 두 개 들고 나와야겠다. 좋다고 하나만 갖고 나오면 눈치 챌 테니까. 그리고 그 꼬르륵 소리, 녹음해 오길 잘했다. 사무소 계단을 오르는 둘은 미소가 가득했다.

 

사무소 문을 열어젖히니 사무원인 치히로가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 응접용 소파에는 처음 보는 사람이 있었다.

 

“아, 마침 오셨네요.”

 

석양이 두 사람에게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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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어색하고 부족한 첫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여지를 남겨두긴 했는데 후속편이 나올런지는 모르겠습니다.

Lozental 님의 비 오는 날을 보고 떠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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