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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하게 느긋하게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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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4-06, 2017 22:39에 작성됨.

 

---19

어제 있었던 기자들의 한바탕 소란 덕에 치하야는 부모님의 이혼 소식이 기사거리가 되었단 것을 알았다. 예전에 하루카가 알려줬던 대로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기사를 읽어내려가던 도중, 치하야의 눈을 사로잡은 기사가 있었다.

 

‘765 프로 소속 아이돌 키사라기 치하야 양을 향한 취재 경쟁이 지나치게 과열되고 있다. 같은 프로 소속 하기하라 유키호 양의 대기실에 무단 침입한 기자 때문에 라이브 무대까지 지장 받은 사실이 밝혀지면서, 과열된 취재 경쟁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하기와라 양!’

 

치하야는 급히 다른 기사들까지 쭉 살펴봤다. 기사에 따르면 유키호뿐만 아니라 다른 동료들도 기자들의 집요함에 스케쥴까지 방해받고 있었다.

기사를 읽어내려가던 치하야는 힘없이 핸드폰을 내려 놓았다. 마음속 소용돌이는 새로운 자책감으로 더 거세졌다.

 

‘동료들이 나 때문에 또 피해를 보고 있어.’

 

점차 소용돌이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음을 자각하곤 있었다. 하지만 분에 걸맞지 않게 행복을 꿈꾸어 모두에게 불행을 안긴 자기에게 걸맞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노래해서 행복해지겠다고? 내가? 난 그럴 자격 없어.’

 

그런 치하야를 위해 프로듀서는 하루카, 야요이와 같이 ‘푸른 기사단’이 준 쇼핑백을 들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프로듀서는 물론 하루카와 야요이가 문을 두드려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그 날 저녁 타카기 사장은 프로듀서와 리츠코, 코토리를 모아 회의를 열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리츠코였다. 리츠코는 그동안 프로듀서와 함께 기자들을 상대하느라 지쳐 있었다. 논리정연하고 단호한 리츠코의 말에 많은 기자들을 돌려보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리츠코의 표정엔 근심이 가득했다.

 

“무엇보다 치하야의 상태가 염려되네요.”

 

“저도 다른 것보다 치하야 양의 건강이 가장 걱정입니다.”

 

“다른 아이돌도 기자들의 무례함에 스케쥴까지 방해받고 있어요. 저와 프로듀서 씨도 그렇지만 코토리 씨도 기자들을 상대하느라 업무에 지장이 많고요.”

 

“요시자와의 말대로 키사라기 군이 나서지 않는 한은 관심이 사그라질 것 같진 않다네. 그리고 부모 이혼까지 이어질 줄 몰랐지만, 키사라기 군의 가정사를 미리 말 못한 내 잘못이 크네. 프로듀서 군을 포함한 제군들에게 큰 짐을 지워버렸어.”

 

타카기 사장 역시 침통한 표정이었다.

 

“아닙니다. 담당 프로듀서인 제가 미리 알았어야 했던 일입니다... 미숙한 저 때문에 일이 커져 모두에게 죄송합니다.”

 

이제 프로듀서는 치하야만의 프로듀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감정은 치하야를 놓지 못했다. 단순한 동정, 연민 같은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더는 노래하기 싫다는 치하야의 말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그 누구보다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이 노래를 못 하는 지독한 아픔을 잘 아는 탓이었다.

프로듀서의 생각대로 동생의 죽음이 노래에 담긴 푸른 차가움의 이유였다. 그래서 프로듀서는 치하야에게 행복하게 노래 부르는 이유를 만들어주려 했다. 그것은 함께 노래하고, 노래를 들어주는 사람들의 마음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리고 치하야는 새로 깨달은 행복과 동생의 기억까지 안으며 행복한 아이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미처 알지 못했던 부모의 얘기도 푸른 차가움을 만드는 이유였다. 치하야가 행복한 아이돌이 된 시기와 부모의 이혼이 맞물린 것이었다. 하지만 치하야는 올스타 라이브를 포기하지 못했고, 홀로 부여안은 상처가 터지며 결국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리고 행복하냐고 묻는 유우의 환영이 보였다는 말은 프로듀서의 마음을 더 무겁게 하였다.

 

‘아직 동생에 대한 트라우마가 다 나은 게 아니었어. 아니, 부모의 이혼으로 다시 떠오른 거겠지. 그래서 다시 노래하기 싫다는 걸까.’

 

결국, 치하야는 자신의 노래가 남은 가족도 떠나게 했다는 것과 모두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는 데서 비롯된 죄책감, 유우의 환영으로 나타난 슬픔까지 얽힌 거센 소용돌이에 갇히고 말았다.

 

‘그동안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회의는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다. 우선은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대처하며, 치하야가 문을 열고 나오는 것 외엔 방도가 없었다.

회의가 끝나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으며 프로듀서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워낙 세게 앉았던 지라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이오리가 호되게 나무랐다.

 

“프로듀서, 요새 힘든 건 알지만 좀 신사답게 앉을 수 없어? 샤를까지 깜짝 놀랐잖아! 정말, 어른이면 어른답게 품격을 지키라고.”

 

“아, 미안해요.”

 

우사짱을 꼭 안은 이오리를 바라보며 프로듀서는 무심코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미나세 양은 항상 우사짱을 안고 있네요.”

 

“우사짱이 아니고 샤를 도나텔로 18세라는 이름이 있다고 몇 번을 말했을 텐데? 프로듀서라면서 그것도 몰라? 내가 일일이 알려줘야겠어?”

 

“미안해요. 어쨌건 샤를을 엄청 좋아하나 봐요?”

 

“우리 가족들은 항상 바쁘고 집사나 하인들은 날 항상 불편하게 대하잖아. 집이 넓으면 뭐해, 혼자인 시간이 더 많았는걸. 그때부터 지금까지 샤를은 내 유일한 친구가 되어줬어.”

 

미나세 가문은 누구나 다 아는 재벌 가문이었다. 여러 회사를 이끌어야 할 아버지와 오빠들은 물론, 사교계 유명인사인 어머니까지 어린 이오리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집사나 하인들도 이오리를 가족보다 살갑게 대하긴 어려웠을 것이었다. 그런 이오리는 우사짱을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다.

우사쨩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이오리를 보면서 프로듀서는 예전 교양 심리학 수업에서 들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그리고 프로듀서는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래! 그 방법이 있었지?”

 

“방법? 느닷없이 웬 생뚱맞은 소리야? 그리고 왜 이리 소란스럽게 일어나? 진짜 어른답지 못하게!”

 

하지만 기쁨에 겨운 프로듀서는 갑자기 이오리를 끌어안았다.

 

“미나세 양, 정말 고마워요!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다 큰 어른이 뭐하는 짓이야! 이거 당장 놓지 못해! 이 변태, 완전 변태, 변태 대마왕아!”

 

갑자기 이오리를 껴안고 뱅뱅 도는 프로듀서를 모두가 이상하게 바라봤다. 이오리는 화내며프로듀서를 마구 때렸다. 이오리의 주먹이 머리를 때리고 나서야 프로듀서는 이오리를 내려놓고 한참을 사과해야 했다.

하지만 치하야가 닫은 문을 먼저 여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제는 치하야의 건강까지 걱정되었다.

 

‘밥이라도 잘 챙겨 먹었으려나,’

 

오늘 어떻게든 결판을 내야겠다는 생각에 프로듀서는 모든 스케쥴이 끝난 저녁에 홀로 치하야의 집으로 향했다. 아쉽게도 하루카와 야요이는 각자의 스케쥴로 오지 못했다. 하지만 프로듀서는 그편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긴, 나한테도 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으니까.’

 

프로듀서는 ‘푸른 기사단’이 준 쇼핑백에 다른 무언가를 담은 쇼핑백까지 들고 치하야 집 문 앞에 섰다.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으며 조심히 초인종을 눌렀다.

 

“치하야 양, 듣고 있어요? 몸은 괜찮아요?”

 

- 전 괜찮으니 돌아가세요.

 

차갑게 말하면서도 치하야는 멍한 눈으로 인터폰에 비친 프로듀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치하야 양, 집에만 있은 지 며칠 됐잖아요. 혹시 건강이라도 안 좋아졌을까 봐... 프로듀서로서, 업무상 파트너로서, 그리고 동료로서 오늘은 꼭 만나야겠습니다. 우선 문부터 열어줘요.”

 

- 싫어요.

 

단호한 목소리였지만 프로듀서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치하야 양의 건강이 걱정되어서라도 오늘은 꼭 봐야겠어요.”

 

- 대체 왜 그러시는 거죠?

 

“전 지금도 치하야 양의 프로듀서잖아요.”

 

- 전 아이돌도, 노래하는 것도 이젠 싫어요. 제 노래는 모두에게 폐만 끼쳐요. 그러고서 행복하게 노래한다고요? 아뇨, 프로듀스 할 가치도 없고, 아이돌로서도 실격인 절 그냥 내버려 두세요.

 

프로듀서는 몰랐지만, 하루카와 야요이는 몇 번이나 더 치하야를 찾아왔었다. 때론 혼자서 올 때도 있었다. 둘은 치하야가 대답하지 않아도 끝까지 설득하려 했다.

그때마다 둘의 마음은 닫힌 문을 넘어 푸른 차가움에 무뎌진 치하야에게 전해졌다. 그 마음은 한없이 따뜻하면서도 활기차 푸른 차가움마저 녹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치하야는 고개를 돌려 밀어냈다.

자기는 행복해질 자격조차 없다고 못 박은 치하야였기에, 그런 다짐이 무너질까 봐 무섭고 두려웠다. 그래서 치하야는 마음에도 없는 차가운 대답까지 하며 둘을 돌려보냈다. 때론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이, 아니면 소리 죽인 훌쩍임을 끝으로 둘은 떠나갔다. 늘 의지가 됐던 둘에게 또 상처를 주었단 생각에 마음이 아팠지만, 치하야는 독하게 마음먹었다.

 

‘둘이 행복하려면 내가 끼어들어선 안 돼.’

 

하지만 그런 만큼 마음속에선 소용돌이가 거세졌고, 그만큼의 상처만 더해져갔다.

그렇기에 치하야는 프로듀서의 마음도 느껴질까 두려워 먼저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프로듀서 역시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노래하는 게 더 좋아졌다면서요? 행복을 주는 아이돌이 되어가는 기쁨을 느꼈다면서요? 이젠 행복이란 게 무언지 다시 알 것 같다면서요?”

 

- 그만 해요! 제발! 그만하라고요.

 

인터폰으로 치하야의 절규가 복도에 가득 메웠다. 분명 이웃 사람들에게까지 들렸으리라. 하지만 프로듀서는 포기할 수 없었다. 절박한 마음 탓에 자기도 모르게 말을 놓았다.

 

“치하야, 절대 포기하지 마. 다시 노래할 수 있게 도와줄게.”

 

- 전 노래를 부를 자격이 없습니다. 제발 돌아가세요… 제발요…

 

“너도 알다시피 나도 너만큼은 아닐지라도 노래하는 게 정말 행복했어. 나 역시 내겐 노래뿐이었고, 가수가 되는 것 외엔 다른 생각을 한 적도 없어. 그러던 내게 성대 결절이 선고되었을 때 난 이 세상에 더는 미련이 없었어.”

 

닫힌 문에 머리를 기댄 프로듀서는 잠시 과거를 떠올렸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선고 한마디에 평생을 꿈꿔온 가수의 꿈이 박살 났다. 그 날부터 학교도 나가지 않고 자취방에만 틀어박혔다. 식음을 전폐하고 위로하려는 사람들을 돌려보내기 일쑤였다. 그토록 하루를 함께 한 노래도 듣지 않았다. 노래가 평생의 행복이었던 만큼 아프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목을 매달 매듭을 묶었다 풀기를 종일 반복한 날도 더러 있었다. 노래만을 바라오고 살아온 프로듀서에게 노래할 수 없는 삶은 더는 의미가 없었다.

 

“혼자 있으니까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어. 다른 사람이 노래 부르는 게 질투 나고 한없이 부러웠어. 하지만 무엇보다 노래를 못한다는 슬픔이 더 컸어. 정말 이 세상에 미련도 남지 않았는걸.”

 

마침내 프로듀서는 굵은 매듭을 천장에 매달았다. 그리고 의자에 올라 밧줄에 턱을 대었을 때, 밖에서 어떤 노랫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행사 무대에서 부르는 것 같았다. 목소리가 창문으로 뭉개져 또렷이 들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프로듀서도 익히 잘 알고 있는 노래였고 흐릿한 노랫소리에 맞춰 가사가 떠올랐다.

슬프면서도 마음을 울리는 노래가 프로듀서의 얼어 붙어있던 마음을 녹였다. 차마 밧줄에 목을 걸지 못하고 넘어졌다.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진 프로듀서는 하염없이 울었다. 그때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멎고 환호성이 들렸다.

다시 일어서기로 결심한 프로듀서는 노래하는 사람이 자신과 같은 슬픔에 빠지지 않도록, 그리고 행복하게 노래 부르도록 도와주자고 마음먹었다.

 

“이런 날 다시 일어서게 한 것도 결국 노래였어.”

 

- 프로듀서...

 

“치하야, 내가 네 슬픔에 완전히 공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노래를 다시 못 하는 슬픔을 누구보다 잘 알아. 그러니 내가 치하야를 도와줄게.”

 

- 그만! 그만 해요, 제발.

 

“네가 다시 행복하게 노래 부르도록 도와줄게. 부탁이야! 제발 문을 열어줘.”

 

치하야는 차마 인터폰을 끄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닫힌 문을 넘어 프로듀서의 애절한 마음이 전해왔다. 치하야는 몰랐지만, 하루카와 야요이의 방문으로 푸른 차가움은 어느 정도 녹아있었다. 그리고 다시 행복해지고픈 마음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랬기에 프로듀서의 호소가 더욱 진하게 와 닿았다.

 

‘하지만… 난…’

 

행복과 불행 사이에서 갈팡질팡할수록 치하야의 눈물은 굵어지고 있었다.

그때 아파트 밖으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아마 소란으로 누군가 경찰에 신고한 것 같았다. 다급해진 프로듀서는 문을 쾅쾅 두드렸다.

 

“치하야! 누구나 행복해질 자격이 있어. 그러니 제발 이제 다시 찾은 행복을 놓치지 마!”

 

인터폰으로 치하야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치하야가 무슨 말을 해주길 바라며 기다렸지만, 치하야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어느새 제복을 차려 입은 경찰 둘이 다가왔다. 프로듀서는 다급히 명함을 꺼내려 했지만, 다급하게 오느라 차에 두고 온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제가 명함과 지갑을 차에 두고 와서... 전 765 프로덕션 소속 프로듀서입니다. 현재 담당 아이돌이 집 안에 있어서... 제발 선처 부탁드리겠습니다.”

 

“신분 확인이 안 된다고요? 그렇다면 서까지 동행하셔야겠습니다.”

 

“차에 지갑을 두고 왔습니다. 내려가서 보여드릴 테니...”

 

“죄송하지만 저흰 선생님 말씀만 믿을 순 없습니다.”

 

경찰들이 연행하려고 하자, 프로듀서는 경찰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치하야! 제발 내가 겪었던 슬픔을 네가 겪게 둘 수 없어. 넌 계속 노래할 수 있어!”

 

“이 사람이! 당장 연행해!”

 

프로듀서의 절규에 치하야는 귀를 틀어막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프로듀서는 경찰에게 끌려가면서도 닫힌 문을 향해 소리쳤다.

 

“제발! 다시 노래 부를 수 있게 도와줄게! 난 네 프로듀서잖아!!”

 

프로듀서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닫혀있던 문이 쾅 소리와 함께 갑자기 열렸다. 그리고 단호한 표정의 치하야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사람은 제 프로듀서입니다. 당장 놔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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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마지막 장면에서 치하야 박력....*o*

그리고 내일은 제가 일이 있어서 못 올리고, 토요일에 19편과 20편 동시에 올리겠습니다.

많은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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