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나이트 - 우상偶像 후일담 + 후기

댓글: 4 / 조회: 712 / 추천: 0


관련링크


본문 - 06-21, 2017 17:57에 작성됨.

 “센카와 씨.”

 “왜 그러시나요, 프로듀서님.”

 “살려주세요.”

 타자를 치던 치히로의 손이 멈췄다. 울 것 같다가 화낼 것 같다가 한숨 쉬었다가, 다이나믹한 표정변화를 보이더니 내 책상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재빨리 에너지 드링크를 낚아챘다. 그 순간 치히로가 부모, 아니, 무언가의 원수를 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적당량은 마셔도 되잖아요. 프로듀서님만 힘든 거 아니에요. 저도 정말 죽을 것 같단 말이에요. 지금 대체 몇 시야……. 해도 해도 끝나지가 않잖아…….”

 이번에는 머리를 쥐어뜯다 떼쓰는 어린애 표정을 지었다. 나는 드링크를 들이키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캔을 찌그러뜨려 쓰레기통에 장거리 슛까지 날렸다. 일순 등골이 오싹해져 치히로를 봤더니 커터칼을 드르륵, 거리고 있었다.

 목숨이 아까워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얼마 전에 의상실에서 또 못 보던 의상을 발견했습니다.”

 “문제네요. 누가 자꾸 그런 걸 가져오는 걸까요.”

 “시치미가 능숙하시군요. 계속 불법반입 하시면 사장님에게 말하겠습니다.”

 “입고 사진 찍어 드릴 테니 봐주세요.”

 “바니걸보다는 지금 입고 계시는 정장이 더 좋습니다만. 특히 살짝 흐트러진 머리칼과 상의, 갈색 스타킹이 섹시하십니다.”

 “지금 작업 거는 건가요.”

 “근데 제가 섹시한 걸 안 좋아해요.”

 치히로가 다시 커터칼을 집었다.

 “이거 새로 산 건데 엄청 잘 들어요.”

 “살려주세요.”

 더는 안 돼, 한계예요. 치히로가 등받이에 쓰러졌다. 나도 책상에 몸을 기댔다. 달력을 넘겨 겨울 페스티벌의 날짜를 확인했다. 남은 기간도 작업량도 심히 살인적이었다. 기획을 조금 간소화 시킬까, 하지만 그러면 무대가 너무 심심해져, 유닛 결성 기념 라이브를 겸하는데 타협을 할 수는 없지, 어쩔 수 없이 연속 철야를 해야 하나, 근데 그랬다가 아나스타샤한테 들키면…….

 잡다한 걱정들을 지우고 모니터에 집중했다. 지금은 일만 생각하자. 죽지 않을 만큼만 일하면 돼. 죽어도 다 끝내고 죽으면 되고. 다시 키보드에 손을 올리려 할 때 선배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내가 왔다! 양손에 야식이 한 가득이었다.

 

 “나이스 타이밍이었습니다, 선배.”

 “영웅은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는 법이지.”

 젓가락을 뜯고 음식을 흡입했다. 아직도 내 식사량에 적응 못한 선배가 신기하게 쳐다봤다. 한편 치히로는 식욕을 돋우는 향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타코야끼를 입에 넣다 선배가 물었다. 왜 안 먹어?

 “다이어트 중이라서. 간신히 뺏는데 이거 먹으면 무산되잖아.”

 “굶으려 하지 말고 운동으로 빼.”

 “너랑 프로듀서님은 먹어도 안찌는 체질이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야키소바와 소시지를 삼키고 내가 슬쩍 손을 들었다. 저는 철저한 운동으로 관리하는 몸입니다. 치히로가 또 원한 섞인 눈을 했다. 잘나셨어요, 정말. 이어서 음식들을 향해 복잡한 심경을 쏘아 보냈다. 보다 못한 선배가 핀잔을 줬다.

 “그냥 먹어. 별로 찌지도 않았으면서 더 빼서 뭐하게? 아이돌할 거냐?”

 “왜? 하면 둘이서 프로듀스 해줄 거야?”

 “선배한테 맡기겠습니다. 분명 성공시켜줄 거예요.”

 “사양할게. 귀신 악마를 어떻게 프로듀스 하냐.”

 “말이나 안 하면…….”

 결국 치히로는 한입도 먹지 않고 먼저 일로 돌아갔다. 나와 선배는 그릇까지 핥아먹고 뒤늦게 합류했다. 치히로가 쉽사리 건들기 어려운 기운을 뿜고 있어서 조용히 일만 하기로 했다. 이번에 해야 할 건 이벤트 무대인가. 스크롤을 내려 무대 내용을 확인하다 거슬리는 부분을 발견했다. 선배, 여기 문제가 있습니다. 어디?

 “이벤트 무대 1번 라이브요.”

 “거기 내가 감수한 부분인데? 뭔 문제가 있다는 거야?”

 “아나스타샤가 센터가 아닌데요. 제가 처음 기획할 때랑 달라요.”

 “아. 난 또 뭐라고. 밸런스 고려해서 바꿨다.”

 네? 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말하자 선배도 왜 그러냐는 투로 받아쳤다. 뭐가?

 “밸런스 고려하면 더더욱 아나스타샤가 메인이어야죠. 우리 애들이 돌아가면서 한 번씩 센터 하고 메인 무대에 완전체로 모이는 콘셉트였다고요.”

 “너 그거 욕심이야. 유닛 결성 기념인 건 아는데 이번 페스는 사무소 전체의 결산 라이브이기도 하다고. 다른 부서 비중도 챙겨야지.”

 “전체 비중도 고려한 겁니다. 다른 아이돌들은 다른 무대에서 더 빛낼 수 있잖습니까. 우리 애들은 여기가 최적의 퍼포먼스를 보일 수 있는 시간, 장소라고요. 오히려 결성 기념 무대를 날리면 우리 유닛 홀대한다고 팬들이 난리칠 겁니다.”

 “안 돼. 절대 안 돼. 이거 봐주면 매년 이맘때 마다 푸시 해달라고 할 거잖아.”

 치열한 논쟁이 이어졌다. 선배의 능력은 인정했지만 이번만큼은 센스가 낡았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회사가 우리 애들을 위해 이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나는 강력히 의견을 피력했고 선배도 단호히 차단했다.

 그 때, 쾅! 하고 치히로가 책상을 내리쳤다. 무언가가 태어났거나 태어날 것만 같은 음산한 기운을 발하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선배도 검토하던 서류를 마저 검토하기로 했다.

 그 후 밤 동안 타자치는 소리와 종이 넘기는 소리 외에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본편 링크)

 

쓰느라 2주 정도 걸린 것 같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치히로 씨의 이야기인데, 처음으로 추리를 써봤습니다.

생각한 것 만큼이나, 그리고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어려워서 추리 소설 쓰는 분들을 존경하게 됐습니다.

나름대로 단서를 뿌려놓고 마지막에 조합하는 식으로 해봤는데 어거지가 좀 많은 느낌입니다.

아는 게 없어서 고치고 싶어도 못 고친다는 점이 제일 시무룩 하네요.

 

'백야' 편처럼 분량은 좀 되지만 이번에는 상하 편으로 나누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잘 쓴 추리는 아닌데 분량을 둘로 나누면 읽는 분들이 헷갈리실 것 같아서요.

 

'우상' 편의 주역은 치히로 씨 입니다.

이야기를 생각하게 된 계기는 좀 단순한데, 농담삼아 말하는 '귀신 악마 치히로'가 진짜라면 치히로 씨는 왜 그렇게 됐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드링크를 달고 살며 독하게 일하지만 인정은 못 받고, 상사에게 시달리고, 그러면서도 남들에게 친절한 이미지를 유지해야 한다면......

미쳐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네요. 그리고 어찌보면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이 씁쓸합니다.

뭐, 처음 구상과 비교하면 본편의 내용은 (제가 회사 생활을 해본 적 없는 관계로) 많이 순해지긴 했지만요.

 

이야기에 대해 궁금하신 점이 있다면 댓글로 질문해 주십시오.

답변해 드릴 수 있는 내에서 성실하게 답해드리겠습니다.

 

다음 화는...... 아마도 쓰게 될 텐데 미오가 나옵니다.

이야기 진행 방식은 이번 화와 비슷하게 갈 것 같습니다.

0 여길 눌러 추천하기.