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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리티P 시리즈] (Re)Write─덮어 쓰는, 혹은 다시 쓰는. (6)

댓글: 14 / 조회: 1237 / 추천: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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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4-07, 2017 04:05에 작성됨.

<(Re)Write─덮어 쓰는, 혹은 다시 쓰는. (5)>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후우, 후우…….”

 

술기운 탓인가, 온 몸이 마치 물 먹은 솜처럼 무척이나 무거웠다. 평소 달린 거리의 절반도 채 가지 못하고, 나는 땀을 폭포수처럼 흘리며 꼴사납게 무릎을 짚고 헥헥거렸다.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눈을 감으면, 마치 눈꺼풀 뒤에 각인되기라도 한 것처럼 선생님이 남긴 편지의 내용이 떠올랐다.

 

요즘 연락이 안 되는구나. 하지만 걱정하지는 않는다. 네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네가 뒤를 돌아보고 있는 게 아니라는 반증이기도 할 테니까. 새 둥지를 찾아 떠난 철새는 옛 둥지를 돌아보지 않는 법이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둥지에서 더 이상 과거에 매이지 않는 멋진 삶을 살아다오.

오늘은 햇빛이 무척 따뜻하구나. 저 멀리서 들려오던 종소리가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다. 내일도 이 편지를 계속해서 쓸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네가 없는 사이 내가 먼저 떠나가더라도 자책하지 말거라. 괴로워하지 말거라. 한낱 짐승들도 죽을 때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법이니, 오히려 네 앞에서 죽는 것이 이 늙은이는 무척 두려울 뿐이다. 남겨진 사람은 나아가는 사람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되는 것이야. 명심하거라. 뒤를 돌아보아도 되는 것은, 누군가가 네 발자취를 따라오고 있을 때 뿐이란다.

 

“……돌아가자.”

 

어느 정도 호흡이 진정되었다고 판단한 나는 발걸음을 뒤로 돌렸다. 숙취도 좀 풀린 것 같으니, 가는 길은 조금 더 수월할 것이다.

 

 

 

 


<(Re)Write─덮어 쓰는, 혹은 다시 쓰는. (6)> 

 

 

 

 

 

“프로듀서?”

 

저는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을 불러 보았습니다. 아니, 이제는 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군요. 절세미녀라는 소리를 듣는 인기절정의 아이돌을 앞에 앉혀두고, 일언반구의 이야기도 없이 연신 술병을 들어 병나발을 불고, 울먹임과 탄식이 섞인 한숨을 내쉬고, 다시 병나발을 불기를 반복하던 그는 열 병째의 술병을 비운 순간 기다렸다는 듯 식탁 위로 쓰러졌습니다.

 

“……프로듀서?”

 

확인 차 다시 한번 불러 보았습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휴대전화의 화면을 확인해보니 한 시간 정도가 지나 있었습니다. 한 시간 내내, 안주라고 할 만한 것도 없이 맨입에 술만 연신 들이켰으니 아무리 술에 강한 사람이라 해도 뻗을 수 밖에 없겠죠.

 

“정말……이래서는 술을 먹자고 한 의미가 없지 않나요?”

 

일부러 들으라는 듯 입을 삐죽이며 불만을 토해 보았습니다. 입으로는 그렇게 말을 했지만, 제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런 모습. 그러니까 ‘P’라는 사람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은 저도 처음 보는 것이었습니다. P라는 사람은 쓰러질 때까지 버텨서 차라리 쓰러질지언정, 적어도 제 앞에서는, 우리들의 앞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집을 구경하던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식탁 위에 이리저리 산개한 술병을 정리하고,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축 늘어져 있는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프로듀서, 제 목소리 들리나요?”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그는 대답은커녕 미동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어깨가 천천히 들썩이는 것을 확인하고, 그의 얼굴에 귀를 가까이 가져가니, 그제서야 미약한 호흡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는 그의 귓가에 입을 가져갔습니다.

 

“이제 방으로 올라갈 거에요. 아시겠죠?”

“…….”

 

물론 대답은 없었습니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저는 그의 머리를 들어올렸습니다. 덩치 차이가 있으니 무척 무거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그의 머리는 마치 제 손의 움직임에 따라가는 것처럼 가볍게 움직였습니다.

이 사람 실은 깨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자, 일어나세요. 하나, 둘……!”

 

그의 상체를 일으켜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어 두고 저는 그의 왼쪽 겨드랑이로 들어가 그의 체중을 지탱하며 일어섰습니다. 제 키는 171cm. 여성 중에서는 나름대로 큰 편에 든다고 생각합니다만, 안타깝게도 프로듀서는 지금처럼 신발을 신은 상태라면 거의 2미터에 근접하는 거한이었습니다. 20cm가 넘는 신장 차이가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저는 부축보다는 짊어지는 것에 가까운 모습으로 그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읏차……이거, 생각보다는……할만하네……!”

 

늘 이런 식으로 신세를 진 적은 많았지만, 입장이 뒤바뀔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축 늘어진 프로듀서를 짊어지고, 저는 천천히 그의 방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저보다 큰 남성을 부축하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의 몸을 부축한다는 것은 뜻밖에도 20대 여성의 연약한 몸으로도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니었습니다.

매일 트레이닝과 레슨을 받으면서 단련되었기 때문일까요. 오늘만큼은 마스터 트레이너 씨와 베테랑 트레이너 씨에게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네요.

어느덧 저는 현관과 연결된,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도착했습니다. 생각보다는 수월하다지만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니었기에, 어느덧 저의 온 몸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히 더워서, 라고 하기에는 LA의 새벽 기온은 오히려 싸늘한 편에 가까웠습니다. 이렇게 땀이 나는 이유는, 처음으로 해 보는 행동이라는 생소함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더 큰 이유가 있었습니다.

 

‘으응, 남자들은 이런 냄새가 나는구나…….”

 

제 몸을 위에서 덮고 있는 그의 체취와 강렬한 주향(酒香), 그리고 용광로라도 들어 있는 것인지 옷 너머로도 느껴질 정도로 펄펄 끓고 있는 그의 체온 때문이었습니다. 분명히 술기운 때문이겠죠. 술을 마시면 체온이 올라가기도 하니까요.

한 칸 한 칸을 어떻게 올라간 것인지, 어찌저찌 계단을 올라간 저는 침실의 문을 열고 제가 쓰던 침대에 프로듀서를 뉘었습니다. 오늘까지 프로듀서가 사용하던 것은 침실의 한 켠에 붙여둔 간이 침대였지만, 오늘만큼은 잠자리를 바꾸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술에 절어서 소파에서 자고 일어난 다음날의 기억은 빈말로도 좋다고는 할 수 없었거든요. 저는 마치 줄이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침대에 반쯤 던져둔 프로듀서의 자세를 제대로 고치고, 그의 슬리퍼를 벗겨 침대 옆에 놓아둔 뒤, 곧바로 땀에 절어있던 외출복을 벗고 실내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아직 씻지는 않았지만, 뭐……하루 쯤이야, 안 씻어도 되겠죠.

이 시간에 혼자서 집 안을 돌아다니는 것이 무서워서 이러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이에요.

침대에 비하면 간이 침대는 빈말로도 편안하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하루동안 무척 많은 것을 봤기 때문인지, 뜻밖에도 베개에 머리를 갖다 대는 순간 잔잔한 파도처럼 수면욕구가 밀려들어왔습니다.

수마(睡魔)의 손을 잡기 직전에, 저는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습니다.

 

“……잘 자요, 프로듀서.”

 

늘 들려오던 대답. ‘타카가키 씨도 좋은 꿈 꾸세요’라는 대답은, 오늘만큼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서서히 수면의 늪으로 빠져드는 제 귓가에, 누군가의 잔뜩 억누른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누가 내는 소리일까요. 막연히 기분 탓일 것이라 생각하며 저는 의식의 끈을 놓았습니다.

 

 


 

  

동경 표준시, 12월 29일.

 

 

“응…….”

 

휴대폰의 알람이 아닌,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낯설었지만 익숙한 풍경, 익숙한 침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손을 뻗어 머리맡에 놓여 있는 휴대전화의 화면을 확인했습니다. 알람보다 20분 정도 이른 시각이었습니다. 다시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려는 그 순간, 저는 어떤 위화감을 느꼈습니다. 살짝 몸을 일으켜 옆을 돌아보면, 전날 하루 종일 술잔을 기울였던. 아니, 병나발을 불었던 그의 모습이…….

 

“……프로듀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침대에서 일어나 흐트러진 잠옷을 바로잡고 다시 주위를 돌아보았습니다.

조금 전에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는 제가 자고 있던 자리였습니다. 어젯밤에는 분명히 간이 침대에서 잠을 잤을 텐데, 깨어보니 저는 다시 침대에 누워 있었던 것입니다. 혹시 어제 프로듀서를 업고 올라온 것이 꿈은 아닐까. 저는 베개에 코를 갖다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 보았습니다. 제가 자기 전에 사용하는 화장품 냄새 사이로 미세하게나마 알코올의 독특한 냄새가 느껴졌습니다.

프로듀서가 이 곳에 있었던 것은 확실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요?

침실을 나와서, 저는 조심스레 발소리를 죽여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현관 앞에 도착한 저는 잠시 현관문과 거실을 번갈아 바라보았습니다.

그 때, 제 머릿속에는 어젯밤의 광경이 떠올랐습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을 품고 저는 거실을 지나 부엌을 향해 발소리를 죽여 걸어갔습니다.

 

“프로듀서, 여기 계신가요……?”

 

저는 고개를 내밀어 부엌을 바라보았습니다. 식탁 위에는 텅 빈 술병들이 마치 장마철의 죽순처럼 잔뜩 서 있었지만, 거기에 프로듀서의 모습은 없었습니다.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부엌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현관의 오토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재빨리 현관으로 나가자, 트레이닝 복을 입은 프로듀서가 현관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좋은 아침이네요. 운동하고 오시는 길인가요?”

“네, 근처를 조금 달리고 왔습니다. 숙취도 깰 겸 해서요.”

“세상에, 땀 흐르는 것 좀 봐…….”

“억지로 움직이려니까 땀만 나고 영 안 움직여지더군요. 씻고나서 식사 준비할 테니까, 타카가키 씨도 준비해주세요.”

“네.”

 

저는 2층으로 올라가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말했습니다.

 

“프로듀서, 오늘은 어딜 갈 건가요?”

“오늘은……그렇네요.”

 

그는 계단을 올라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저를 돌아보았습니다.

 

“……엊그제 못 보여드린 곳이 많아요. 여기까지 왔는데 한 번은 봐야죠.”

 

 

***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저는 프로듀서와 함께 다운타운으로 향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3주 전부터 준비를 해서 3일만에 정리를 한다고 하던가요. 시내의 번화가에는 어느샌가 크리스마스 장식 대신, 새해를 맞이하는 장식들이 하나 둘씩 내걸리기 시작했습니다.

 

“벌써 새해가 코앞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시간 참 빠르네요.”

 

어쩐지 건성으로 들리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고개를 돌려 왼쪽을 바라보면 조금은 멍한 표정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는 프로듀서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숙취 때문일까요?

공방 근처의 공터에 자동차를 세워두고, 저는 프로듀서의 뒤를 따라 낯익은 골목길로 들어갔습니다. 한낮과 아침의 차이인 것인지, 같은 장소였음에도 골목에 흐르는 공기는 색다른 분위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늦은 오후나 되어 문을 열 것이라 생각했지만, 골목길의 공방은 아침부터 간판이 걸려 있었습니다. 이틀 전에 그랬던 것처럼 프로듀서가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자 그 안에서 할아버지가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그의 얼굴을 기억한 것인지, 프로듀서의 얼굴을 본 그는 씨익 웃으며 주머니에서 번쩍거리는 것을 꺼냈습니다. 다름아닌 그의 시계였습니다.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기에 저는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면박을 받고 있는 모양인지, 프로듀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할아버지에게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시계를 받은 프로듀서는 할아버지의 설명을 들으며 시계를 이리저리 조작했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시계에서 땡, 땡, 땡, 하는 낯익은 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가 무척이나 안심이 되었던 것인지, 프로듀서는 환하게 웃으며 그를 향해 깊게 허리를 숙였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말끔하게 고쳐진 자신의 장난감을 받으며 기뻐하는 어린아이의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역시, 이게 있어야 안심이 된다니까요.”

 

시계가 돌아온 것이 그렇게나 좋았던 것인지, 프로듀서는 자동차로 돌아온 다음에도 틈만 나면 자신의 왼팔에 차고 있는 시계를 바라보곤 했습니다. 무척 귀한 시계라고 했었죠. ‘귀하다’는 것의 조건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지만, 저는 문득 그것이 어떤 부분에서 귀한 것인지가 궁금해졌습니다.

 

“엄청 귀한 시계라고 하셨죠? 그거.”

“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떤 시계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

 

제 질문에 프로듀서는 굳은 낯빛으로 입을 다물었습니다. 괜한 이야기를 꺼낸 건가, 싶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이제부터 어디 놀러라도 가죠.”

“네? 아, 네…….”

 

그것은 완곡하지만 명백한 거절의 뜻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대화를 회피하는 것은 처음이었어요.

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곧바로 자동차의 방향을 돌렸습니다. 저는 다시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습니다. 거리에 나온 사람들은 아직까지 걸려 있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떼어내고, 그 자리에 새해를 맞이하는 장식을 걸어두기 시작했습니다.

 

 

***

 

 

프로듀서와 함께 LA시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서서히 저물어가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LA는 할리우드를 빼면 별 것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번 기회에 그 생각이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큰 일본인 타운이라고 하는 ‘리틀 도쿄’에는 교포뿐만 아니라 적잖은 여행객들이 모여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와는 달리 우리 두 사람은 가벼운 변장을 해야 했습니다. 미국에 온 이후부터는 늘 프로듀서의 등 뒤에만 숨어 있던 저였지만, 그곳에서만큼은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을 수 있었습니다.

 

“타카가키 씨.”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향수병 비슷한 것이라도 걸린 모양입니다. 다른 장소에 비해 유난히 오래 머물렀던 ‘리틀 도쿄’를 빠져나오면서 운전석에 앉아 있던 프로듀서가 말했습니다.

저는 선글라스를 벗으면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마침내 시간이 되었구나’라고 생각하면서요.

 

“함께 가 주셨으면 하는 곳이 있어요. 거기서 조금만…….”

 

프로듀서는 또다시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을 멈추었습니다. 마치 다음 단어를 떠올리기라도 하는 듯, 운전대를 쥐고 앞을 바라보며 한동안 입을 뻐끔거리던 그는 결국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이야기를 합시다.”

“네.”

 

그 한숨이, 저에게는 무척이나 무겁게 들려왔습니다.

 

 

***

 

 

프로듀서가 안내한 곳은 그가 살고 있던 마을에서는 그다지 멀지 않은 장소에 있었습니다. 입구에서 얼핏 바라본 약도에 따르면, ‘메모리얼 파크’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이 곳은, 커다란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로 되어 있는 무척이나 큰 공원이었습니다.

공원의 입구를 지나, 커다란 호수를 둘러싼 울창한 숲으로 들어와서도 우리는 말 한 마디 없이 조용히 오솔길을 걷고만 있었습니다. 그가 저의 보폭에 맞추는 것인지, 제가 그의 보폭에 맞추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우리는 발걸음을 맞추어 천천히 걷고 있었습니다.

 

“우선……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려야겠네요.”

“네?”

“기껏 따라오셨는데 제 볼일만 실컷 본 것 같아서요.”

 

저는 무심결에 고개를 들어 옆을 바라보았습니다. 울창한 숲이 시야를 가득 메웠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언제부터 그랬던 것인지. 발걸음을 멈춘 프로듀서가 약간 떨어진 곳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 아뇨, 괜찮아요. 처음부터 제가 반 정도는 억지로 따라온 것이고……애당초 프로듀서의 휴가였으니까, 프로듀서의 일정에 맞추는 것이 도리겠죠.”

“……캐서린에게 들었습니다. 어제 함께 집을 구경했다고요.”

“네.”

“어땠나요? 무섭던가요?”

“으응, 아니요. 전혀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제 옆을 지나갈 때를 노려 재빨리 옆에 따라붙자 그는 성큼성큼 걷던 보폭을 조절해, 제 발걸음에 발을 맞추어 주었습니다.

 

“……제 방은 보셨습니까?”

“네.”

“그 옆에 있던 방도요?”

“……네.”

 

갈림길이 나타나자, 그는 주저 없이 왼쪽으로 난 갈림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얼핏 바라본 이정표에는, ‘Cemetery’라는 단어와 ‘Playing Field’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습니다. 이정표를 따라 방향을 틀었지만, 또다시 눈앞에 펼쳐진 것은 지금까지와 똑같은 오솔길이었습니다.

자박자박, 오솔길을 밟는 발소리를 들으면서 저는 어제의 기억을 되짚었습니다.

프로듀서의 집을 돌아보는 내내, 저는 어떤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아뇨, 위화감 정도가 아닙니다. 그의 집에는, 간과하기 쉬운 가장 중요한 사실이 빠져 있었습니다.

 

“……프로듀서.”

 

저는 제자리에 서서, 마음을 다잡고 그를 불렀습니다. 제가 멈춘 것을 뒤늦게 눈치챈 그의 발걸음이 멈추었습니다. 바로 옆에 서 있을 때보다 좀 더 확실하게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프로듀서의 집은……아버지와 둘이서 살았던 것, 맞죠?”

“13살까지는 그랬었죠. 그 뒤로는 저 혼자서 살았지만.”

“그럼…….”

 

저는 말을 망설였습니다. 괜한 이야기를 꺼내서 이 사람의 트라우마를 다시 자극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이제 와서 뒤늦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고개를 끄덕이고, 저는 크게 심호흡을 했습니다. 캐서린과 함께 집을 돌아보면서 느꼈던 위화감은 한둘이 아니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느껴졌던 것은…….

 

“침실은 왜 하나뿐이었죠?”

“…….”

“침실 뿐만 아니에요. 침대도 하나뿐이었어요. 프로듀서가 자던 간이 침대, 반나절도 안 써봤지만 굉장히 불편했어요. 그런 걸로 사람이 잘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비록 하루도 지내보지 않았지만, 그 정도는 저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간이 침대는 원래는 침대 용도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닐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말이죠.

터벅터벅, 그는 다시 걸음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오솔길 옆으로, 저 멀리 널따랗게 정돈된 운동장과 그 곳에서 뛰놀고 있는 아이들이 보였습니다.

 

“…...’너 같은 놈은 내 아들이 아니다’.”

 

느닷없이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무척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였습니다.

 

“아버지께서 틈만 나면 제게 하시던 말씀이었어요. 어머니와 이혼하고, 미국으로 건너온 이후부터 저는 매일같이 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매질을 당하곤 했습니다.”

“뭐라고요……?”

“사업가셨던 아버지는 자존심이 무척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존심 빼면 시체인 사람이었으니 저런 말을 하는 것도 일리는 있었죠. 어린 시절의 저는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 영어를 빨리 터득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그 이외에 뭔가 잘하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프로듀서는 고개를 돌려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서고는 가 보셨습니까?”

“……네.”

 

저는 어제의 기억을 더듬었습니다. 사람의 손길을 많이 탄 흔적이 역력하던 서고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서고에 있을 때뿐이었습니다. 서고에 틀어박혀 내용도 모르는 책을 움켜쥐고 있으면 아버지는 제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때리지도 않았고, 욕을 하지도 않았고, 목소리를 높이는 일도 없었죠.”

 

“아참, 밥도 제때 주셨고요”라고 말하며 그는 씨익 웃었습니다. 하고 있는 이야기 때문인지, 그가 짓고 있는 미소는 지금까지 봐 온 그 어떤 것보다도 무척이나 애처로워 보이는 웃음이었습니다.

 

“……어쩌면, 아버지는 제가 책을 읽는 것을 보면서, 언젠가는 당신께서 바라던 아들이 되지는 않을까 기대하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저는……그 정도나 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요.”

 

캐서린은 그가 항상 서고에 틀어박혀 책을 읽었다고만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저는 단순히 ‘프로듀서는 책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었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이 틀렸습니다.

그는 책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을 수 밖에 없는, 책을 좋아해야 하는 환경에 처해 있었던 것입니다. 좋아해서 읽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읽었던 것입니다. ‘가족’으로써 남아있기 위해서.

 

“……전학생이라는 게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앉아 있으니, 저는 학교에서도 저는 늘 떠돌이 신세였습니다. 붕 떠 있었죠. 학교를 마치면 해가 질 때까지 공을 던지거나, 아니면 밖을 뛰어다녔습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오면, 곧바로 서고에 틀어박혀 책을 붙잡았죠. 그러지 않으면 아버지에게 또 얻어맞을 테니까.”

 

캐서린의 집에서 보았던, 그녀의 초등학교 졸업 사진에는 그 시절의 프로듀서가 함께 찍혀 있었습니다. 인종의 차이 때문이었을까, 당시의 프로듀서는 또래 아이들에 비하면 무척이나 왜소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다른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자기들끼리 놀고 있을 때, 그 아이는 홀로 운동장에서 야구공을 가지고 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해가 저물고 나면, 그 아이는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갑니다. 집에 도착한 그 아니는 다녀왔다는 말조차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들킬세라 그의 눈길을 피해 곧장 서고로 달려갑니다.

상상만 했을 뿐인데도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프로듀서는 한숨 섞인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명절이 싫었습니다. 특히 크리스마스가 제일 싫었어요. 지금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요.”

“어째서죠?”

“……미국은 크리스마스가 공휴일이거든요. 크리스마스부터 1월 1일까지, 대부분의 주에서는 연휴로 정해져 있습니다.”

“아…….”

 

그제서야 저는 그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집에 있는 것이, 서고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두려워 밖으로 뛰쳐나간 그를 반기는 것은 단란하게 모여서 성탄절을 맞이하는 다른 가족들의 모습이었겠지요. 어린 마음에 그것이 얼마나 부러웠을지. 그리고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을지……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평탄한 삶을 살아온 저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저는 어째서 그가 자신의 기념일에 그토록 무감각한 것인지,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챙겨줄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무감각해질 수밖에 없겠지요.

 

“’어떻게 하면 아버지에게 아들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 그것에 대해서 저는 무척 고민을 했습니다. 어떤 날에는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행동하면 아버지가 나를 봐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죠……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중, 11살이 되던 해에 저는 우연히 그 방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야구, 로군요.”

 

프로듀서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설마하니 그런 곳에 재능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었죠. 체육 실습만 했다 하면 뒤에서 성적을 세는 게 더 좋을 정도였거든요. 그 전까지 자신이 있는 거라곤 그저 오래 달리는 것뿐이었어요.”

 

프로듀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서쪽 하늘이 서서히 붉게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야구를 시작하고……큰 대회에 나가서 상도 타오고 하니, 그제서야 아버지는 저를 한 명의 사람으로 봐 주셨습니다......잠시, 실례.”

“꺅……!”

 

이야기를 하다 말고, 프로듀서는 오른손을 쑥 내밀어 제 몸을 자신의 품 속으로 끌어안았습니다. 어떻게 반응할 틈도 없이 그의 품속으로 끌려 들어갔다고 생각한 그 순간, 머리 위에서 ‘퍽’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쉬이이익 하는 마찰음이 들려왔습니다. 고개를 들어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자, 그의 손아귀에 들어 있는 커다란 야구공이 보였습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아무래도 날아오는 공을 맨손으로 붙잡기라도 한 모양이었습니다. 뜻밖의 묘기에 우리들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박수를 보냈습니다. 개중에는 휘파람을 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프로듀서는 공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습니다. 운동장을 둘러싼 안전펜스 너머로, 유니폼을 맞춰 입은 아이들이 우르르 뛰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운 좋게 홈런이라도 친 모양이군요. 제아무리 안전펜스를 높여도 넘어갈 타구는 넘어가니까요.”

 

끌어안았던 제 어깨를 놓은 프로듀서는 공을 쥔 왼팔을 빙빙 돌려 어깨를 풀고는 곧바로 공을 안전펜스 너머로 던졌습니다. 특별히 힘을 쓴 것 같지도 않은데 그의 손을 떠난 공은 훨훨 날아가 아이들의 가장 뒤에 있던 포수의 근처에 뚝 떨어졌습니다.

환호하는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어준 뒤, 빨갛게 붓기 시작하는 왼손을 털면서 그는 곧바로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무척 기뻤습니다. 비록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시간은 기쁘고, 또 행복했습니다. 당당하게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그리고 ‘어서오너라’라고 대답해주는 가족이 얼마나 좋은 것이었는지 저는 그 때 처음으로 깨달았어요. 어린 시절, 어머니와 헤어지기 전에는 몰랐던 것이었죠. 그 때의 저는 너무 어렸거든요.”

“혹시…….”

 

‘무슨 미친 소리를……’저는 말을 꺼내려다 말고 황급히 입을 막았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 따위는 이미 읽힌 듯, 곁눈질로 슬쩍 바라본 그는 무척 씁쓸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 그게 철이 들고 난 이후로 처음으로 깨달은 ‘관심’의 맛이었습니다. 너무 달콤하더군요. 어찌나 달콤했는지……도무지 잊혀지질 않았어요. 그러니까, 아마도 그게 방아쇠가 되었을 겁니다……지긋지긋한 이 정신병의 방아쇠가.”

 

그의 말을 들으며 저는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실례되는 생각을 한 것으로도 모자라 본인의 입에서 그런 이야기까지 나오게 하다니. 저란 여자, 정말 최악이네요.

 

“마운드 위에서는 느낄 수 있었어요. 지금 팬들이 누구를 보고 있는지, 팬들이 외치는 것이 누구의 이름인지, 그리고 이 경기가 끝나고 나면 누가 가장 주목을 받을 것인지……정말, 꿈만 같은 날들이었죠.”

 

거기까지 말하고 프로듀서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대화가 멈추자 자박자박, 오솔길을 걸어가는 발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습니다.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는 제 옆에서 프로듀서가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그러고보면……아침에 시계에 대해서 물어보셨죠?”

“……네.”

“……실은, 이거 아버지가 쓰던 거에요. 유품은 아니고, 유실물 같은거죠.”

“……유품이 아니라 유실물이요?”

 

프로듀서는 눈을 내리깔며 자신의 왼쪽 손목에 걸려 있는 반짝이는 그것을 쓰다듬었습니다.

유품과 유실물, 어떤 차이점이 있는 것일까요.

 

“……아버지는 제게 아무것도 물려주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급서하시면서 당신께서 가지고 계셨던 모든 게 자연스럽게 제 것이 되었을 뿐이죠.”

“아…….”

”그래서 유실물이에요. 야구를 시작하고, 저 나름대로 아들로써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고 생각했습니다만……제 착각이었죠. 아버지는 죽는 그날까지도 단 한번도 저를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았어요.”

 

프로듀서의 방 바로 옆에는 아버지의 방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의 방에는 가족에 대한 물건이라고는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마치 ‘이 집에는 나 혼자서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 방은 가족의 존재를, 그의 존재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었습니다.

시계를 차고 있는 걸 보면, 아버지가 죽고 나서 그는 분명히 아버지의 방에 들어가 보았을 것입니다. 그 방을 둘러보며, 추억의 조각 하나조차 남기지 않은 부모의 흔적을 보면서 그는 과연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친척조차 없던 저는 보호시설을 전전했습니다. 저를 받아주지 않았거든요. 나이도 어중간하게 먹었을 뿐만 아니라, 동양인이라고 거기에 있던 아이들이 무척이나 싫어하더군요. 선생들도 마찬가지였고요. 우여곡절 끝에 들어간 보호시설에서, 저는 커다란 사고를 치고 말았습니다.”

“사고요?”

“네. 어떻게 빈 자리가 있어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거기에 하얗고 검은 놈들이 가만히 있질 않더군요. 하루가 멀다하고 난리를 쳐 대길래 대판 싸웠어요.”

“저런…….”

”……그 이후로는 그 어떤 보호시설에서도 저를 받아주지 않았기에, 저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행히도 중학교로 진학하면서 학기 중에는 야구부 기숙사를 사용할 수 있었어요. 천만다행이었죠.”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저는 문득 그의 방에서 보았던 사진 하나를 떠올렸습니다. 학교처럼 보이는 붉은 벽돌건물을 배경을 찍은 사진에는 프로듀서와 캐서린, 그리고 스무 명 남짓한 아이들이 함께 찍혀 있었습니다.

그 사진의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 그건 보호시설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메이저리그에서 첫 연봉을 받고 나서, 저는 곧바로 아시아계 아이들을 돕고 있는 고아원을 찾았습니다. 단순히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 아이들이 고통 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어요. 부모도, 친척도 없는 이역만리 타국에서 그 아이들이 가질 공포심은……저도 무척이나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 대답을 마지막으로, 프로듀서는 한동안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이따금씩 숲 너머에서 들려오는 함성 소리와 가족단위로 피크닉을 나온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단란한 이야기소리를 들으면서 걷고 있자니 어느덧 오솔길도 끝이 보였습니다.

오솔길의 끝에는 넓은 초원이 있었습니다. 초원에는 규칙적인 간격을 두고 비석이나, 비석처럼 생긴 독특한 조각들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영화에서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는 풍경이었습니다.

 

“공동묘지……인가요?”

“들어오면서 표지판 보셨죠? 메모리얼 파크라고 적혀 있던 거.”

“네, 본 것 같네요.”

“’메모리얼 파크’는 공동묘지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여기는 묘지와 공원을 겸하고 있는 장소지요.”

“그렇군요……그런데, 이 곳에는 왜……?”

 

대답 대신 빙그레 웃으면서 그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뒤를 따라가며 널찍하게 간격을 두고 세워져 있는 비석들을 돌아보면 평범한 비석처럼 생긴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어떤 것은 오벨리스크(주 : 사각기둥 위에 사각뿔이 얹혀진 구조물)처럼 생긴 것도 있고, 어떤 것은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를 연상시키는, 땅에 절반 정도 매장된 동판 형태로 되어 있는 것도 있었습니다. 또 개중에서 몇몇은,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 것인지, 무척이나 거대한 구조물을 얹어놓은 것도 있었습니다. 이리저리 비석 사이를 걸어가던 그는 어떤 비석 앞에서 멈춰 섰습니다.

 

“저, 여기는……?”

“……아버지의 비석이에요. 열차 사고로 돌아가셔서 시신은 못 찾았지만……그래도 비석은 세워야겠다 싶어서 세워 두었죠.”

 

Joeseph M. Johnson

SEP. 24. 19xx

Rest In Peace.

 

저는 비석 앞에 꿇어앉은 그의 어깨 너머로 비석에 적힌 글자를 바라보았습니다. 부서진 것인지, 아니면 닿아버린 것인지, 연도가 적힌 뒷부분은 뭉개져 있어서 숫자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SEP 24’는 9월 24일을 가리키는 것이겠죠. 그 날짜를 바라보던 저는 문득, 무척 낯이 익은 숫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9월 24일……9월 24일……어디서 들었더라?’

 

그 순간,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9월 24일. 그것은 프로듀서의 생일이었던 것입니다.

 

 


 

 

 

“어디, 이 정도면 되겠군.”

 

내일이면 다시 일본으로 떠나가야 한다.

집 주변 울타리와 차고의 정리를 얼추 마무리 지은 뒤 나는 마당으로 나와 집을 바라보았다. 캐서린의 도움으로 주기적으로 정리를 하고는 있었지만, 어쩐지 오늘따라 내 눈으로 이 집의 모습을 한번 살펴보고 싶었다.

주머니에 찔러 넣은 왼손에서 땡, 땡, 땡, 하는 가느다란 종소리가 새어 나왔다. 왼손을 주머니에서 꺼내어, 시계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신 것인지,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던 그 날 당신께서는 어째서인지 이 시계를 차고 나가지 않으셨다. 언제나 자신의 몸에서 떼어 놓지 않던 물건이었는데도.

아버지의 비석을 세운 날,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의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이 시계를 발견했다. 아버지께서 늘 사용하시던 것. 그것은, 어린 내게 있어서는 아버지와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시계를 가지고 다닐 엄두는 내지 못했다. 생전에도 아들로써 인정을 받지 못한 내가 감히 사용할 수 있을리가 만무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인정받을 수 있는 자리로 올라설 때까지, 나는 그것을 유보하고 있었다.

열아홉 살이 되던 해, 월드 시리즈 MVP와 더불어 신인왕이라는 자리에 올라서야 나는 비로소 아버지께 떳떳한 자식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날부터 시계를 차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래, 그건 어디까지나 자만이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하는.

자박 자박, 적당히 정리된 잔디를 밟는 발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서서히 저물기 시작하는 땅거미를 밀어내듯이 하늘에는 하나 둘씩 별이 뜨고 있었다.

 

카에데에게는 무척 많은 이야기를 했다. 어쩌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까지.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나 자신도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의 죽음 때문이었을까? 정확한 이유는 특정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오늘의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도 무척 말이 많았다는 것이다.

나는 왼손을 옷깃 아래로 집어 넣었다. 오른쪽 쇄골의 위쪽에, 우둘투둘한 흉터자국이 만져졌다. 보호시설에서 ‘싸움’을 하던 도중에 칼에 찔려서 생긴 상처였다.

아버지가 묻힌 묘지를 벗어날 때부터 카에데는 조용히 내 뒤를 따라오기만 했다. 공원을 나와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그녀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창 밖을 골똘히 바라보거나, 멍하게 앉아 있는 것이 전부였다.

문득, 불안감이 엄습했다. 지금 그녀의 눈에는 내가 어떻게 비치고 있을까?

왕년에 한 끗발 날리던, 지금은 은퇴해서 자기보다 못한 자들이 버둥거리는 것을 즐기며 바라보는 기만자?

넘쳐나는 재물을 주체하지 못해, 자기보다 못난 자들에게 은총을 베풀며 그들이 감동하는 것을 즐기는 위선자?

그것도 아니라면, 어릴 적 트라우마를 다 커서도 질질 끌고 다니는 찌질이?

……어느 쪽이든, 어느 쪽도 아니든, 오늘 이후로 그녀가 나를 보는 시선은 이 곳에 오기 전에 나를 바라보던 시선과는 크게 달라져 있을 것이다.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이맘때의 도쿄에서 내쉬던 한숨은 내뱉는 즉시 하얗게 부서졌지만, 이 곳의 한숨은 아무리 내뱉어도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의 편지는 서고에 있는 서랍장에 넣어 두었다. 마음같아서는 가져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윌리 존슨’은 이 곳에서만 있어야지, ‘윌리’가 일본으로 건너가서는 곤란해진다. 나는 어디까지나 길잡이. 내가 그녀들보다 돋보여서는 안 되니까. 물론, ‘윌리’를 팔아서 그들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를 팔 것이다.

한숨을 푹푹 내쉬며 터덜터덜 걷다 보니, 어느 새 나는 집을 한 바퀴 돌아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차고의 문을 닫고, 마지막으로 정원을 둘러본 뒤, 나는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들어가려고 했다.

 

“타카가키 씨?”

 

현관에는 카에데가 서 있었다. 한 쌍의 글러브와 야구공을 품에 안고 있던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며 방긋 웃었다.

 

“캐치볼, 할래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도 저는 계속해서 그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곱씹었습니다.

한참 동안이나 공원에서 프로듀서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되새긴 다음에야 저는 어째서 그가 그토록 야구에 집착하는지를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 프로듀서는 제게 ‘야구를 하던 시절의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었기 때문에’라고 설명했습니다만, 그것은 그렇게 단순하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구를 시작함으로써 아버지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고

야구를 시작함으로써 친구들을 만들 수 있었고

야구를 시작함으로써 사람들에게서 ‘관심’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야구는 그가 필요로 했던 모든 것들을 그에게 가져다 주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캐서린이나 월터 씨는 그의 팬서비스를 보고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팬들과 함께한다’라는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절반만 맞는 이야기였습니다. 그가 팬들을 대하는 태도는 집착 그 자체였습니다. 그의 마음을 좀먹고 있는, ‘강박성 성격장애’라는 커다란 질병이, 자신을 봐 주었으면 하는 욕심이 만들어낸 집착이었던 것입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저는 프로듀서가 어째서 틈만 나면 회사에 있으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단순한 워커홀릭이 아니라, 정말로 회사가 머물기 편한 곳이었기에 계속해서 그 곳에 있고 싶었던 건 아닐까요? ‘윌리 존슨’의 존재를 증명한 것이 ‘야구’였다면, ‘P’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일’이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아직 저에게는 몇 가지 해결하지 못한 ‘왜’가 남아 있었습니다. 매니저도, 트레이너도 있었을텐데 어째서 ‘프로듀서’였을까요? 그리고, 어째서 저였을까요?

마지막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한 소품은 이미 챙겨두었습니다. 때마침 그가 현관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는 미리 챙겨둔 ‘그것’들을 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습니다. 현관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그에게 저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캐치볼, 할래요?”

 

프로듀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뒤뜰로 나왔을 때만 하더라도 생각보다 날이 어두웠기에 당황했지만, 프로듀서의 집 뒤뜰에는 캐치볼 정도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을 정도로 장비가 충실하게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하핫, 언젠가 이렇게 우리 집에서 한번 해 보고 싶었어요. 캐치볼.”

 

안전그물을 치고, 뒤뜰에 설치된 조명의 전원을 연결하는 프로듀서는 어쩐지 몹시 들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잠시 후, 준비를 마친 밝은 조명 아래에서, 글러브를 낀 우리는 약간 떨어진 곳에 서서 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비록 유니폼 차림은 아니지만, 글러브를 끼고 저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윌리 존슨’의 모습이 오버랩되었습니다.

 

“……프로듀서. 아니, P씨.”

 

우리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자리에 서 있던 사람. 그렇지만 그 모든 영광을 내려놓고 미답의 영역으로 발을 디딘 사람. 며칠간 제가 알게 된 그의 삶은 평범하게 살아온 저로써는 이해가 안 되는 것들뿐이었습니다. 어째서 그는 이곳을 떠나려고 한 것일까요? 그는 어째서 저를, 저희들을 선택한 것일까요?

 

“요 며칠간, 프로듀서가 아닌 당신을 바라보면서 무척 낯설게 느껴졌어요. 함께 울고 웃으면서 걸어온 날들이 모두 거짓말처럼 느껴져서,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아서 무척 무서웠어요.”

“…….”

“어째서 당신은 이 곳을 스스로 떠난 건가요? 어째서 저에게, 저희들에게 오신 건가요?”

 

묵묵히 제 말을 듣고만 있던 그는 대답 대신 저에게 공을 던졌습니다. 평소 공을 던지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느릿느릿 날아오는 공을 글러브로 받아냈습니다. 팡, 하는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손바닥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습니다. 소프트볼이라면 학생 시절에도 많이 했지만 역시나 야구공은 무게부터가 다르네요.

그에게 다시 공을 되돌려주기 위해 글러브 안으로 손을 집어넣으려는 순간, 프로듀서가 입을 열었습니다.

 

“오늘까지 보셨다시피, 야구는 제 모든 것이었습니다.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내 이름 석자보다도 값진 것이었죠. 제게서 야구를 빼면 대체 무엇이 남을까…...그 때의 저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공을 그에게로 던졌습니다. 나름 힘껏 던졌다고 생각했는데, 힘없이 날아가던 공은 그에게 닿기 전에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프로듀서는 재빨리 글러브를 거꾸로 뒤집으며 그것을 건져 올렸습니다.

 

“뇌사……라고 했었죠.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 저는 계속해서 그걸 고민했습니다. 6개월동안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무의식 속에서 꿈을 꾸듯이 말이죠. 끝났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요. 머리는 진작에 납득하고 있었죠. 하지만, 몸은 그러지 않았어요. 아니,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한때 나의 존재이유였던 것을 어떻게 쉽게 버리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마운드를 떠나고 나서도 계속 그라운드를 기웃거렸죠. 미련이 남았어요.”

 

그는 제게 공을 던졌습니다. 살짝 던진 것처럼 보였지만, 제 글러브를 향해 곧게 날아온 공은 글러브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습니다.

 

“트레이너, 코치……물론, 다른 길은 얼마든지 있었죠. 하지만, 저는 처음부터 그 쪽은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그 대신 제가 눈을 돌린 쪽은, 엔터테인먼트였습니다.”

“어째서죠?”

“타카가키 씨, 배우와 프로선수의 결정적인 차이를 아십니까?”

 

저는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야구선수는 최소 한 번의 기회를 보장받습니다. 그 장소가 트리플A가 될 수도 있고, 더블A가 될 수도 있고, 싱글A가 될 수도 있죠. 운이 좋으면, 빅리그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최소 한 번은 기회를 보장받습니다. 그것을 잡고 놓치고는 본인 하기에 달려 있는 것이죠. 하지만, 배우는 그게 아니에요.”

“아…….”

“상황에 따라서는 단 한번의 기회조차 받지 못하고 무대의 뒤편에서 스러져가는 별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브로드웨이에서, 할리우드에서, 저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무척 많이 봤어요. 충분히 재능과 소질이 있는 사람인데, 단순히 기회를 갖지 못해서 꿈을 이루지 못한다는 건 너무 불합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직전보다 조금 더 힘을 넣어서 공을 던졌습니다. 아주 조금 더 강하게 날아간 공은, 이번엔 가까스로 그의 글러브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제 선생님 한 분은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별은 하늘에 떠 있기만 한다고 별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길을 알려주고, 꿈을 보여줄 수 있어야 진짜 별이다’……저는 별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성공과 실패를 모두 맛보았으니, 이제는 내 뒤를 따라올 사람들을 이끌어주고 싶었어요. 적어도 저의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은 제가 당했던 것처럼 원치 않은 결말을 맞이하게 놔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저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세상에, 저게 정말로 저와 비슷한 연배의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생각인가요?

월터 씨는 자신의 은퇴 소감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력감과 자괴감을 버틸 수가 없었다’고.

‘스스로 물러난 것도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자의가 아닌 타의로 강제로 끌려 내려간 사람은 오죽하겠느냐’고.

하지만, 프로듀서는 그것을 딛고 일어섰습니다. 그들이 자신과 같은 길을 걷게 놔두지 않겠다는 한 가지의 일념으로 말이죠. 어쩐지 사장님께서 이 사람을 보고 ‘강한 사람’이라고 말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할리우드나 브로드웨이에서 경력을 쌓아 감독이 되려고 했습니다. 라라랜드……할리우드에는 여러 사정으로 인해 기회조차 잡지 못하는 신인들이 무척 많거든요. 애초에 제가 그렇게 마음을 먹은 것도 캐서린이 고생하는 걸 보면서 생각한 것이기도 하고요. 감독이 되어서 저 사람들에게 한 번씩이라도 기회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프로듀서를 하고 계시네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연수 기간 중에 누군가한테 영업을 당했거든요. 아주 제대로 약을 팔렸죠.”

“그게 누군가요?”

“765의 아카바네 프로듀서.”

“아.”

 

그러고 보면, 두 사람은 할리우드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했었죠.

 

“시간이 날 때마다 자기 아이돌들의 자랑을 늘어놓더군요. 치하야가 어떻고 하루카는 어떻고……처음에는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하나 싶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저도 그의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 있었어요. 그러고 나니 저도 한번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도 저렇게 아이돌을 키워낼 수 있을까, 내가 키워낸 아이돌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765의 저 아이들을 넘어서보고 싶다…….”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른 모양인지, 프로듀서는 훗, 하고 가볍게 코웃음을 냈습니다.

 

“……그럼, 어째서 저였나요?”

“네?”

“저 말고도 다른 아이들이 많았을 텐데, 어째서 저였나요?”

 

그래요. 사실 정말로 궁금했던 건 이것이었습니다. 어째서 나를 선택한 것인지.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지었던 것과는 달리 씁쓸하지도 않았고, 꾸미지도 않은 순수한 웃음이었습니다.

 

“……3개월.”

“……네?”

“90일하고도 15일이나 더 지난 시간이었죠. 제가 당신을 만나기까지 헤매었던 시간입니다. 이 시간 동안 저는 수많은 사람을 보고, 수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선택한 건 당신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유창하게 말하던 그는 머뭇거리듯 잠시 말을 멈추었습니다. 어떤 말이 나올까, 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내심 부여잡으며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쑥스러운 듯, 그는 저의 시선을 피하면서 작게 덧붙였습니다.

 

“……제가, 첫눈에 반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다음 날.

동경 표준시, 12월 30일.

 

공항까지 태워 주겠다며 아침 일찍 일어난 캐서린과 함께 공항으로 가던 도중, 우리는 어제 갔던 공원을 다시 한번 찾았습니다.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싶다는 프로듀서의 부탁 때문이었습니다. 그제서야 눈치챈 것이지만, 주차장에는 묘지를 찾는 가족들을 위해 곧장 묘지로 통하는 샛길이 나 있었습니다.

하루 만에 다시 찾아온 그 자리에서, 프로듀서는 비석을 바라보며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저 다시 갑니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언제 다시 올 지는 모르겠지만 또 올게요. 그때까지 어디 가지 말고 여기에 얌전히 계세요.”

 

저의 눈에 보이는 것은 웅크린 그의 뒷모습뿐이었지만, 코트를 입고 있는 그의 넓은 등이 지금은 무척이나 작아 보였습니다. 그런 유년기를 보냈음에도, 그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단 한 명뿐인 아버지였습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가족이었던 것입니다.

한동안 비석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그는 잠시 후 긴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었습니다.

 

“시간이 늦었네요. 얼른 갑시다.”

“……괜찮으세요?”

“매번 해 온 일입니다. 그 텀이 조금 길어졌을 뿐이죠. 그리고 아마……아버지께서도 제가 자주 오는 건 안 좋아하실 거에요.”

 

씁쓸한 미소를 흘리며 샛길을 앞장서서 걷기 시작하는 그의 뒤를 따라 저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드르륵 드르륵, 여행가방의 바퀴 소리가 오늘따라 몹시 쓸쓸해 보였습니다.

 

 

-------<(Re)Write─덮어 쓰는, 혹은 다시 쓰는. (7-完)>로 계속됩니다.


'인내의 삶'과 '어제가 오늘과 함께 할 내일에게'에서 차마 풀지 못한 이야기들입니다.

별로 안 될거라 생각했는데 풀어놓으니 양이 굉장하네요....

이_세상_사람이_아니다.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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