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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다 아리사의 회고록

댓글: 18 / 조회: 2349 / 추천: 15



본문 - 04-04, 2017 03:20에 작성됨.

* 마츠다 아리사는 원래 아버지가 아이돌 매니아여서 같이 라이브를 따라다니다 아이돌 매니아가 되었다는 것이 공식 설정입니다. 아래의 내용은 그 공식 설정과 다르지만, 캐릭터의 큰 틀에서 변화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점 유의해서 읽어 주세요.
* 하루카의 스토리는 애니마스를 기반으로 약간의 오리지널을 가미했습니다.
* 연예계에 대한 서술은 현실처럼 보이지만 알게모르게 가공을 넣었습니다. 하지만 위화감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중간 삽화에는 기어룽(@GearOong)님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내레이터: 키쿠치 마코토]
 
3월 X일. 도내 어딘가의 스튜디오에서 우리는 아주 특별한 촬영을 하기로 했다. 평범하게 암막을 뒤에 세웠지만, 아주 편안한 의자가 놓여 있는데다가 제작진도 주섬주섬 도시락통을 꺼내고 있다. 누가 봐도 평범한 촬영은 아니다.
 
분위기가 풀어질 때즈음 오늘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낸다. 오늘은 그녀답지 않게 머리를 틀어올려 묶고 있다. 늘 입고 다니던 교복이 아니라 제대로 된 캐주얼 룩. 765 프로덕션의 아이돌, 마츠다 아리사이다.
 
 
[반갑습니다.]
 
"아, 네. 잘 부탁합니다. 마츠다 아리사입니다."
 
언제나 하이텐션이던 그녀는 오늘은 유달리 침착한 목소리이다. 제작진의 질문에도 그녀는 담담하다.
 
[마이크 볼륨 안 줄여도 되겠네요.]
 
"아하하하하하하! 오늘은 프로듀서님이 조용해 달라고 하셔서요. 그리고, 큰 목소리로 할 만한 이야기도 아니고요."
 
[비밀 이야기 하는 거 같네요.]
 
"그러네요. 말이 이상하네. 진지한 이야기니까요. 아리사도 진지할 때가 있다구요?"
 
[네. 오늘은 진지한 이야기죠.]
 
"진지한 이야기죠."
 
오늘 제작진이 긴 촬영에 대비한 이유. 아리사가 차려입고 나와서 편한 의자에 앉은 이유. 모든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아마미 하루카에 대한 회고를 하기 위함이다. 아무도 잘 알지 못하는, 팬의 관점에서.
 
 
 
[제작기획: 765 프로덕션]
 
[아마미 하루카 - 마츠다 아리사의 회고록]
 
 
 
아마미 하루카. 우리 765 프로덕션의 두말하면 잔소리인 리더이며, 수 년 동안 765 프로덕션을 이끌어 온 간판 아이돌. 지금은 단독 공연만으로 일만 명 규모의 회장을 너끈히 채우지만 그런 하루카에게도 당연히, 무명 시절이 있었다.
 
[우선 그거 한 번 꺼내 보시겠어요?]
 
"아 네. 이거요?"
 
제작진의 요청에 아리사는 선뜻 카드 하나를 주머니에서 꺼내서 보여 준다. 익숙한 카드에 적혀 있는 생소한 숫자. 일련번호 칸에 No.6이라고 적혀 있는 아마미 하루카 팬 클럽 카드. 벌써 버전이 네 번이나 바뀌고, 일련번호는 이미 일곱 자리를 갱신한 팬 클럽의 카드이다. 자주 꺼내서 보여줬는지 카드 테두리의 인쇄가 조금씩 벗겨져 있다.
 
"아리사... 아니 제가, 언제 어딜 가던지 꼭 가지고 다니는 카드에요. 제 초심이고, 제 중심이니까요."
 
마츠다 아리사. 세간에는 아이돌이라면 모두 좋아하는 오타쿠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사실 그녀도 중학생 시절에는 평범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평범했죠. 당연히 꿈 같은 것도 없었고 그냥 주변에 반 친구들이 메이저 아이돌, 당연히 남자였죠, 메이저 아이돌 그런 데 따라다니고 그러면 그런 연예인도 있구나 하면서 가끔 TV에서 나올 때 얼굴을 알아보는 정도였어요. 그래도 TV는 많이 봤던 것 같아요. 애들이 아이돌 얘기를 하도 하니까 저도 관심이 생긴 거죠. 연예 뉴스도 보고, 예능 프로그램도 보고, 그냥 집에서 가족이랑 같이 M스테* 같은 거 보는 그런 애였던 거 같아요.
 
(M스테: 뮤직 스테이션. TV아사히에서 방송하는 장수 음악방송 프로그램)
 
근데 그 때 이제 기억나는 게 그 때, 학교 경음악부 애들이 반쯤 아이돌 그런 취급이었단 말이에요. 막 여자애들이 따라다니고 그런 건 아닌데 지난 공연 멋졌다고 입소문이 나는 수준? 그 애들이 아키하바라에 쪼그만 공연장 빌려서 라이브를 한다는 거에요. 애들이 같이 갈래 이러기에 할 일도 없고, 갔었죠. 아키하바라 가 본 게 아마 그 때가 처음이었을 거에요. 그래서 아키하바라 갔는데 너무 일찍 갔는지 아직 걔들 대관 차례가 아니었던 거에요. 그 때 이제 봤죠. 먼저 공연하고 있던 사람을."
 
[아마미 하루카요?]
 
"처음엔 그런 줄도 몰랐죠. 그냥 이상한 의상 입은 사람이 무대에서 노래 부르고 있구나 싶었어요. 그 때 영상 있죠? 제 기억에 뒤에서 코토리 씨가 찍고 있었던 거 같은데."
 
["좀 더 멀리까지 헤엄쳐보고 싶어~"]
 
"푸하하하하하! 와 저거 진짜... 저걸 저장해 놓았어요?"
 
아키하바라 지하의, 어딘가에나 있을 법한 조그마한 공연장. 아마미 하루카가 시작의 시작을 하던 때. <태양의 젤러시> 첫 공연이다.
 
"그 왜, 지금도 제 버릇이긴 한데, 공연 같은 걸 볼 때 사람 얼굴 표정을 본단 말이에요. 제가 공연하는 입장이라도 공연을 보는 입장에서라도. 저 진짜 처음 봤거든요. 노래하는 사람 자주 본 건 아닌데 그 사람 표정이..."
 
[표정이?]
 
"완전 빛났어요오오!!! ...라고 말하면 거짓말이죠. 불안했어요. 진짜로. 그 때는 제대로 안무도 없던 때였고 노래도, 그러니까 전문적인 관점이 없어도 아 이 사람은 못 부르는구나 잘 부르는구나 하는 느낌이 있잖아요. 진짜 못 불렀어요. 음정이니 뭐니 전문적으로 안 들어가도 진짜 못 불렀어요. 그런데 표정도 이게, 내가 열심이다! 이런 게 아니라 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표정 같은 거? 불안한 표정 딱 그거였어요.
 
네. 첫 인상은 그거였어요. 금방 잊었죠. 그 뒤에 경음부 애들도, 지금 보면 완전 초보들이었지만 그래도 애들이 엄청 환호해 주니까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했으니까요. 지금 생각하면 아깝기 그지 없는 만남이었죠. 당시에 입고 있던 의상을 직접 보고, 당시에 녹음했던 노래를 직접 들어봤지만 말이에요."
 
765 프로덕션의 첫 번째 아이돌. 그리고 첫 번째 노래. 첫 번째 공연장. 모두가 미숙했던 그 곳에서 노래하던 한 사람. 하지만 역시 첫 공연의 반응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공연 딱 끝났을 때도 뭐랄까, 그렇죠. 그냥 거기 모인 몇 사람이서 박수 쳐 주는 분위기. 그래도 곡 자체는 좋았으니까요. 그 뒤에 했던 경음부 공연도 기억이 안 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첫만남은 거기까지밖에 기억이 안 나네요. 그 뒤에도 뭐 두고두고 인상이 남았다던가 그런 것도 아니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루카의 팬이...]
 
"그리고 나서였죠. 이번에는 신주쿠에서 무슨 이벤트가 있다는 거에요. 그 때 무슨 팬미팅 이벤트라고 했나? 저는 관심 없었는데 그 친구가 초대권 주면서 꼭 오라기에 그냥 따라서 갔죠."
 
[친구분 잘 따라다니셨네요.]
 
"아하하... 저답지 않죠? 그 땐 그랬어요. 근데 저는 그 아이돌 잘 알지도 못했고 그냥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서 문자만 주고받다가 역 앞에서 친구랑 헤어졌는데, 지금도 그렇죠? 그 역 앞에. 노상 라이브. 근데 그 길가에 말고 계단 내려가서 철로 아래로 가는 길이 있어요. 거기도 꽤 큰 광장이 있는데, 거기서 또 그 사람을 본 거에요."
 
어인 일에서인지 아마미 하루카는, 그런 공연을 하고 나서도 또 신주쿠에 나와 있었다. 그리고 역시 이번에도, <태양의 젤러시>이다.
 
["쫓아가면서~ 도망치는 척 하면서~"]
 
"맞아요 딱 저거에요. 잘 보면 저기 저도 찍혀 있는데 사람들이랑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냥 휴대전화랑 공연이랑 번갈아 보고 있었어요. 저 때 어땠냐면 아까 곡이 좋았다고 했죠? 그래서 그 곡은 기억에 남은 거에요. 같이 연쇄작용으로 얼굴이랑 의상도 기억나고. 근데 그 때는 의상도 아니었죠."
 
의상도 입지 않고 그대로 교복을 입은 채로, '아마미 하루카 신주쿠 노상 라이브'라는 조그마한 입간판만 세워 놓은 아주 초라한 라이브.
 
"그 때도 이제, 한 곡 끝나면 그 뒤로 신청곡을 받거나 커버곡을 하는 식이었는데, 곡이 끝나면 사진 찍고 있던 코토리 씨가 전단지를 들고 나타나서는 아마미 하루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하면서 다 나눠주고. 그럼 그 전단지 다 손에도 못 가요. 면전에서 구기는 사람은 없는데, 아예 안 받겠다는 제스처 있잖아요. 차마 그럴 수는 없을 거 같아서 한 장 받았는데, 나름 CD도 팔고 그러는 거에요. 나중에 그 CD가 그냥 사무실에서 손으로 복사한 CD였다는 걸 알았지만. 그거 한 장도 안 팔렸대요. 당연한 얘기겠죠.
 
그래도 교복을 입고 있다는 건 좀 눈에 들어왔었어요. 이젠 정말 얼굴이 엄청 반짝여요오오오오!!! ...까지는 아니었고 여전히 불안했고 여전히 못 불렀는데 그래도 이전보다는 나아진 느낌? 그랬죠. 뭔가 춤도 가볍게 추는 거 같았고?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싶었어요. 저런 사람도 노래를 부르는구나. 이 신주쿠 사람 많은 데서. 그런 생각만 들었죠."
 
무관심한 신주쿠의 인파 속에서 꿋꿋이 노래를 불렀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누가 봐도, 저러다 말겠지 싶은 여자아이였다.
 
[그럼 그 카드는 언제 받은 건가요?]
 
"그러고 한 달쯤 되니까 TV 애니메이션에 친구들이 빠져 있기에 또 친구 따라서 아키하바라를 다시 갔었는데, 굿즈 몇 개 사고 나서 역 앞에서 친구랑 헤어졌는데 시간이 좀 남은 거에요. 저녁 때까지만 돌아오면 될 거 같아서 그냥 아무 데나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그 때가 뭔가, 진짜 운명적인 순간이었죠. 우연이 여러 번 겹치는 순간 같은 거요. 그 때 딱 보였던 거죠. 라이브하우스 문 앞에 붙어 있던 포스터가.
 
이제 얼굴 두 번이나 본 거잖아요. 게다가 입장도 공짜인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냥 문 열고 들어갔어요. 그랬더니, 의상을 입은 그 사람이 보이는 거에요. 그리고 그 때 깨달았죠. 제가 아까 그냥 기억에서 지웠다고 했나요? 아니었어요. 지운 게 아니라 인상이 옅게 박혀 있었던 거에요. 못 하더라도 표정이 안 좋더라도 금방 그만둘 것처럼 보이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
 
["갑자기~ 얼굴이~ 빨갛게 돼서~"]
 
여전히 무대에 선 하루카의 표정은 불안하다. 하지만 이제는 발성도 훨씬 안정되고, 안무도 동작이 크다.
 
"그리고 그 옆에서 빨간색의 펜 라이트를 흔들고 있던 어떤 아저씨도 있었죠. 빨간 펜 라이트 들고 있는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었는데, 그냥 다들 서서 팔짱을 끼고 있었거든요. 저도 그랬죠. 그냥 노래하는 걸 들어 주는 게 더 좋을 거 같다고 생각해서요. 펜 라이트가 하도 밝아서 자꾸 눈에 띄었는데 또 거기 따라서 무대에 있는 그 사람도 시선이 흔들리고... 그 때 제가 아직 일반인이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모습이 뭔가, 엄청 싫지는 않은 느낌? 그런 거 있잖아요. 완전 동조하고 싶지도 않은데 완전 싫어서 피하고 싶은 것도 아닌 거. 그런 느낌이었어요. 아저씨가 일반적인 소위 그... 매니아의 옷차림을 안 한 것도 있고요. 으흐흐흐하하.
 
근데 맨날 하던 그 곡 끝나고 나서 갑자기 그 사람이 무대에 우뚝 서더니,"
 
["여러분! 신곡입니다! 오늘 처음 해 보는 거지만, 잘 부탁드려요!"]
 
"라고 하더니 그 곡을 부르는 거죠."
 
["<소녀여 큰 뜻을 품어라!!>"]
 
<태양의 젤러시>, <소녀여 큰 뜻을 품어라!!>가 포함된 아마미 하루카의 데뷔 싱글. 여전히 765 사무실에서 손으로 복사한 음반이지만, 저작권협회에는 제대로 등록되어 있는 앨범이다. 당시에 몇 장을 복사했는지 알 수 없어서 정확한 판매량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확실한 건 팔리기는 했다는 것.
 
 
"그 목소리. 제목. 가사. 아무 꿈도 없던 저. 누구보다 힘차게 펜 라이트를 흔들던 옆의 그 사람. 생각없이 따라만 다니던 아키하바라. 신주쿠. 말했죠 그 때. 아직 부족했다고. 하지만 분명히 나아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포기하지 않았다는 거. 그 때 깨달았죠. 아 이 사람, 나 같은 거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구나."
 
F랭크였지만 아직 랭크 업 페스도 머나먼 일이던 그 때 봄의 지하 공연장. 아리사는 몰랐겠지만, 그 이벤트는 새로운 싱글의 발매 기념 이벤트였고 입장료도 버젓이 받았던 공연이었다. 운이 좋았다고, 아리사!
 
"곡이 끝나니까 짧게 질문과 토크가 이어졌고 사실 그거까지 기억나진 않아요. 끝나고 나서가 중요했는데, 아마미 하루카의 팬 클럽을 모집한다고, 그 아저씨가 크게 외쳤었거든요. 지금이야 소속사에서 직접 만들고 홈페이지도 요즘은 SNS 연동으로 하고, 가입 데스크도 따로 있고 그러지만 그 때는 그런 거도 없었죠. 아직도 그 모습 기억해요. 유니클로에서 팔 거 같은 스웨터 안쪽에 남방을 입고 있던 사람. 가방을 주섬주섬 뒤지더니 웬 빨강색 네모가 많이 그려져 있는 종이를 꺼내시고는 가입하고 싶은 사람은 목록에다 이름을 적어 달라고 하더라고요. 그 되게, 홀렸다고 해야 하나요. 그 조그맣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 백 명은 들어갈 거 같은 공연장에 여중생이라곤 저뿐이었는데. 이름이랑 연락처랑 주소까지 다 적어가지고는 그 아저씨가 가위로 잘라 주는 카드를 받았어요. 제가 다섯 번째로 이름을 썼고 그래서 번호는 6번이었어요. 아저씨가 1번이었으니까. 인쇄도 아니고 매직으로 그냥 번호를 적었죠. 그 때 그 사람이 무대에서 내려오더니 직접 관객들이랑 악수도 하고 CD에 나름 사인도 해 주는 거에요. 와 주셔서 고맙다고. 다음에도 와 달라고."
 
[그 때 CD 갖고 계시죠?]
 
"아하하... 그거 765 본사에도 한동안 없던 물건이라서 그거 있는 서랍장만 자물쇠 채워 두고 그랬었는데 그래서 오늘 들고 올 때 되게 조심해서 들고 왔어요. 이거 지금 경매에서 20만 엔 정도 하는 거에요. 집에 소장품으로만 방이 하나 꽉 차 있는데, 이게 제 1호 소장품입니다."
 
아직은 서툰 아마미 하루카의 사인. 그리고 사무실에서 직접 그래픽 소프트웨어로 만든 앨범 커버. 100엔 샵에서 팔던 CD 케이스. 스티커 종이를 잘라서 붙인 CD. 모든 것이, 어설프고 두렵던 시절. 하지만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리사가 말한 것처럼 포기하지 않는 그 마음이었다.
 
"그 때부터 친구들을 안 따라다닌 거 같아요. 지금도 그렇잖아요. 무슨 이벤트 있으면 바로바로 문자 오는 거? 그 이벤트 뒤로 공연을 되게 자주 하더라고요. 달리 동아리활동 같은 거도 안 했고 부모님도 그런 덴 관대하신 편이었어서 그런지 정말 뻔질나게 아키하바라를 들락날락했던 거 같아요. 아, 맞아, 하하하하하, 맞아. 그 때는 티켓값이 쌌구나. 그러니까 용돈으로도 다니고 그랬었죠."
 
[그러니까 아마미 하루카가 첫 아이돌이었다?]
 
"첫 아이돌이었죠. 그것도 정말 엄청나게 밑바닥부터 시작한, 첫 아이돌. 그 때 그 팬클럽 아저씨들 따라서 여기저기 많이 다녔어요. 다들 신기해하시더라고요. 어쩌다가 여기 오게 됐냐, 이치오시*가 누구냐... 하루카가 첫 번째인 사람은 거의 없었던 느낌. 다들 다른 아이돌 이벤트에도 많이 다니고 그러시더라고요. 그 때 알게 됐죠. 이렇게 못 부르고 어설프더라도,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구나. 예전 같았더라면 이런 분들이랑 상종도 안 했을 거 같은데, 그 때는 제가 달라졌었죠. 실력이 아니라 끝없이 노력하는 그 마음을 좋아하는 거라고. 순수함과 가능성. 빈말로라도 멋있게 생겼다고 할 수는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순수함을 동경하는 순수한 사람들이라고 할까나. 아하하하하. 뭔가 포장하는 느낌이네요.
 
(이치오시: 오타쿠 용어. 가장 첫 번째로 밀고 있는 아이돌을 말한다)
 
그래서 그 여중생은 팬클럽 넘버가 1000이 넘어갈 때까지, 플라스틱 팬클럽 카드가 나올 때까지 하루카쨩 이벤트만 따라다녔어요."
 
[이제 하루카라고 하시네요.]
 
"그 때부터 진짜 팬이 된 거니까요. 우연이 겹쳐서 운명까진 아니더라도, 인연이 된 거죠. 아니 운명이라고 할래요. 하루카쨩은 정말 제 인생의 전환점이었으니까요."
 
인생의 전환점. 각자가 그랬을 것이다. 765 프로덕션의 첫 번째 아이돌의 첫 번째 싱글 앨범. 그리고 그 곳에서 인생을 바꿀 인연을 만난 한 사람. 그녀에게 하루카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E랭크 랭크업 페스 때였을 거에요. 그 AIRA 심사위원들이 점수 매기는 거 중에 팬들의 반응도 있잖아요. 그래서 그 때 팬클럽 회장님, 그러니까 아까 그 때 팬클럽 가입 권유하시던 분이 최고로 응원해 줍시다! 하고 팬클럽을 있는 대로 모았는데 관객이 100명? 정도밖에 안 모인 거에요. 이래서 랭크업 하겠나 싶었지만 일단 공연은 해야겠고 어떻게든 이 인원으로라도 도와주자 싶어서 결국 공연이 시작이 됐었는데, 아 그 때 정말 팬클럽 회장님 대단했어요. 거의 한 명이서 쉰 명 어치 함성을 지르는 거 같은. 같이 있던 아저씨들도 지지 않도록 소리를 질렀지만 어찌나 목청이 크시던지. 저도 그 때 회장님이 나눠주신 펜 라이트 들고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는데 그 때 하루카쨩이 그랬죠."
 
["여러분, 알고 계시나요? CD 발매 이벤트 전에도 몇 번 라이브를 했다는 걸?"]
 
"에?"
 
["네에에에에!!!!"]
["첫 라이브 때, 밴드부 공연 직전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제 또래 여학생들이 많이 보아더라고요."]
["그 때는 마음도 제대로 다잡지 못했던 때라서 내가 그만뒀다면, 그냥 저렇게 공연장에서 밴드부 공연을 기다리는 평범한 학생이었을까 하고 생각했었어요. 어떤 여자애를 보기 전까지는."]
 
"아아아아아아?! 저거 뭐에요! 저게 영상으로 남아 있어요?"
 
아리사가 오기 전에 765 프로덕션의 영상 담당은 코토리 씨였다구? 레슨도 찍으려고 어찌나 열심이었는데...
 
"어째서 아리사... 저한테 말하지 않은 거에요! 으으... 부끄러워..."
 
["아하하, 사실 별로 대단한 얘기는 아니에요. 그 여자애는 공연 보러 온 여자애들이랑 같이 있었는데 계속 제 쪽을 보고 있는 거에요. 그냥 제 착각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정말 그 공연에서 유일하게 제 노래를 제대로 들어 준 사람이었다고 해야 하나... 덕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했던 것 같아요."]
["오오오오오!!"]
["어쩌면 그 한 사람부터, 발매 이벤트 때의 열 사람, 그리고 지금의 이 많은 분들이 모이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하고... 계속 노력하자고, 생각했어요."]
["후우우우!!"]
["아직 갈 길은 멀지만 한 걸음을 내딛는 지금. 노래할게요. <START!!>"]
 
"으으으... 오타쿠에게 가장 중요한 인지*의 순간이었는데..."
 
(인지: 오타쿠 용어. 오시에게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는 것을 말한다)
 
["우! 하이! 우! 하이! 우! 하이! 우! 하이!"]
 
"저 때는 제대로 MIX*까지 했네요. 그 때는 평범하게 지하 아이돌이었으니... 지금은 인지도가 있으니까 자제하는 거 같지만 하하하... 재밌었어요."
 
(MIX: 오타쿠 용어. AKB48에서 처음 시작한 간주 부분에 들어가는 독특한 콜)
 
"네. 저 때 제가 정말 운명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하루카쨩한테 인지받다니! 하는 간단한 이유도 있었지만요..."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곳에서 자기를 보아 주던 유일한 관객. 그것이 착각이었을지라도, 그것이 진심이 아니었을지라도 하루카는 분명히 거기에서 용기를 얻었다. 그 한 명이 없었다면 지금의 하루카는, 어쩌면 볼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엄청난 거구나. 팬의 존재가 정말로 아이돌한테 용기를 줄 수 있는 거구나. 나도 누군가한테 용기를 줄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그게 착각이었다 하더라도, 하루카쨩이 본 사람이 제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저였지만요! 하하하, 하여튼 그건 정말 대단한 깨달음이었어요."
 
[그 때부터였군요?]
 
"그 때부터였죠."
 
마츠다 아리사의 블로그는 아마미 하루카 팬, 그리고 765 프로덕션 팬들에게 있어서는 성지 같은 곳이었다. 뉴스가 올라오자마자 바로 정리글을 올리는 정성은 물론이고, 라이브 이벤트에는 빠지지 않고 참가해서 상세 분석 및 감상글이 그 날 저녁에 바로 올라와서 속도와 질 모두를 충족하는 블로그로 유명했다. 765 프로덕션에서도 겉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아리사의 분석을 실제 기획에 참고하기까지 했었다.
 
"당시에 이벤트 다니던 분들한테 아이디를 가르쳐 줘서 전성기 때는 진짜 거대한 아이돌 마토메* 사이트 같은 게 됐었죠. 블로그도 재밌었어요."
 
(마토메: 특정 주제에 대한 기사 등을 모아(纏め) 놓는 사이트. 혼자서 운영하기보다는 팀을 꾸려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때쯤 다른 아이돌들도...?]
 
"사실 하루카쨩 팬클럽 가입하자마자 다른 아이돌 이벤트도 엄청 많이 다녔죠. 덕분에 한 자릿수까진 아니지만 두 자릿수 팬클럽 카드도 집에 엄청 많아요. 다들 메이저 가고 그러면 되게 뿌듯하고, 괜히 제가 키운 거 같고... 그렇게 변하게 된 계기가 그 때 E랭크 랭크업 페스였던 거죠. 되게 사소하고도 큰 계기였고 아직도 그거만큼 큰 터닝포인트는 없었던 거 같아요."
 
[그 뒤로 팬클럽 활동 자체는 어떻게 했나요?]
 
"음... E랭크가 되고 나서는 흔한 아이돌 성장 루트랄까, 어디 가게에 이미지걸 같은 데도 걸리고, 그럼 또 거기 가서 난리 피러 다니고... 지역방송 광고 같은 것도 찍었었죠. 그럼 또 거기 현장 가고... 미친 거 같았어요. 그 때쯤 2번에서 5번까지 아저씨들은 다른 오시 찾아서 떠나 버리시고 사실상의 2호 회원이 저였으니까, 알 수 없는 책임감까지 느껴졌었어요."
 
[책임감이라.]
 
"중간중간에 뭐, 올스타 라이브도 꽤 큰 공연장에서 했었고, 처음으로 티켓캠프* 암표값이 정가를 넘겼어서 기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었고, 수십 장의 앨범을 사서 라이브에 응모했는데 결국 전부 떨어진 일도 있었고... 하루카쨩도 랭크가 높아지면서 팬덤 안에서 별 일이 다 있었고...
 
(티켓캠프: 개인 간 티켓 판매 중개 사이트)
 
그리고 고등학교에 들어갔어요. 마토메에서 들어오는 광고수입도 두둑해서 당분간은 돈 걱정도 없겠다, 진짜 재시험 치지 않을 만큼만 공부하고 모든 걸 아이돌에 쏟아부었죠. 나름 수익활동이라고 부모님 막 설득하고. 마토메 광고수입 자체로 아버지보다 많이 들어온 적도 있었어요. 물론 필진 분들한테 나눠드려야 했지만. 그거 전부 이벤트 가는 데 썼죠... 그 때쯤이었던 거 같네요. 엄청 회의가 느껴졌을 때가."
 
큰 일들. 아이돌 기획사 연합 대운동회, 올스타 라이브, 처음으로 따낸 레귤러 방송 기획 <생방임까!? 선데이!>, 시죠 타카네에 얽힌 스캔들, 그리고, 치하야의 갑작스러운 <생방임까> 하차. 그 때의 심정을, 팬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을까.
 
"언론사에 연줄이 닿아 있는 필진 분한테 먼저 연락이 왔어요. 키사라기 치하야한테 이렇게저렇게 소문이 돈다더라. 처음엔 타카네쨩 때처럼 헛소문인 줄 알았는데 또 제가 그, 네, 아이돌 레이더란 게 있었거든요. 맨날 레이더라고 말하지만 지인들의 네트워크죠. 슬슬 트위터에도 소문 올라오고 주인장이 765 팬이란 거 아니까 마토메도 댓글이 폭주하고...
 
화 났죠. 일단 그런 과거가 너무나도 터무니없었던 데다가 유출된 사진도 조잡하기 그지 없었거든요. 그래서 그 때 제가 실수를 했었죠. 아무리 봐도 조작이고, 키사라기 치하야가 그랬을 리가 없다. 그런 류의 기사는 우리가 싣지 않을 거다. 마토메 공식 트위터로 그런 말을 했고, 결과는 뭐, 아시겠죠."
 
팬들 입장에서는 믿을 수가 없었던 키사라기 치하야의 과거. 그리고 점점 사실로 드러나는 충격적인 사건들. 암울한 가정사가 드러나고, 치하야는 한 번도 망치지 않았던 라이브를 완벽하게 망쳐 버렸다. 765 프로덕션 자체의 신뢰도도 떨어지고 있었다.
 
"2차 가해라고 하죠. 아픈 기억을 만들게 하는 것 다음으로 당사자한테 고통을 주는 게 아픈 기억 자체를 부정하고 축소하려는 외부의 2차 가해에요. 소문 퍼지던 당시에 기사 쓰려고 하루카쨩 이벤트를 나갔었는데 딱 하루카쨩 표정이 진짜 그거였어요. 정말정말정말 너무 힘든데 일단 웃어야 하는 거. 아이돌의 고통이거든요. 아무리 힘들어도 팬들 앞에서는 웃어야 해요. 팬들한테 용기를 줘야 하니까.
 
근데 그 상황 자체가 뭐랄까, 진짜 일단 하루카쨩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너무 미안하고 또 너무 회의가 드는 거에요. 내가 진짜 데뷔할 때부터 봐 왔고 나름 진짜 2호 회원인데, 내가 지금 하루카쨩한테 해 줄 수 있는 게 그냥 이벤트 나와서 자리 채우는 거밖에 없나. 지금 나간 것도 그냥 의무감 때문에 나간 거지, 진짜로 내가 하루카쨩을 좋아하긴 하는 건가, 아이돌 덕질해서 돈 벌어 먹고 살려고 하는 거 아닌가, 트위터에서 실언 해서 그 먹고 살 길도 끊기게 생겼고, 별 생각이 다 나는 거에요. 그래서 그 때 토크 보는 거 너무 고통스러워서 중간에 나왔어요.
 
진짜 상황 좋게 비가 왔었거든요. 물론 우산이 있었지만. 아키바에 비 오면 어떤지 아시죠? 진짜 사람 많은데 비까지 오니까 걸음 자체가 느려요. 그래서 생각을 진짜 많이 했어요. 앞에서 말한 2차 가해에 대해서요. 내가 한 말이 결국 2차 가해였구나. 아이돌을 좋아한다면서 결국 그 마음이 지나쳐서 아이돌한테 상처를 주게 됐구나. 그러니까 이제 마토메에 썼던 수많은 비판 섞인 감상글도 생각이 나고. 내가 정말 아이돌을 사랑하긴 하는 걸까.
 
그 때 아키바역 개찰구 앞에서 비 피하면서 트위터 보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 익숙한 아저씨가 오는 거에요. 팬클럽 1호 아저씨. 진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저한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는 거에요. 가뜩이나 몇 달이나 연락도 없어서 뭔 일 있나 싶었는데. 그 때 걱정이랑 쌓인 감정이랑 섞여가지고, 막 울면서 털어났어요. 이렇게 되는 동안 뭐 했냐고, 팬클럽 차원에서 뭐라도 해야 하지 않냐고. 팬클럽 회장은 이미 다른 사람이었지만, 어, 제가 할 뻔도 했는데 거절했어요. 할튼 그런 것도 상관 없었어요. 그냥 울분을 쏟아낼 곳이 필요했어요. 아무한테도 그런 말은 못 했으니까."
 
아리사가 우리에게 해 준 말은 사뭇 놀라웠다. 당시에는 SNS의 반응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의 해결책을 찾기에도 너무 바빴었다. 하지만 팬들이 느낀 감정은 우리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때 1호 아저씨가 그렇게 말했어요. 하나도 잘못되지 않았다고. 우리의 역할은 잘못된 것을 고칠 수 있도록 하는 거라고. 그 때는 몰랐어요. 또 대들었죠. 이제 그럴 수 없다고. 전부 끝났다고. 그리고 개찰구 찍고 펑펑 울면서 전철 탔죠. 되게 애니메이션 같죠. 그 때 오타쿠 문화에 좀 빠져 있었나 봐요. 중학생도 아닌데 중2병 같이... 하하...
 
전철 타고 오면서 이제 아이돌 덕질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만 계속 했어요. 누구보다 친했던 치하야쨩이 연예계에서 매장당했는데 하루카쨩도 제대로 활동을 할 수 있을 리가 없고, 하루카쨩이 없으면 제가 더 이상 아이돌 덕질을 할 의미가 없었으니까요. 되게 웃기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도움 하나도 못 주는 사람 때문에 그렇게 인생이 좌우되다니. 이제 조금 더 아리사한테 집중하자. 고등학교 1학년이니까 슬슬 이제 미래를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닐까. 언제까지 마토메 사이트로 돈 벌겠어. 대세는 SNS인데.
 
집에 돌아와서 저녁도 거절하고, 그 때 처음으로 부모님한테 큰 소리 쳤어요. 방에 들어와서 가방만 던져 두고 그냥 무의식적으로 컴퓨터 켜 보니까 트위터 분위기가 좀 다른 거에요. 지인들한테도 라인이 여러 개 와 있고. 그러니까 요약하면, 타카네 때처럼 조작이긴 한데 몇 개는 사실이라더라. 근데 결론적으로 치하야는 잘못 없다더라. 단편적으로 말 듣기만 했는데 그런 거 있잖아요. 그냥 이 때까지 했던 생각이 전부 씻겨내려가는 느낌. 그래서 있는 연줄 다 끌어들여서 조사를 했어요. 그리고 결론을 보는 순간 또 울어 버렸죠. 산전수전 다 겪은 오타쿠도 별 수 없었어요."
 
믿을 수 없는 진실. 그리고 그 위에 교묘하게 씌운 거짓. 모든 것이 치하야에게 불리했지만 그 거짓이 밝혀지는 순간, 여론은 기적적으로 반전되었다. 언론들은 연달아 정정보도를 내었고, 마츠다 마토메도 장문의 사과문을 게시하였다.
 
"몇 개 기사 쓰신 분들이랑 지금도 연락하는데 그 때 자기도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몰랐다고 하더라고요. 미안하게 됐다고. 미안하다고 그 때 치하야쨩이 받은 상처가 회복되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참았어요. 결국 우리가 떠안고 가야 하는 일종의 죄 같은 거였어요. 오타쿠들 사이에서 떠돌던 행동 강령 같은 게 다시 떠올랐죠. 어떤 일이 있어도 오시를 배신하지 말 것. 그 때는 뭐야 그 기분나쁜 강령, 하고 말았지만 결국 그 생각도 초심에서 벗어난 것이더라고요. 나의 존재만으로 아이돌은 힘을 얻는데. 누구에게라도 하루카쨩처럼, 처음의 한 명이 되어 주자고 다짐했었는데.
 
그리고 때마침 정례 올스타 라이브가 열린대서 팬클럽 선행 응모로 빠르게 정리번호* 두 자릿수 표 받고 갔었어요. 논란 도중에 열린 라이브였고 무엇보다 출연자 리스트에 키사라기 치하야가 있는 것만으로 암표값이 엄청나게 치솟았어요. 저는 지인한테 표를 양도받아서 갔지만 그 때 경쟁 엄청 치열했고... 논란 도중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논란이 거의 끝난 뒤기도 해서 다들 개운한 마음으로 갔었는데 여전히 치하야에 대한 의문점이 남아 있는 게 그거였죠. 라이브 실패한 이유가 목소리 안 나와서 그런 게 빼박인데 저건 정신적으로 문제 있을 때 저러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의사인 팬클럽 아저씨가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그 때 노래를 할 수 있다는 건 정신적으로 문제가 해결됐다는 뜻이니까 출연자 리스트에도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었어요. 근데 아직 논란이 안 잦아들었는데 노래 할 수 있다는 건가? 싶었죠.
 
(정리번호: 의자가 없는 스탠딩석이 있는 라이브 회장에서 입장 순서를 뜻하는 말)
 
그 라이브 세트리스트 진짜 괜찮았는데 솔직히 기억 하나도 안 나요. 나중에 집에 갔을 때 세트리스트 기억하냐고 지인들한테 물어봐도 다 단편적으로 알고 계셔서 기사 쓸 때 막 진술을 짜깁기해서 썼었죠. 다들 치하야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래서 반주 나오고 치하야가 딱 서 있는 거 보자마자 생각이 정지했어요. 근데 아무도 환호성을 안 지르는 거에요. 정말 거짓말처럼 아무도. 난 울트라 오렌지* 꺾었는데.
 
(울트라 오렌지: 오렌지색 대섬광 펜라이트. 1회용이며 한 번 꺾어서 빛을 내면 매우 밝은 오렌지색이 3~5분 정도 지속된다)
 
근데 노래 나올 때라고 생각했는데 노래를 안 해요. 반주는 흐르는데 목소리가 안 나오는 거죠. 여전히 못 이겨낸 거에요. 그 압박감과 손가락질을. 거짓인 게 거의 밝혀졌지만 이미 치하야를 수도 없이 할퀴고 간 말들을. 회장에서 수군거리는 소리 들리는데 다 입을 막아버리고 싶으면서도 다시 그 생각이 났어요. 결국 또 아무 것도 해주지 못했구나. 나는 너무나도 무력했구나."
 
무력함. 그리고 두려움.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아이돌을 만드는 것이다. 노래나 춤이 어설프고 불안하더라도, 설령 다시는 노래를 못 하게 될지라도. 하지만 역시 그것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 남아 있다. 혼자만의 생각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할 때는 그것을 끌어 올려줄, 동료가 필요하다. 하루카는 그렇게 무대 앞으로 뛰어나갔다.
 
 
"순간 소리를 빽 지를 뻔했어요. 하루카쨩 나올 때. 반주도 멈춘 그 때 그냥 노래를 냅다 부르기 시작하더라고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몰라서 넋이 나간 채로 하루카쨩 얼굴만 계속 보는데 그제야 조금씩 이해가 되더라고요. 연출도 뭐도 아니고 진짜 순수하게 도와주러 나오는 거구나. 뒤에 다른 765 애들도 줄지어서 나올 때 확신이 갔어요. 오, 그건... 안 울 수가 없겠더라고요. 진짜 펑펑 울었어요. 첫 번째 후렴구 부를 때까지."
 
[그리고...]
 
"네. 제가 거기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뿌듯하네요 지금도. 트위터에서는 장난식으로 야 치하야 목소리 돌아오는 거 못 본 사람도 있냐? 는 식으로 말도 하지만 그 때 받은 감동은 아직도 잊히지가 않아요. 물론 감동으로 치면 그 뒤에 요코하마 아레나에서 했던 올스타 라이브가 좀 더 감동이었지만... 당시에는 아이돌 오타쿠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었어요. 기적이 일어난 거죠. 거기 모인 이천 명 남짓한 관객 앞에서. 다른 사람들의 힘도 아닌 765의 아이돌쨩들의 힘으로. 하루카쨩의 힘으로."
 
["걸어가자~ 끝없는 이 길을~ 노래하자~ 저 하늘을 넘어~"]
 
"아... 지금 봐도 눈물 나네요 진짜. 아... 으. 잠시만요. 휴지 좀 주시겠어요?"
 
["우리 서로 약속해~ 꿈도 이룰 수 있어, 눈물을 닦고서~"]
 
"저 부분 정말 좋아해요. 자신의 이야기기도, 모두의 이야기기도 한 부분이. 또 제 이야기기도 했어요. 그만둘까 몇 번이고 생각했던 그 때 흘렸던 눈물 같은 거요.
 
끝나고 나서 뒷풀이에서도 진짜 아무도 말도 없이 음료수만 홀짝이고 밥만 먹고, 근데 침울한 분위기도 아니고, 되게 묘한 분위기였어요. 그런 거 있어요. 다들 할 말은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많은데 뭐라고 말을 표현하지 못할 때. 너무 갓라이브였을 때 그런 현상이 자주 일어나는데 뒷풀이 간 스무 명 정도 사람들이 다 그 상태였다니까요 크하하하...
 
뒤에 들어보니까 하루카쨩이 그 라이브 전에 몇 번씩이나 치하야쨩 집에 찾아가서 문까지 두드려 가면서 설득했다고 하더라고요. 지극 정성이죠. <약속>의 가사도 765 멤버들이 쓴 거였고. 그게 저희 마토메랑 뉴스랑 퍼지고, 각종 증언들이 나오면서 삽시간에 여론이 반전됐죠. 765의 동료애를 재조명하는 기사도 나왔었고. 원래 765는 동료애 하나만으로도 덕질거리 충분한 데였다구요오오!!"
 
갑자기 하이텐션으로 돌아올 만큼 흥분한 모습이다. 조금만 진정해, 아리사.
 
"그 뒤에는 정말 순탄대로였다고 해야 하나요. 페스 이벤트 갔을 때 치하야쨩 반주 안 나오다가 다시 나오던 것도 기억나고 언론 쪽에서 봄에 열리는 정기 올스타 라이브 레슨이 삐걱인다는 썰도 듣긴 했었는데 별로 의미 없다고 생각해서 넘겼었고요."
 
물론 그 때 우리는 엄청 힘들었지만, 팬들한테까지 영향이 안 갔다니 그것만은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 마츠다 마토메의 주인장까지 몰랐으니까 말이야. 마츠다 아리사가 들어오기 직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그 블로그의 주인이 여고생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맞아요 그 올스타 라이브. 하필이면 <생방임까>의 특별방송 BD에 응모권이 들어 있어서 응모비용이랑 경쟁률 모두 장난이 아니었었는데 솔직히 좀 너무한다고 생각했었어요. 특별방송도 제가 갔던 이벤트인데 다음 이벤트를 가려고 제가 갔던 이벤트를 또 봐야 한다니... 하지만 어쩌겠어요. 가야죠. 오랜만의 대규모였고 전원이 출연하고 신곡 출현 떡밥도 돌았으니까요. 하..."
 
[또 무슨 일 있었나요?]
 
"아뇨 그냥 너무 갓라이브였어서..."
 
[아...]
 
"진~~짜, 너~무너무 최고였어요! 아이돌쨩들 전부 반짝반짝 빛나고... 이게 그, 처음의 그 어설프던 모습이 전부 사라지고 이제는 완숙미까지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엄청 반짝였어요오!! 정말 최고로 즐겁게 즐기고 왔어요! ...한편으로는 저기 있는 하루카쨩이 100명 관객 겨우 모으던 그 하루카쨩이었던 걸까 하고 생각하지만요. 하지만 엄청 좋았다구요!! 아리사 그 때 최고로 즐거웠답니다! 아니 이 말은 아까도 했는데... 뭐 상관 없어요! 즐거웠어요오오!!!"
 
아리사의 눈이 평소와 같이 반짝인다. 아무래도 점점 가까운 기억으로 가다 보니까 텐션이 올라가는 모양이다. 하지만 회상도 막바지로 가고 하니까, 아리사도 그것을 아는지 다시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촬영도 거의 다섯 시간째. 아리사는 지치는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참고로 그 라이브에서는 <태양의 젤러시>, <소녀여 큰 뜻을 품어라!!>, <START!!> 모두를 공연했었다. 아리사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그 뒤의 우리들의 이야기는 뭐, 익히 잘 알려져 있으니 굳이 아리사가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만을 듣기 위해서 아리사를 초빙한 것이 아니었다.
 
"아까 얘기한 정기 올스타 라이브 끝나고 나올 때였어요. <우리들은 계속...이죠?>를 처음으로 듣고 머릿속에 새기면서 막 옆자리 사람들이랑 부르면서 나오는데 퇴장하는 인파 속에서 안녕하세요, 하고 또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유니클로 스웨터에 남방 입은 아저씨. 친절하게 팬클럽 카드까지 들어서 보여 주시더라고요. 교통카드에 붙인 저랑은 다르게 코팅을 하셨던데 어쨌든, 그 때 아마 팬클럽 넘버가 다섯 자리를 갱신했던 걸로 기억나는데 아주 심플하게 유성매직으로 No.1이라고 적혀 있더라고요. 저는 나름 엄청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갔는데 갑자기 그 아저씨가 정색을 하시는 거에요.
 
순간 좀 무서워져서 왜 그러시냐고 물어보니까 아주 정중하게 그 동안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마츠다 아리사 씨. 이러시더라고요."
 
아리사는 아무래도 남자 흉내는 좀 못 내는 것 같다.
 
"좀 괘씸했죠. 아무 것도 안 하던 인간이 1번 달고 이렇게 필요할 때만 나타나는 게. 그래서 퉁명스럽게 뭐가 고마운데요? 하고 물어보니까 대답 대신에 명함을 쓱 내밀더라고요. 진짜 기절초풍했는데 소리를 크게 지르면 들켜 버리고, 그 동안 궁금했던 모든 게 풀려서 엄청, 아,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뭔가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었어요. 그 명함 보는 순간 모든 게 말이 되더라고요. 제가 인생 오시 하루카 만나고 다른 아이돌도 덕질하면서 느낀 건데 아무도 그렇게 즉석에서 팬클럽을 모집하진 않거든요. 그것도 스스로 팬클럽 카드에 1번 적어놓지도 않아요. 어느 정도 인지도가 생긴 다음에 하는 거고 1번도 어떤 데는 막 추첨으로 정하고 그런단 말이에요. 하지만 명함을 보는 순간 모든 게 말이 되더라고요."
 
[지금도 갖고 계시죠?]
 
"물론이죠. 누구 명함인데."
 
['765 프로덕션 프로듀서 (모자이크), 연락처 (모자이크), 메일 (모자이크)']
 
"처음엔 그래서 홍보 담당이나 사무원 뽑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아직 학생이라고 거절하려고 했죠. 근데 아니래요.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저보고 아이돌 해 볼 생각 없냐는 거에요.
 
기가 차서. 저는 아이돌쨩이 반짝이는 걸 보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라고 답하니까 그런 당신이야말로 아이돌의 자질이 충분합니다, 하고 되받아치는 거에요. 아무리 봐도 거짓말하는 얼굴이 아니라서 진짜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죠. 그래서 도망치듯이 집으로 가는 전철을 탔는데 명함을 보면서 자꾸 히죽히죽 웃음이 나는 거에요. 생각해 보니까 이거 둘도 없는 기회잖아요. 그렇게 좋아하는 아이돌쨩을, 그것도 하루카쨩을 지근거리에서 볼 수 있다는 게. 집에 가서 거울을 보고 나서야 그게 너무 일차원적인 생각이었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서 그냥 인사치레로 한 말 같았어요. 6호 회원이 여고생이었고 나름 외모도 된다고 생각했나 봐요. 그래서 그냥 속는 셈 치고 아무도 못 가봤다는 전설의 765 프로덕션으로 갔죠. 미리 연락하고."
 
["잘 부탁드립니다! 마츠다 아리사, 16살입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저 영상은 또 언제 찍은 거에요!"
 
몇 번 말하지만 우리는 중요한 영상은 언제나 남겨 놓는다구? 특히 소속 아이돌의 첫 면접 영상이라면 무조건이야.
 
["취미는 아이돌 데이터베이스 수집이고, 어... 하루카쨩을 보고 싶어서 왔습...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하루카쨩!?!??!!?!?"]
["앗, 다, 당신은..."]
["하, 하루카쨩... 이거... 꿈이 아니겠죠?!"]
["데뷔 때부터 관객석에 있기에 귀여운 여자애구나 하고 언제나 생각했었는데 여기서 볼 줄은..."]
["히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인지에요! 인지라구요! 저를 알아봤어요 하루카쨩이!!"]
 
"그만! 그마아아아아안!"
 
[그럼 여기까지 보여드리죠.]
 
"휴우..."
 
[어쨌든, 그렇게 765에 들어온 거군요?]
 
"네. 나름 메이저 기획사고 체계적으로 레슨도 시키는 모양이었지만 역시 데뷔무대는 엄청 작더라고요. 오히려 저는 거기가 제 고향 같았어요. 아뇨. 제 고향 이상이죠."
 
[아키하바라 거기요?]
 
"설마 데뷔무대를 거기로 잡아 줄 줄은 몰랐어요. 졸업해서 뭐 하는지도 모르는 그 밴드부 친구들이 다시 생각나서 재밌었어요. 하루카 팬클럽 때 개인적으로 알고 있던 분들도 오시고, 저도 모르게 관객석에 뛰어들어 버려서 프로듀서님한테 주의도 들었었고요."
 
[그럼 하루카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네요.]
 
"그러네요. 과거 이야기는 여기까지가 되겠습니다. 하지만 저도... 아니 아리사도 있고, 극장의 다른 아이돌쨩들도 있고요! 이야기는 끝이 아니겠죠!"
 
모든 것은 끝나지만 그것은 시작이 되기도 한다. 하루카만을 보고 걸어온 사람이 또 다시 아이돌을 이어 나가기도 하고, 또 하루카도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다음 무대를 준비할 것이다. 모든 것이 서툴었던 그 무대를 생각하면서, 그 무대에서 하루카를 보고 있던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그 때의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그리고 동료들을 잊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제 2, 제 3의 아리사가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오늘 말씀 정말로 감사합니다.]
 
"네, 저도 감사했습니다!"
 
 우리도 지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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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미 하루카 - 마츠다 아리사의 회고록]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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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카 생일 딱 맞춰서 하려고 했는데 좀 늦었네요;; 하루카 생일 축하해!
 
 
그리고 6월 25일 어나더 스테이지에 나오는 개인지도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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